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는 버리자, 뉴클래식이 도래했다 [콘텐츠의 순간들]

김윤하 2024. 9. 29.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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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단순한 레트로 지향이 아닌 과거의 습격 수준이다. 흥미로운 건 케이팝 과거 여행이 시대를 대표하는 ‘국민 그룹’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레트로의 리을(ㄹ)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을 얼마든지 안다. 이해는 간다. ‘레트로’는 ‘청춘’과 함께 21세기 대중문화에서 가장 많이 소환되고 그만큼 소모되어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과거 없는 현재는 없다지만, 확실히 21세기는 20세기에 지나치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본격적으로 분석한 책 가운데 음악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 마니아: 과거에 중독된 대중문화〉가 있다. 그는 2000년대에 들어 하염없이 과거를 바라보게 된 대중문화를 음악 중심으로 깊이 있게 분석하며 빠르게 상업화되어가는 복고 지향에 위험신호를 보낸다. 대중문화의 독창적 미래 앞에 놓인 가장 큰 걸림돌이 실은 우리의 과거가 아닐까 하는 우려다.

올여름 음악계 화제를 갈무리하면서 그의 통찰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나아가 더욱 확장되고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우선 좀처럼 바람 잘 날 없는 케이팝 신에 오랜만에 분 훈풍, 투애니원(2NE1)의 재결합이 있었다. 무려 8년 만에 다시 뭉친 이들은 오는 10월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리는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데뷔 15주년 기념 월드 투어를 연다는 소식을 전했다. 완전체로 활동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독보적이라는 단어가 손꼽히게 어울리는 그룹이었기에 한국뿐 아니라 전 글로벌 케이팝 팬덤 전체가 술렁였다. 8월 초 열린 티켓 예매에 무려 40만명 이상이 동시접속하며 ‘2NE1은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반어법 유행어가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뒤덮기도 했다.

8년 만에 재결합한 투애니원. 10월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데뷔 15주년 월드 투어를 연다. ⓒYG 엔터테인먼트 인스타그램 갈무리

최근 재결합을 알린 케이팝 추억의 아이콘은 비단 2NE1뿐만이 아니다. 2세대를 대표하는 보이 그룹 인피니트는 얼마 전 7년 만의 팬 미팅 ‘무한대집회’를 성황리에 마쳤고, 갖은 풍파에 휩싸이며 한동안 소식을 들을 수 없던 그룹 B.A.P는 방용국&정대현&유영재&문종업이라는 직관적 이름으로 다시 가요계의 문을 두드렸다.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오랜만에 완전체 무대를 선보인 걸그룹 러블리즈는 얼마 전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신곡과 투어 소식을 알렸고, 2000년대 중반 케이팝 암흑기를 평정한 실력파로 여전히 언급되는 걸그룹 천상지희도 ‘네 사람이 단톡방을 팠다’며 재결합의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 정도면 단순한 레트로 지향이 아닌 과거의 습격 수준이다. 이러한 재결합, 과거 소환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보통 ‘지금이 도대체 몇 년도냐’와 ‘돈 떨어졌나 보다’라는 반응이 동시에 등장한다. 양극단을 부지런히 오가는 감정 사이를 촘촘히 채우는 건 케이팝의 영토에도 이제 그만큼 추억을 되새길 만한 역사가 충분히 쌓였다는 사실이다.

흥미로운 건 케이팝 과거 여행이 시대를 대표하는 ‘국민 그룹’만이 아닌, 시대가 외면하는 사이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자신들만의 다양한 서사를 구축한 그룹의 음악과 이야기로부터 출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유튜브 채널 ‘문명 특급’의 대표 히트작 ‘숨듣명(숨어서 듣는 명곡)’ 기획이 대표적인 예다. ‘숨듣명’이 적극적으로 소환한 건 케이팝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이들이 아니었다. 눈부신 스포트라이트가 여전히 낯선, 케이팝의 짧지 않은 역사 속 가려진 그림자 같은 이름들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재도전’ 버튼

실제로 케이팝 재결합은 해당 그룹이 활동 당시 인기나 실력에 준하는 평가나 반응을 얻지 못했을 때 더 뜨거운 반응을 이끄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레트로 이름표를 목에 건 채 운명처럼 주어진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대중 앞에 선다. 게임으로 치면 ‘재도전’ 버튼을 눌러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는 셈이다. 이런 경우, 레트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라는 정의에서 자연스레 멀어진다. 과거가 현재의 타임라인에서 새 생명을 얻는다. 그곳에서 추억이 아닌 새로움이 태어난다.

대상의 폭을 조금 더 넓혀보자. 한국 대중음악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감지된 쪽은 비단 케이팝만이 아니다. 케이팝이 특유의 비상식적으로 빠른 속도를 기반으로 자신들만의 레트로 법칙을 만들어가는 사이,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 대중음악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맹렬한 움직임이 꾸준히 이어졌다. 다양한 사례가 있지만, 그 가운데 장기하와 기린을 대표로 꼽고 싶다.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에서 솔로 작업까지, 음악가 장기하가 15년 가까이 좇고 있는 건 영미권 음악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한국 대중음악의 빛나는 과거였다. 그가 자신의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던 ‘한국 대중음악의 오래된 미래’는 그 자체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레트로 지향을 갈무리한 상징적 표현이었다. 1990년대 초 잠시 유행한 장르로 박제될 수도 있었던 ‘한국적 뉴 잭 스윙’을 기어코 지금의 트렌드로 만든 기린의 활약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현재의 감각으로 레트로를 다룬 앨범이 연이어 발매되었다. 왼쪽부터 베이빌론, 수민(뒤)&슬롬, 죠지.

여기에 7월 중순에서 8월 중순까지 한 달여 사이 쏟아진 베이빌론, 수민&슬롬, 죠지 같은 한국 R&B 신의 젊고 영민한 음악가들이 재구성한 한국의 과거에도 주목하고 싶다. 〈EGO 90’S〉라는 타이틀로 벌써 세 번째 정규 앨범을 발표한 베이빌론의 한국 1990년대 음악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접근은 그 시대를 단순히 ‘유행가’가 득세한 ‘가요 톱10’의 시대로 퉁쳐버린 과거를 부끄럽게 한다. 흔히 ‘수목 드라마’로 대표되는 한국의 독특한 젊음과 사랑을 ‘미니시리즈(MINISERIES)’라는 테마 아래 감각적으로 풀어낸 수민&슬롬, 한국 대중음악의 ‘바래지 않을 세련’을 골라 지금의 빛과 색으로 담은 죠지의 앨범 〈김밥(gimbap)〉까지 무엇 하나 허튼 레트로가 없다. 아직도 구태에 머무르는 ‘레트로’는 이제 꽁꽁 묶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던져버리자. 각자의 자리에서 의미 있는 과거를 찾아 현재와 개성 있게 조응하는, ‘뉴클래식’의 도래다.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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