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콘이 된 이름이 있다. 매년 6월 프랑스 라 사르트 서킷에서 열리는 자동차 내구레이스 대회, 정식으로는 FIA 세계 내구선수권 대회(World Endurance Championship, 이하 WEC) 4차전 경기를 우리는 '르망 24시'라 부른다.


스톱워치 기능을 갖춘 시계를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라 부르는데, 역사적으로 모터스포츠에서 기록 측정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그런데 롤렉스는 최초의 크로노그래프를 발명한 시계 메이커도 아닐 뿐더러, 1960년대 이전에는 롤렉스 크로노그래프가 별 인기를 얻지 못했다. 아마 시계의 명성만 놓고 보면 경쟁사였던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가 우주비행사의 시계로 더 유명했을 것이다.

롤렉스는 이 시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레이스의 이름, 그러니까 '롤렉스 르망'이라는 이름을 붙이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이나 그 당시나 롤렉스가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는 미국이었고, 미국에서는 르망 24시 보다 데이토나가 더 인지도 높은 레이스라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롤렉스 크로노그래프는 '이 시계는 롤렉스 르망입니다'라며 광고까지 인쇄해 놓은 상태에서 이름을 데이토나로 바꾼다. 어차피 시계 다이얼에는 ROLEX와 CHRONOGRAPH라고만 새겨져 있어서 이름을 바꾸는데는 조금도 문제가 없었다.
이리저리 치이던 롤렉스, 폴 뉴먼 덕에 신분상승
롤렉스 크로노그래프는 시계 모델명을 데이토나라 붙인 덕분에 불티나게 팔리...지는 않았다. 당시 사람들에게 최고의 화제거리는 미국의 달 탐사 계획인 아폴로 프로젝트였고, 아폴로 프로젝트에 사용된 '문 워치'는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 모델이었다.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에 이르며 데이토나는 수집가들이 찾는 모델 목록에 오르기 시작한다. 수량이 적은 비인기 모델일수록 오히려 수집품으로서의 가치가 오른다. 그리고 이 '폴 뉴먼 데이토나'는 언제부터인가 롤렉스 수집가들의 성배 같은 시계가 되었고, 시판되는 현행 모델의 인기도 함께 올라가는 후광을 얻었다.
폴 뉴먼의 첫 데이토나(Ref. 6239)는 2017년 10월, 뉴욕 필립스 경매에서 1,775만 2,500달러에(약 240억 원) 낙찰되며 빈티지 손목시계 최고 낙찰가를 경신하기도 했다. 폴 뉴먼이 소유하고 착용했던 데이토나는 두 점이 더 경매에 출품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1995년 데이토나 24시에서 폴 뉴먼이 우승 부상으로 받은 시계(Ref. 16520)로 'Rolex at Daytona 24 Paul Newman Rolex'이라 새겨져 있고, 다른 하나는 2006년 부인에게서 받은 시계(Ref. 116519)로으로 'Drive Very Slowly Joanne'이라 새겨져 있다.
물 들어 온다~~모터스포츠로 노를 저어라~~

대회의 우승자에게는 부상으로 롤렉스 '오이스터 퍼페츄얼 코스모그래프 데이토나(Oyster Perpetual Cosmograph Daytona)'가 수여된다.



레이스가 시작되는 오후 4시, 정확히 절반의 레이스가 진행된 새벽 4시, 레이스가 종료되는 그 다음날 오후 4시는 르망24시 같은 내구레이스에서 큰 상징성을 갖는다. 녹색 배경과 왕관으로 수놓인 경기장, 모든 관중과 관계자들의 시선이 시계에 집중되는 그 순간의 숨은 주인공은 다름아닌 롤렉스다.



한편 롤렉스는 르망 24시를 기념하는 특별한 모델을 선보이기도 했다. 르망 24시가 100주년을 맞이한 2023년, 이를 기념하기 위한 데이토나 '르망' Ref. 126529LN 모델을 공개했는데, 가장 큰 특징은 원래 9시 방향에 위치한 스톱워치용 서브다이얼이 12시간마다 한 바퀴를 돌았지만, 이 르망 24시 기념 모델은 24시간마다 한 바퀴 돌며, 다이얼 디자인은 '폴 뉴먼 데이토나'의 그것을 모방했다.
한정판 하이퍼카 처럼, 감동 없는 뒷이야기

누군가는 롤렉스를 포르쉐 같은 시계라 비유하기도 한다. 사실 럭셔리 워치 시장에서 롤렉스는 끝판왕이 아니라 그 반대에 가깝다. 오히려 엔트리 모델로 보는 경향이 있다. 고작(?) 1억 원 이하에서 살 수 있는 시계를 럭셔리 워치 끝판왕이라 부르기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인 것이다. 마치 스포츠카 시장에서 포르쉐가 그러하듯, 롤렉스는 가까이 하기에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포르쉐를 구입하는 것은 사치일 수 있지만, 롤렉스 데이토나 르망을 (정가에 살 기회만 있다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구입하는 것은 어쩌면 사치가 아니다. 시계를 급히 판매해야 할 때, 정가 또는 조금 낮은 가격에 판매하고자 하면 당일 중 현금화 할 수 있을 만큼 환금성이 높고, 금괴와 달리 해외에 나갈 때도 갖고 이동할 수 있는 재화이기 때문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환금성, 그리고 어떤 모델은 프리미엄이 붙어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롤렉스를 찾는다. 반면 그렇기에 롤렉스는 어떤 고객에게 시계를 판매할지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어제 판매한 시계가 다음 날 그 몇 배의 가격에 다른 곳에서 되팔리고 있다면, 그것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시계가 그 의미에 가격이 매겨져 다른 이의 손에 거래되는 모습이 널리 알려진다면, 브랜드 입장에서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꼭 데이토나를 차보고 싶다면, 1988년 이후 출시된 90년대의 데이토나, 스틸 모델을 추천한다. 운이 좋다면 현대 아반떼 가격에 시계를 구할 수 있고, 적어도 '사치가 아니라 투자'라고 말해도 가까운 가족에게 등짝을 맞을 일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