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팹사이씬]은 반도체 생산공장(팹)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과 문화, 조직, 보상, 노동환경 등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연재입니다. 기술 중심 보도에서 벗어나 현장의 '사람'과 '장면(scene)'에 집중해 반도체 산업의 모습을 더욱 입체적으로 전합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본격화되면서 국내 반도체 생태계에 전례 없는 ‘인재 블랙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높은 연봉을 앞세워 한국 핵심 인재를 흡수하려 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인력이탈 적색등이 켜졌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한국 반도체 인재 영입을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그는 지난 16일(현지시간) 소셜미디어 엑스(X)에 테슬라 한국 판매 법인인 테슬라코리아의 AI 칩 엔지니어 채용 공고를 공유하며 “한국에서 반도체 설계·제조·소프트웨어(SW) 분야에 종사하고 싶다면 테슬라에 합류하라”는 글을 덧붙였다. 태극기 이모티콘 16개도 함께 게시하며 우리나라 반도체 인력을 원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머스크 CEO가 테슬라 채용 관련 글을 SNS에 공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다만 한국이라는 특정 지역에서, 반도체라는 특정 분야에 한해 인재 채용에 공개적으로 나선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자율주행은 물론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에 탑재할 AI 칩 개발 가속화를 위해 국내 인재를 직접 겨냥한 것이다.
테슬라뿐만 아니라 엔비디아와 구글, 브로드컴 등도 한국 인재를 탐낸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은 고액 연봉과 막대한 주식 보상 등을 무기로 국내 반도체 엔지니어를 유혹하는 모양새다.
고연봉·자녀교육에 미국 향하는 韓 엔지니어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우리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 적극적인 ‘블랙홀 전략’에 나서자 일부 엔지니어들은 강한 유혹에 이끌려 미국 실리콘밸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 임직원은 “링크드인을 통해 동료들 사이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이직 제안을 받은 이들이 꽤 많다”며 “올해초 성과급을 받은 직후 몇몇 인원은 면접까지 보고 합격해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링크드인은 X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와 달리 특정 업계에서 구인구직이나 동종 업계 정보 팔로잉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서비스다. 2023년 기준 9억5000만명이 회원으로 등록돼있다. 가입자는 재직회사나 경력, 특이사항 등으로 ‘온라인 이력서’를 만들어놓으면 관련 회사나 기업 인사 담당자가 연락을 취한다. 국내에서 해외 기업으로 이직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플랫폼으로 유명하다.
SK하이닉스뿐만 아니라 삼성전자에서도 해외로 인력이 유출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삼성전자 임직원은 “HBM(고대역폭메모리)을 중심으로 한동안 반도체 업황이 좋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적자로 어려움을 겪은 만큼 안심하기는 이른 상황”이라며 “일부 직원들 사이에선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한다며 이직을 결심한 이들이 적지 않다. 또 자녀 교육을 위해 미국행을 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인력유출 막을 방법은 처우 및 환경 개선
인력유출이 현실화되자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는 인력 지키기에 혈안인 모습이다. 국내에서도 많은 인센티브로 성과를 충분히 보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내세우는 급여 혜택에는 미치지 못해서다. 이로 인해 집토끼를 지키기 위해 추가적인 처우 개선에 나서는 등 대응책 마련에 집중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성과를 낸 임직원을 대상으로 보상을 강화하고 연구 환경을 크게 개선해 인력을 붙잡겠다는 목표다. SK하이닉스는 성과급 상한제를 폐지하는 등 보상체계를 손질하고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보상 확대에 더해 연구 환경도 크게 개선해 엔지니어가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 계획”이라며 “정년퇴임 후에도 근무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를 마련해 인재 유출을 막을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정년 이후에도 근무할 수 있는 ‘시니어트랙’을 운영 중이다. 역량과 전문성을 인정받은 임직원의 경우 정년 이후 계속 일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 및 소프트웨어 전문가 등 우수 자격 보유자가 대상이다.
SK하이닉스도 오랜 시간 기술 역량을 쌓은 엔지니어가 정년 없이 일할 수 있도록 ‘HE(Honored Engineer)’ 및 ‘DE(Distinguished Engineer)’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숙련 인재가 해외로 떠나 기술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중국 유턴 사례에 빅테크行 주저
글로벌 빅테크 기업으로 이직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 임직원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다. 고액연봉에 혹해 비행기를 타는 이들도 있지만, 주저하는 이들도 많다. 현지 기업이 핵심 기술을 확보한 후 재계약을 하지 않는 사례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대표적이다. 과거 중국 디스플레이 기업은 국내 업체보다 3~5배 많은 연봉을 제시하며 디스플레이 분야 연구원을 대거 채용했다. 하지만 기술을 어느 정도 확보한 후 재계약을 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한국으로 ‘유턴’한 이들이 적지 않다. 기술만 빼앗기고 토사구팽된 셈이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도 중국처럼 기술을 탈취한 후 임직원은 내팽개칠 수 있다. 또 우리나라보다 인력 구조조정을 수시로 실시하는 미국 기업 특성상 고용불안에 시달려야 한다는 우려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이직은 개인 선택이지만 동료 한두명이 미국으로 떠나면 해당 조직에 업무공백은 물론 분위기가 분위기가 저하돼 노동성이 떨어지게 된다”며 “기업은 물론 협회나 정부 차원에서 인력 유출이 심화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언급했다.
유호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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