고전으로 집 읽기 : 집은 集이다 6화
집이란 무엇일까? ‘a0100z’ 성상우 소장이 건축으로서의 집을 넘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이웃, 사람과 환경이 어떻게 어울려 살아가야 할지 우리에게 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전을 통해 본질을 묻는다.
조선의 역사를 대표하는 건축물을 꼽는다면?
궁궐 이야기에 궁궐이 아닌 종묘를 먼저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종묘라는 한 건축물로 우리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신과 그를 발현하게 한 물상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이 101m에 이르는 장대한 정전의 건축적인 스케일에 우리는 절제, 대범, 단순, 고요, 엄숙, 긴장, 유현, 영속이라는 감상의 단어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 뒤에 감춰진 생각의 바탕을 이해한다면 조선의 정신과 역사 또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번 이야기는 형상을 이해하기 위해 형상 이전의 형이상학에 대해 풀어보려 한다. 종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첫 번째로 제사의 기능과 관련해서 <중용> 19장을 통해 효(孝)를 바탕으로 하는 제사가 어떻게 조선의 통치 이념에까지 나아가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종묘가 단순한 제사의 의미를 넘어 모두 하나가 되게 한다는 의미를 <주역> 택지(澤地) 췌(萃)괘를 빌려 ‘백성 취합(聚合)’의 이치를 이야기하겠다. 세 번째로는 조선의 유구한 역사가 어떻게 건축으로 장대(長大)하게 되었는지 <주역> 계사전 1장 ‘이간(易簡 : 쉽고 간단하다)’의 의미를 통해 이야기할 것이다.

Q: 종묘란 무엇인가?
종묘는 역대 임금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드리는 국가의 신전이다. 옛것을 받들어 현재를 발전시킨다는 유교적 역사관(法古創新)에 바탕을 두며, 선조에 대한 제사는 가장 으뜸인 윤리이자 종교적 교리다. 현재 종묘에는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조선 왕실, 대한제국 황실의 유교 사당이다. 태조 3년(1394년) 10월에 한양 천도가 확정되면서 경복궁보다 먼저인 태조 4년 9월에 새로운 종묘가 완공되었다.

Q: 궁궐이 아닌 종묘를 먼저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종묘가 궁궐보다 먼저 건립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짐짓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도읍지가 정해지면 가장 먼저 서둘러 세워야 할 세 가지 건축물이 있다. 왕궁, 종묘와 사직, 그리고 성곽이다. “종묘는 조상을 받들고 효경을 숭상하는 곳이고, 궁궐은 존엄을 보이고 정령을 반포하는 곳이요.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니, 이들을 가장 먼저 건설해야 한다.” 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건설할 때 가장 먼저가 종묘고 그다음이 궁실이다. 종묘는 국가의 정치적 핵심이고 또한 천명이나 조상의 보우(保佑), 인민들의 신앙 등은 모두 종묘와 관련이 있다. 종묘가 없으면 정치적 핵심과 지도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종묘가 있어야 비로소 백성들의 마음을 취합(聚合)할 수 있고 중지(衆志)를 모을 수 있는 것이다.

Q: 제사(祭祀)가 어떻게 나라의 근본정신이 될 수 있는가?
국가란 ‘일정한 영토와 거기에 사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주권(主權)에 의한 하나의 통치 조직을 가지고 있는 사회 집단’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들을 모으는 데 있다. 지역 택지(擇地 : 땅 위에 모여 있는 형상) 췌(萃 : 모으다) 괘는 종묘 제사를 통해 민심을 모으는 역할에 대해 잘 설명해 준다. <주역> 췌괘에는 ‘왕격유묘(王假有廟)는 치효향야(致孝享也)’, ‘왕이 사당(종묘)에 이른다는 것은 효성(孝誠)으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제사는 인심이 다하는 것이므로 천하의 마음을 모음은 효(孝)의 제사만 한 것이 없으니, 왕이 천하를 모으는 도가 사당을 둠에 이르면 극진할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효(孝)라는 윤리 덕목이 어떻게 국가의 정치 이념으로 발전하고, 이 효의 마음이 종묘 건축의 형상으로 드러나는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논어>에 ‘효(孝)와 제(悌)는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다.’ 제사는 선조와 후손을 이어주는 효의 의례이다. <논어> 안연편 2장에 공자는 위정자의 도리에 대해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모시듯 하라’고 하셨다. 모든 모임의 근본은 제사다. 축제(祝祭)도 제사에서 유래했다. ‘종묘의 제사가 어떻게 국가의 정치적 핵심이 될 수 있나?’하는 질문이 요즘 현대인에게 의아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점이다. 조선의 정치 이념은 유교적 덕치주의와 민본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도덕적 덕의 바탕은 인(仁)이며, 인은 효를 바탕으로 한다.
Q: 사상(思想)이 형상화(形象化)로?
조선 500년에 걸쳐서 101m, 19칸에 이르도록 같은 형식이 답습되어 온 바탕에는 어떤 마음이 있었을까? 아래의 문장으로 그 정신을 가늠해 보려 한다. ‘부효자(夫孝者)는 선계인지지(善繼人之志)하며, 선술인지사(善述人之事者也)니라’. ‘효란 조상의 뜻을 잘 이어받고 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이다.’(<중용> 19장 중) 효라는 종묘 제사는 추원(追遠 : 조상의 덕을 생각하여 제사에 정성을 다함)의 의미도 있지만, 조상의 뜻과 사업을 되돌아보는 의례(儀禮)라 본다. 그래서일까 101m로 세대를 거쳐 이어져 온 정전에서 우리는 효의 선계(善繼)와 선술(善述)의 의미를 새겨 봐야 하겠다.

Q: 정령이 깃든 종묘의 장소성이란?
외대문을 지나서 삼로(신로, 어로, 세자로)를 걸어가다 보면 ‘고요’라는 감정과 함께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존재 시원의 물음이 솟구쳐 올라온다. 이 매봉 용맥의 구릉 사이 곡(谷 : 산이 겹쳐 내려오는 사이의 평탄한 지형)에는 후원, 창덕궁, 창경궁, 종묘가 자연의 구릉을 경계로 독립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고, 이 숲의 흐름은 목멱산(현재의 남산)까지 이어져 있다. 지금은 창덕궁과 종묘를 가르는 율곡로가, 남산과는 세운상가로 인해 이 숲의 길이 끊어졌다. 하지만, 종묘가 종묘일 수 있는 것은 장대한 정전 건축물이 아니라 정령이 깃든 울창한 ‘숲의 종묘’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종묘가 중국 태묘나 베트남의 세조묘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 좌종묘 우사직의 원칙을 지키면서 자연환경과 고대로부터의 토템 신앙, 그리고 효에 대한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Q: 함께 걷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종묘는 길의 건축이다. 외대문에서 정전으로 이어지는 숲속 정령이 깃든 삼로, 자연 지형에 순응하듯이 두 축이 나란하게 뻗지 않은 정전과 영녕전을 잇는 길, 정전의 신문을 지나 거친 박석의 월대 사이 정전을 향해 난 전벽돌의 외줄기 신로, 정전 내부의 태조 신위부터 순정 신위까지 하나로 이어진 정전 내부의 길. 먼저 외대문을 들어서면 숲속 사이로 곧게 난 삼로(신로, 어로 세자로)를 만난다. 이 길은 산 자와 돌아가신 조상이 함께 걸어가는 길이다. 먼저 중간의 길은 임금이라도 다닐 수 없고 혼령만이 드나드는 길이다.

신도 좌우 측에 난 두 개의 길은 제사 담당자인 임금과 세자가 이동하는 의례의 길이다. 세자는 시간이 지나 왕이 될 것이고 왕 또한 언젠가는 조상이 걸어간 신로를 밟을 때가 올 것이다. 앞서간 왕들이 걸은 길을 자신이 걸어 보고, 돌아가신 선조들과 함께 걸으며 그분들이 하고자 한 뜻과 사업을 마음에 새기는 길이라 하겠다. 종묘의례에서 삼로를 따라 함께 걸어가는 행위에서 선계(善繼)와 선술(善述)의 답습이라 생각하며, 그래서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닌 도(道)가 되는 것이다.

Q: 종묘의 월대(月臺)는 어떤 마당인가?
정전의 장대한 느낌은 동서로는 109m, 남북으로는 69m의 넓은 월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의례 시에는 남쪽의 신문으로 혼령이, 동쪽문은 임금과 제관들이, 서쪽문은 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춤을 추는 일무원이 출입했다. 종묘의 월대는 단지 비워진 공간이 아니라 종묘 의례를 위한 중요한 무대가 된다. 아마도 종묘 월대를 조성할 때 그 크기 계획은 다음 문장을 참고했을 것이다.
‘천기위(踐其位)하여 행기례(行其禮)하며, 주기락(奏其樂)하며, 경기소존(敬其所尊)하며, 애기소친(愛其所親)하며 사사여사생(事死如事生)하며, 사망여사존(事亡如事存)이 효지지야(孝之至也)니라.’ 즉, ‘그의 자리에 올라 그가 하던 예를 행하며, 그가 즐기던 음악을 연주하며, 그가 높이던 바를 공경하고, 그가 친애하던 바를 사랑하며, 죽은 자 섬기기를 한 사람 섬기듯 하며, 없는 사람 섬기기를 살아있는 사람 섬기듯 하는 것이 효의 지극함이다.’(<중용> 19장) 월대는 제사를 위한 이동의 공간이며 또한 돌아가신 왕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평소 그들이 즐겨 듣고 보았던 춤과 음악과 노래를 제례에 펼쳐 보이는 장소이며 그리고 동쪽 단부에는 공경하고 친한 신하들이 도열해 있다. 하월대 아래에는 그 외의 문무백관들이 도열하는 장소가 된다.

종묘의 월대는 궁궐의 정전인 조정과 닮았으나 다른 점이 하나 있다. 하월대와 담장 사이에 월대보다 약 1m 낮은 흙 마감으로 된 좁은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경기소존(敬其所尊), 애기소친(愛其所親)’(<중용> 19장)의 원칙에 따라 공경하고 친애해야 할 칠사당과 공신당이 놓여져 있는데 이것은 정전과의 위계 차이를 의도했을 것이고, 다른 중요한 이유는 땅으로 돌아간 백(魄)이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는 장소를 부여한 것으로 a0100z는 생각한다.
Q: 7→0→7→11→15→19. 이 숫자는 무엇을 의미할까?
종묘는 태조 4년(1395년), 정전 7칸을 시작으로 세종 3년(1421년)에 5묘제 관습에 따라 정전에서 나와야 하는 추존왕 4대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중앙 네 칸, 좌우 한 칸 협실의 별묘를 위한 영녕전을 지었다. 첫 번째 증축이 명종 원년(1546년), 네 칸을 증축하여 11칸이 되었다. 그런데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전소해 다시 광해군 즉위(1608년)에 원래 모습인 11칸으로 복원했다. 영조 2년(1726년)에 정전 네 칸을 증축해 15칸이 되었다. 마지막 증축은 헌종 2년(1834년) 네 칸을 확장해 19칸이 되고, 영녕전 또한 협실 다섯 칸을 확장해 15칸이 되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장대한 19칸 정전의 모습은 조선이 개국하고 442년이 지난 후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해 두길 바란다.
Q: 정전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까닭은?
‘종묘지례(宗廟之禮)는 소이서소목야(所以序昭穆也)’(종묘의 예는 그것으로써 소목의 차례를 밝히는 것이고)처럼 조선이 중국 주례의 예를 따라 종묘를 세웠으나, 건축의 방식은 주례의 소목(昭穆)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 정전의 경우 흔히 서상(西上 : 서쪽을 숭상) 제도의 예를 따랐다고 하나, 무언가 명쾌하지 않다. 정전의 평면 증축 과정을 보면 동쪽으로 증축되어 간다. 서상의 제도니, 그것은 당연하다. 종묘는 효를 상징한다. 효는 인(仁)이다.

인은 어떤 생명도 차별 없이 소생시키는 봄의 덕성이다. 인은 오행(五行)의 방향으로 보면 동쪽이다. 정전이 동으로 이어져 간 것은 이런 의미의 표상이라 본다. 정전은 동당이실(同堂異室 : 하나의 건물 내에 실만 구분하여 여러 신위를 함께 모시는 제도)를 따랐다. 이런 열아홉 칸이나 증 축된 동당이실 평면을 추 상해 보면 <주역>의 감(☵ : 물을 의미)괘를 닮았다. 물의 본성은 사물에 생명을 부여함이 끊임없이 흘러간다. 주역 건괘의 자강불식(自强不息)을 닮았다. 그래서 영원(永遠)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조선의 종묘는 ‘서상(西上)의 원리는 존중하지만, 궁극적으로 나아가는 방향은 동쪽’이라고 여긴다. 정전이 단지 죽은 자를 위한 추모의 장소가 아니라, 조선의 덕치(德治)가 이어져야 할 방향을 가리킨다면, 인(仁)을 바탕으로 생명을 생성하는 시원의 동쪽으로 나아가게 할 의도라고 a0100z는 생각한다.

Q: 종(宗)의 반복인가?
조선의 종묘처럼 긴 시간을 가지고 효의 선계(善繼)와 선술(仙術)의 개념을 답습과 반복이라는 형식으로 만들어낸 경우는 세계 건축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렵다. 종묘 건축을 개념으로 형상의 원칙을 살펴보자. 첫 번째, ‘종(宗)’자를 이해하면 정전 건축을 거의 이해하는 것이라 본다. ‘종(宗)’은 ‘면(宀 : 사당의 지붕 모양)’과 ‘시(示 : 제사를 지낼 제탁의 모양)’가 합쳐진 의미인데, 신위를 모실 감실과 제사를 위한 제탁, 그리고 제사를 지낼 제관을 고려한 건축 행위 구성이라 보면 되겠다. 이 ‘종’자의 단면이 서에서 동으로 술이불작(述而不作 : 기술하되 지어내지 않는다)의 답습으로 이어져 긴 정전이 되었다. 그리고 앞서 마당 이야기에서 마당과 마루의 ‘마’가 으뜸(宗)이라 설명했다. 종묘의 형상을 ‘종(宗)’으로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Q: 장대(長大:길고 크다)의 원칙이란?
우리가 지금 마주하는 종묘는 분명 태조 때의 양식이었을 것이다. 종묘는 효의 선계와 선술의 개념을 답습과 반복이라는 원칙에 따라 영건이 되었다. 왜란으로 소실된 후에 광해군이 중건했을 때도 그 형식을 따랐을 것이다. 조선의 유구한 역사를 장대한 일(一 : 하나, 한결, 한마음)자로 이어져 온 구축의 원칙을 말한다면 <주역>의 이간(易簡) 원칙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주역> 계사전 상편 1장에는 ‘지속 가능한 생성의 법칙으로 나가기 위해 마음이 오래가야 하고, 뜻하는 바의 일이 크게 이뤄져야 하는데 그 원리로는 인위가 없는 소박하고 검소한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이간(易簡 : 쉽고 간단하게)의 법칙으로 하여야 한다.’라고 했다. 종묘는 목구조 방식 중 가장 단순한 맞배지붕 형식에 처마조차 홑처마로 하였고 공복도 익공식이다. 창방 위에 놓은 화반 1구가 전부다. 칸마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매우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단청(가칠단청)도 최소화했다. 마치 세대를 뛰어넘는 시원이며 기본의 기본 같다. <주역> 계사전에서 말하는 상동하우 이대풍우(上棟下宇 以待風雨 : 대들보는 위에 꼿꼿이 가로 놓였고, 서까래는 그 양편에서 밑으로 내려뜨려 비바람을 막았다)의 표상이다.
끝으로
종묘(宗廟) 제사는 효를 바탕으로 민심을 모으는 일이다. 효는 만물 생성과 사랑이라는 인(仁)으로 확장되어 선계(善繼)와 선술(善述)의 답습(踏襲) 개념으로 인의 동(東)으로 끊임없이 흘러간다.
글과 자료_ 건축가 성상우, 오혜정 : a0100z(아:백제) space design

구성_ 신기영 | 사진·그림_ a0100z
ⓒ월간 전원속의 내집 2025년 11월호 / Vol. 321 www.uuj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