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가이를 위한 시계 설명서(2) 르망 24시와 롤렉스 데이토나

*이번 주말(6월 14일~6월 15일) 프랑스에서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가 열립니다. 

아이콘이 된 이름이 있다. 매년 6월 프랑스 라 사르트 서킷에서 열리는 자동차 내구레이스 대회, 정식으로는 FIA 세계 내구선수권 대회(World Endurance Championship, 이하 WEC) 4차전 경기를 우리는 '르망 24시'라 부른다.

2025 WEC는 2월부터 11월까지 총 8회의 레이스로 진행되는데, 르망 24시는 시즌 중간인 4차전이며, 참가하는 팀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레이스다. WEC와 별개로 르망 24시 그 자체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대회인데, 오직 르망 24시에서 승리하면 자동차 레이스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을 정도다. 르망 24시의 승리는 대단히 무거운 이름값을 가질 뿐 아니라, 우승했을 때의 WEC 포인트도 다른 라운드의 두 배다.
시계 이야기로 돌아가자. 가장 유명한 모터스포츠용 시계는 무엇일까? 단연 주인공은 롤렉스고, 모델 이름은 '데이토나'다. 플로리다 데이토나 비치에서 열리는 그 레이스를 떠올렸다면 바로 정답이다.

스톱워치 기능을 갖춘 시계를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라 부르는데, 역사적으로 모터스포츠에서 기록 측정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그런데 롤렉스는 최초의 크로노그래프를 발명한 시계 메이커도 아닐 뿐더러, 1960년대 이전에는 롤렉스 크로노그래프가 별 인기를 얻지 못했다. 아마 시계의 명성만 놓고 보면 경쟁사였던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가 우주비행사의 시계로 더 유명했을 것이다.

그런데 1962년, 롤렉스가 새로운 크로노그래프 모델을 출시한다. 사실 시계의 디자인은 오메가 스피드마스터의 장점을 흉내낸 부분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롤렉스 크로노그래프'는 야심차게 출시한 모델이었고, 특별한 이름이 필요했다.
                                                        이 시계는 롤렉스 르망입니다. 가격은 210달러.

롤렉스는 이 시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레이스의 이름, 그러니까 '롤렉스 르망'이라는 이름을 붙이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이나 그 당시나 롤렉스가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는 미국이었고, 미국에서는 르망 24시 보다 데이토나가 더 인지도 높은 레이스라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롤렉스 크로노그래프는 '이 시계는 롤렉스 르망입니다'라며 광고까지 인쇄해 놓은 상태에서 이름을 데이토나로 바꾼다. 어차피 시계 다이얼에는 ROLEX와 CHRONOGRAPH라고만 새겨져 있어서 이름을 바꾸는데는 조금도 문제가 없었다.

이리저리 치이던 롤렉스, 폴 뉴먼 덕에 신분상승 

롤렉스 크로노그래프는 시계 모델명을 데이토나라 붙인 덕분에 불티나게 팔리...지는 않았다. 당시 사람들에게 최고의 화제거리는 미국의 달 탐사 계획인 아폴로 프로젝트였고, 아폴로 프로젝트에 사용된 '문 워치'는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 모델이었다.

심지어 스피드마스터는 롤렉스의 삼분의 일 가격인 70달러에 살 수 있었다. 우주비행사가 사용한 프로페셔널한 시계인데 가격도 저렴하니, 사람들이 롤렉스 데이토나를 살 이유는 별로 없었던 셈이다. 게다가 크로노그래프 시계 분야에서는 제니스와 브라이틀링이 전통의 강자였으니, 이리저리 치이던 롤렉스 데이토나는 상시 할인 판매하는 비주류 모델 신세로 전락한다.
물론 데이토나의 낮은 인기와는 별개로 롤렉스는 당시에도 널리 인정받던 시계 메이커였다. 그런데 당시 최고의 헐리우드 스타 중 한 사람인 폴 뉴먼이 롤렉스 데이토나를 자주 착용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다. 폴 뉴먼은 배우이자 본인이 직접 프로 레이싱에 참여하는 레이서였고, 그의 아내 조앤 우드워드가 1969년에 안전을 기원하면서 시계의 뒷면에 'Drive Carefully Me'라는 문구를 새긴 데이토나를 티파니에서 구입해 선물했던 것.
폴 뉴먼이 착용했던 롤렉스 데이토나는 크림 바탕색에 검은 색 서브다이얼이 들어가고, 눈금의 끝에 사각형이 들어간 독특한 디자인의 모델이었다. 독특한 디자인 덕분에 더욱 인기가 없었던 모델이지만, 폴 뉴먼의 시계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이 모델은 '폴 뉴먼 데이토나'라는 별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에 이르며 데이토나는 수집가들이 찾는 모델 목록에 오르기 시작한다. 수량이 적은 비인기 모델일수록 오히려 수집품으로서의 가치가 오른다. 그리고 이 '폴 뉴먼 데이토나'는 언제부터인가 롤렉스 수집가들의 성배 같은 시계가 되었고, 시판되는 현행 모델의 인기도 함께 올라가는 후광을 얻었다.

폴 뉴먼의 첫 데이토나(Ref. 6239)는 2017년 10월, 뉴욕 필립스 경매에서 1,775만 2,500달러에(약 240억 원) 낙찰되며 빈티지 손목시계 최고 낙찰가를 경신하기도 했다. 폴 뉴먼이 소유하고 착용했던 데이토나는 두 점이 더 경매에 출품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1995년 데이토나 24시에서 폴 뉴먼이 우승 부상으로 받은 시계(Ref. 16520)로 'Rolex at Daytona 24 Paul Newman Rolex'이라 새겨져 있고, 다른 하나는 2006년 부인에게서 받은 시계(Ref. 116519)로으로 'Drive Very Slowly Joanne'이라 새겨져 있다.

물 들어 온다~~모터스포츠로 노를 저어라~~

데이토나의 인기가 밀물처럼 차오르자 롤렉스도 열심히 노를 저었다. 롤렉스는 1992년부터 미국 플로리다주 데이토나 인터내셔널 스피드웨이에서 매년 열리는 24시간 내구 레이스인 데이토나 24시(현재의 공식 명칭은 Rolex 24 At Daytona)의 타이틀 스폰서가 된다.

대회의 우승자에게는 부상으로 롤렉스 '오이스터 퍼페츄얼 코스모그래프 데이토나(Oyster Perpetual Cosmograph Daytona)'가 수여된다.

롤렉스는 데이토나 24시 뿐 아니라 2001년부터 르망 24시의 공식 타임키퍼로 파트너십을 맺는다. 현대의 레이스에서 기록 측정은 철저히 디지털화되었으면 경주차에 부착된 타이밍 트랜스폰더와 서킷 곳곳에 설치된 계측 장비가 연동되어 1/1000초 단위로 기록을 잰다.
르망 24시에서 롤렉스의 기계식 시계가 직접 기록을 측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롤렉스는 르망 24시 레이스를 주관하는  ACO(Automobile Club de l'Ouest)의 기술팀 및 스위스 타이밍 같은 기술 전문 회사와 협력해 전체 기록 측정을 총괄하고, 심판단과 미디어를 위한 공식 타이밍 데이터 플랫폼을 운영한다.
이같은 파트너십의 대가는 롤렉스를 르망 24시의 주인공 중 하나로 만들어준다. 경기 상황에 따라 경기 시간이 달라지며 정해진 랩을 달린 순위를 겨루는 포뮬러 원과 다르게, 르망 24시 같은 내구레이스의 첫 번째 기준은 시간이며, 다음이 주행거리다.

레이스가 시작되는 오후 4시, 정확히 절반의 레이스가 진행된 새벽 4시, 레이스가 종료되는 그 다음날 오후 4시는 르망24시 같은 내구레이스에서 큰 상징성을 갖는다. 녹색 배경과 왕관으로 수놓인 경기장, 모든 관중과 관계자들의 시선이 시계에 집중되는 그 순간의 숨은 주인공은 다름아닌 롤렉스다.

롤렉스 데이토나, 챔피언 드라이버의 시계
르망24 시에서 우승한 드라이버들에게는 부상으로 데이토나가 수여된다. 르망 아닌 다른 레이스의 이름을 가진 시계라는 점은 아이러니지만, 이 시계가 갖는 상징성에 대해 의문을 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작년, 2024 르망 24시에서 우승한 주인공은 페라리 AF 팀의 50번 경주차였고, 이들에게는 케이스 백에 특별한 각인이 된 데이토나가 부상으로 수여되었다.

한편 롤렉스는 르망 24시를 기념하는 특별한 모델을 선보이기도 했다. 르망 24시가 100주년을 맞이한 2023년, 이를 기념하기 위한 데이토나 '르망' Ref. 126529LN 모델을 공개했는데, 가장 큰 특징은 원래 9시 방향에 위치한 스톱워치용 서브다이얼이 12시간마다 한 바퀴를 돌았지만, 이 르망 24시 기념 모델은 24시간마다 한 바퀴 돌며, 다이얼 디자인은 '폴 뉴먼 데이토나'의 그것을 모방했다.

한정판 하이퍼카 처럼, 감동 없는 뒷이야기

롤렉스 데이토나 르망은 얼마 전 공식 홈페이지에서 사진이 내려가며 판매가 종료되었음을 알렸다. 국내 판매 가격은 8,000만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시계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시계를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롤렉스를 포르쉐 같은 시계라 비유하기도 한다. 사실 럭셔리 워치 시장에서 롤렉스는 끝판왕이 아니라 그 반대에 가깝다. 오히려 엔트리 모델로 보는 경향이 있다. 고작(?) 1억 원 이하에서 살 수 있는 시계를 럭셔리 워치 끝판왕이라 부르기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인 것이다. 마치 스포츠카 시장에서  포르쉐가 그러하듯, 롤렉스는 가까이 하기에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포르쉐를 구입하는 것은 사치일 수 있지만, 롤렉스 데이토나 르망을 (정가에 살 기회만 있다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구입하는 것은 어쩌면 사치가 아니다. 시계를 급히 판매해야 할 때, 정가 또는 조금 낮은 가격에 판매하고자 하면 당일 중 현금화 할 수 있을 만큼 환금성이 높고, 금괴와 달리 해외에 나갈 때도 갖고 이동할 수 있는 재화이기 때문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환금성, 그리고 어떤 모델은 프리미엄이 붙어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롤렉스를 찾는다. 반면 그렇기에 롤렉스는 어떤 고객에게 시계를 판매할지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어제 판매한 시계가 다음 날 그 몇 배의 가격에 다른 곳에서 되팔리고 있다면, 그것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시계가 그 의미에 가격이 매겨져 다른 이의 손에 거래되는 모습이 널리 알려진다면, 브랜드 입장에서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롤렉스 데이토나 르망이 국내에서 팔리는 그 순간, 일본 긴자의 고급 시계 매장에는 3억이 넘는 가격에 전시되어 있었을 것이다. 시계를 구입하는 순간 몇 배의 수익을 낼 수 있는 셈인데, 과연 이 시계는 고객이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롤렉스가 고객을 선택한 것일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롤렉스 데이토나를 카 가이를 위한 시계로 추천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라는 것.

그럼에도 꼭 데이토나를 차보고 싶다면, 1988년 이후 출시된 90년대의 데이토나, 스틸 모델을 추천한다. 운이 좋다면 현대 아반떼 가격에 시계를 구할 수 있고, 적어도 '사치가 아니라 투자'라고 말해도 가까운 가족에게 등짝을 맞을 일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