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워진 CPU가 찾아낸 구리 꽃 "CNPS 7000을 기억하시나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유명한 작품, 세한도에 제발(題跋) 된 글 끝에는 논어의 한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추운 겨울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비로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평소엔 부각되지 않은 사실들이 위기나 특별한 상황에서 돌출된다는 말이다. 이 논어의 구절을 CPU 쿨러 시장에 대입해 보면 2000년대 초반 대발열 시대로 인해 전설로 승화된 제품이 떠오른다. PC 시장에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고 성능과 명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잘만 CNPS7000 시리즈 이야기다.
대발열의 시대가 열리다
2004년 말부터 PC 시장에는 대발열시대가 찾아온다. 인텔 펜티엄4 '프레스캇'이 그 주인공이다. 기존 노스우드 세대 CPU는 발열도 적고 안정적인 성능으로 상당히 호평을 받았었다. 하여 다음 세대인 프레스캇에 대한 유저들의 기대감이 무척이나 높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따보니 프레스캇이 아니라 프레스핫이라 불릴 정도로 발열 문제가 심각했다.
▲ 2분 만에 90℃를 넘겨버리는 프레스캇 CPU
<출처 : Youtube 'Jan Jansen' 채널>
인텔 프레스캇 CPU는 90nm 공정으로 생산하고 L2 캐시 메모리를 1MB까지 증설하면서 SSE3 명령어 세트가 추가되었지만, 물리적인 한계로 누설 전류가 발생했고 이로 인한 소비전력 낭비와 높은 발열이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오죽하면 케이스 표면까지 열이 전도되어 거의 난방기 수준이 아니냐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그야말로 대발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CPU의 집적도와 클럭이 비약적으로 올라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발열 문제는 그렇게 치명적인 문제점은 아니다. 그만큼 쿨링 솔루션까지 같이 발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레스캇은 달랐다. 안 그래도 초코파이 3개를 포개놓은 것 같은 인텔의 번들 쿨러로는 도무지 발열을 안정적으로 컨트롤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유저들은 이른바 사제 쿨러로 눈길을 돌렸다.
조용한(?) 잘만, 고정관념을 깨다
CNPS7000 시리즈를 만든 잘만은 설립 초기엔 독특한 모양의 히트싱크로 팬리스 쿨링 솔루션을 만드는 등 확실한 쿨링 성능보다는 저소음에 더 비중을 두는 제조사였다. 1999년 설립 후 CNPS2000, CNP2001을 연달아 출시해 이름을 조금씩 알리는 상태였다. 초창기 잘만의 CPU 쿨러는 부채꼴 모양의 방사 형태로 히트 싱크를 집적해 효율을 높인 CPU 쿨러다. 구조상 쿨링팬을 직접 부착하지 못해 PCIe 슬롯 쪽에 있는 I/O 패널에 고정시켜 식히는 방식이다.
초창기 잘만 쿨러는 당시 경쟁사 제품들의 외형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경쟁사 제품들은 히트싱크을 CPU 기준 수평 방향으로 쌓아 올리거나 수직 방향으로 배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히트싱크를 식혀주는 쿨링팬의 크기가 딱 히트 싱크의 면적, 혹은 메인보드의 CPU 조립부 크기와 대동소이했다. 쿨링팬이 커봐야 최대 80mm 정도 수준이었다는 말이다. 더불어 케이스 측면 길이에 따라 물리적으로 가용한 쿨링팬 크기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전설의 쿨러 CNPS7000 시리즈의 탄생이 예견되었다는 사람도 많다.
메가히트의 비결, 통구리와 정숙함
CNPS7000 시리즈의 기본적인 모양은 소위 꽃으로 표현된다. 사각형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원형으로 히트싱크가 사방으로 퍼지는 구조다. 하여 메모리나 전원부 간섭을 받아 설치가 불가능한 메인보드도 많아 당시 메인보드를 구매하려던 소비자들은 잘만 쿨러를 달 수 있냐고 먼저 문의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점은 중앙에서 돌리는 쿨링팬의 크기가 92mm까지 커지는 순기능이 있었다. 구경이 작은 쿨링팬은 식혀야 하는 히트싱크의 온도가 높을수록 회전수가 더 빨라서 그에 따른 소음이 상당히 커지곤 했다. 하지만, 잘만 CNPS7000 시리즈는 기본으로 120mm 쿨링팬이 장착되어 작은 쿨링팬보다 적은 회전수로도 충분히 히트싱크를 식힐 수 있었다.
히트싱크가 통 구리라는 것도 쿨링에 상당한 효과를 주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열전도율이 좋은 구리는 원자재부터 가격이 상딩히 비싸고 무겁다. 순 구리로 제작된 CNPS 7000-cu의 경우 무게가 773그램에 이른다. 하여 메인보드에 무리가 갈 수 있고 가격도 비싸 알루미늄 재질인 CNPS 7000-Al 버전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알루미늄과 구리를 결합하여 절충된 제품 CNPS 7000Alcu까지 탄생하게 되었다.
이렇듯 여러 방면에서 각광을 받았지만, 2년간은 그냥 PC 마니아나 오버클러커들의 사치품으로 여겨졌던 CNPS 7000은 2004년 프레스캇이 몰고 온 대발열의 시대를 맞이해 전세계 PC 유저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뛰어난 열전도율에 조용히 돌아가지만 묵묵히 온도를 계속 떨어뜨려주기 때문에 경쟁사 제품을 사용하다가 비행기 이륙하는 소리를 듣던 소비자들에게 엄청난 매력을 선사했다.
CPU를 넘어 그래픽카드까지, PC 시장이 좁다~
2004년 잘만은 이 CNPS 7000 시리즈로만 160억 원이라는 높은 매출을 기록했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전세계 44개국에 수출까지 할 정도로 호황을 맞았다. 그 후 CPU 쿨러에 만족하지 않고 비슷한 디자인 콘셉트와 쿨링 솔루션으로 그래픽 카드 시장까지 영역을 넓혀 VF700, VF702까지 출시했다.
VF700은 쿨링이 잘 되는 그래픽 카드의 상징으로 군림하여 당시 유니텍, 렉스텍을 비롯한 많은 국내 그래픽카드 수입사들이 원래 달려있던 쿨러를 떼고 VF700으로 교체한 다음 다시 제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후속작인 VF900은 CNPS 7000의 완벽한 원형을 그대로 구현해 인기 있는 그래픽카드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이처럼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잘만 CNPS 7000 시리즈는 그 후 원통형 쿨링 솔루션인 CNPS 9000 시리즈로 이어졌다. 물론 CNPS 9000 에 이르러서야 무게가 너무 무거워지고 덩치도 커져서 설치에 제약이 많아 CNPS 7000만큼의 인기를 끌진 못했지만, 잘만 쿨러의 명맥을 이어가기엔 충분했다.
▲ AM4 소켓에 CNPS 7000 Alcu를 장착해보는 영상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잇다른 경쟁사들의 분발과 CPU 제조공정의 세밀화로 대발열의 시대가 종식되며 잘만 쿨러의 전성기는 서서히 막을 내렸다. 또한, 얼마 전엔 불미스러운 일까지 겹쳐 전성기 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걷고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을 달구었던 대발열의 시대가 찾아낸 전설의 쿨러는 누가 뭐라 해도 CNPS7000이다. 최근에도 그 명성을 잊지 못해 최신 소켓에 반강제로 장착하려는 시도도 종종 보인다. 그만큼 유저들은 CNPS 7000의 성능을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덩치가 매우 켜서 120mm 쿨링팬까지 다는 요즘 CPU 쿨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아련하고도 믿음직한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시 CNPS 7000같은 히트상품이 또 나왔으면 좋겠다. Made in KOREA면 더 좋고!
기획, 편집, 글 / 다나와 정도일 doil@cowav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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