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강릉 무장공비 침투, 긴박했던 그날…“북한군에 죽더라도 위치는 알리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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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물 풍선 살포 등 북한의 도발이 끊이지 않으면서 국가 안보가 흔들리는 시기, 경기일보는 10월 1일 국군의 날을 맞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되돌아봤다.
그는 또 "이 사건이 있고 나서 1년 뒤에 IMF가 터졌기 때문에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다"며 "다른 무장공비 사건도 있지만, 근대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다"며 역사적 인식에 대한 필요성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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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공비에게 죽더라도 위치는 알려야겠다는 마음에 총구에 손가락을 넣고 걸었죠”
오물 풍선 살포 등 북한의 도발이 끊이지 않으면서 국가 안보가 흔들리는 시기, 경기일보는 10월 1일 국군의 날을 맞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되돌아봤다.
1996년 9월 18일. 강릉 앞바다에서 북한 잠수정이 발견된다. 26명의 북한군이 잠수정을 타고 우리나라 해안에서 첩보 활동을 벌이던 중 잠수정이 좌초된 것이다.
무장공비들은 곧바로 상륙 침투를 실시했고 우리 군은 ‘진돗개 하나’를 발령, 대대적인 수색 작전에 나섰다.
경기일보는 강릉 무장공비 수색 작전에 투입했던 최원재 경기일보 정치부 부장을 만나 당시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는 “작전 투입 전에 헬기 레펠에서 내려가다가 적의 총에 맞아 사망한 전우가 있었다”며 “곧바로 우리도 헬기를 타고 가는 상황이라 많이 두려웠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최 부장은 “작전 기간 동안 적과 조우했을 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많이 두려웠다. 하지만 국민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했다.
그러면서 “임무 중 혼자 산길을 다녀와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그때 적을 만나서 내가 죽이지 못하면 북한군의 위치라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총구에 손가락을 넣고 하늘에 쏠 준비를 하면서 걸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사건이 있고 나서 1년 뒤에 IMF가 터졌기 때문에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다”며 “다른 무장공비 사건도 있지만, 근대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다”며 역사적 인식에 대한 필요성을 언급했다.
김다희 PD heeda@kyeonggi.com
허수빈 인턴PD soopin2@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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