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Y300' 원래라면 '2세대 렉스턴'으로 출시되어야 했을 이 프로젝트가 모기업 상하이차의 기술 먹튀 논란, 쌍용차 사태 등으로 회사가 또다시 휘청이면서 끝내 중단되며 렉스턴의 미래가 불투명해졌습니다. 이 모델과 함께 데뷔해야 했을 국산 최초의 직열 6기통 디젤 엔진도 아쉽게 폐기됐어요.
중국이 가고 이번에는 인도가 왔습니다. 2010년 말, 이번에는 인도의 자동차 기업 '마힌드라&마힌드라'에 인수된 건데요. 다행히 투자가 이루어졌지만, 인도에서도 SUV를 전문으로 하는 마힌드라 브랜드 특성상 이왕이면 현지에서 먹힐 만한 제품을 만드는 것을 원했고, 결국 두 회사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소형 SUV 쪽에 무게가 실리면서 렉스턴은 우선순위에서 밀렸습니다. 이 선택과 집중의 결과로 기존 차량을 다시 한번 부분 변경하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됐어요.
그렇게 세대교체가 되고도 남았을 2012년, 또 한 번의 페이스리프트로 생명 연장의 꿈을 이룬 '렉스턴 W'가 출시됐습니다. 플래그십 '체어맨 W'에 'World Class'를 연상시키는 서브네임 'W'를 붙여 다시금 고급 SUV로의 이미지 쇄신을 꾀했죠.
외관은 전작의 부드러운 곡선을 버리고 다시금 직선 위주의 날렵한 스타일링으로 회귀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불필요한 크롬 장식을 줄이고 더욱 깔끔하게 다듬은 앞뒤 범퍼와 그릴의 높이가 낮아져 전면부가 얄쌍해지면서 렉스턴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무게감과 중후함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좀 더 요즘 SUV다운 경쾌한 분위기였습니다.
오히려 이게 렉스턴 ll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디자인이 초창기 버전과 흡사한데요. 덕분에 신형 느낌이 크지 않다는 게 아쉬운 지점이었습니다. 2001년에 선보인 차체 실루엣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얼굴까지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니 앞뒤 램프에 포함된 LED 면발광마저 없었다면 연식을 가늠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실내는 좀 더 간결해졌습니다. 전체적인 레이아웃은 직전 슈퍼 렉스턴의 구성 그대로였지만, 우드그레인의 적용 범위를 넓히고 처마 아래 자리했던 디지털시계, 비상등 버튼을 매끈하게 다듬어 좀 더 깔끔한 분위기로 거듭났어요.
블루투스 오디오가 드디어 추가됐고 이후 10개 스피커의 인피니티 프리미엄 사운드 시스템과 7인치로 업그레이드된 내비게이션이 더해졌습니다. 그 외에 달라진 건 없네요. 스티어링 휠 디자인이 한 차례 변경됐고 3열 승객을 위한 별도의 에어컨과 송풍구가 삭제됐어요.
선택과 집중의 결과는 보닛 아래에서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배출가스 규제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벤츠 혈통 5기통 라인업이 전부 빠지면서 4기통 2.0L 디젤 엔진으로 통일, 전작의 고성능 이미지를 모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어요.
오히려 후륜구동 설계에 맞춰 디튠 되는 바람에 같은 엔진을 사용한 하위 모델 '코란도 C'보다 출력이 더 낮은 수치, 말 그대로 '수치'였습니다.
그래도 평가가 좋지 않았던 직전 2.0L 모델보다는 여러모로 성능이 개선됐습니다. 출력과 토크를 증강시켰고 문제가 많았던 직전 모델의 비트라 6단 변속기 대신 다시금 벤츠제 5단 자동 변속기를 맞물려 쾌적한 주행감을 확보했습니다.
또 한국형 LET 디젤 엔진을 표방하며 실용 구간 토크를 강화해 일상 주행에 최적화했다는 그들의 말처럼 낮은 배기량에도 불구 저 RPM에서부터 충분한 토크를 선사했기에 우려와는 달리 괜찮은 가속감을 제공했습니다. 단, 실용 구간을 넘어서는 고속 주행이나 4바퀴를 굴리는 상황에서는 낮은 배기량에서 오는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났지만요.
그 사이 중형 SUV 카이런이 단종되고 그 빈자리까지 대신하느라 아래 것들과 본격적으로 경쟁하게 됐습니다. 후륜구동 보디 온 프레임 방식은 비록 오래되긴 했지만, 높은 시트 포지션으로 탁 트인 시야, 전륜구동 모노코크 설계에 연약한 도심형 SUV들과 달리 통뼈에서 오는 넉넉한 견인 능력과 안정적인 오프로드 실력이 돋보였습니다. 파트타임 4륜구동까지 더해져 거친 길을 누빌 일이 많은 현장직 소비자나 캠핑, 낚시 등 레저를 즐기려는 소비자들에게 환영받았습니다.
다만 보디 온 프레임 방식의 단점 역시 고스란히 남아 있었죠. 무거운 프레임은 2톤이 넘는 몸무게를 선사했고 당연하게도 주행 성능과 승차감, 연비 면에서도 불리했어요. 평상시 패밀리카로 쓰기에도 멀미를 유발하는 뒷좌석 승차감은 분명한 약점이었습니다.
경쟁차들도 서서히 덩치를 키우면서 렉스턴 W의 입지가 점점 좁아져가는 상황, 쌍용 입장에서도 더 이상 험한 꼴을 보기 전에 은퇴를 시키는 것이 맞겠다고 판단해 2015년 내외관의 소소한 디테일을 개선한 마이너 체인지 모델을 선보인 데 이어 같은 해 하반기에는 새로운 파워트레인을 적용한 '뉴 파워 렉스턴 W'를 선보였습니다. 뉴 파워라는 이름이 붙은 데서 짐작되듯 'EURO 6' 배출가스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 엔진에서 배기량을 소폭 늘린 2.1L LET 디젤 엔진을 장착해 출력과 토크를 함께 끌어올렸고, 이에 더해 변속기를 벤츠 7단으로 업그레이드해 성능과 효율이 모두 좋아졌어요.
주간주행등을 품은 헤드램프와 '뉴 체어맨 W'를 닮은 세로형 라디에이터 그릴로 인상이 더욱 또렷해졌고, 3단계로 조절할 수 있는 앞좌석 통풍시트, 세이프티 전방 카메라와 스마트폰 미러링 기능을 지원하는 등 편의성을 높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십 수년 전 렉스턴과 별반 다르지 않은 센터패시아 디자인 하나만으로도 소비자들의 발걸음을 돌리게 만들기엔 충분했어요. 이제 막 탁송 차로부터 전달받은 차에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느낌을 받을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무엇보다 패밀리 SUV를 지향하면서도 사이드 및 커튼 에어백은 물론 무릎 에어백까지 달려 나오는 시기에 딸랑 앞좌석 듀얼 에어백, 사이드 에어백만 갖춘 것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죠.
사실 버틴 게 용했습니다. '코드네임 Y200'에서 시작해 'Y295'까지 어수선한 회사 분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렉스턴은 도합 16년 동안 판매를 이어온 끝에 가성비 SUV로 전락, 전작 무쏘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습니다. 노는 물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렉스턴은 렉스턴이죠. 렉스턴 W는 합리적인 가격을 무기로 제법 준수한 판매량을 기록했습니다.
상하이차 덕분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은 중국 시장의 성과는 줄었지만, 대신 마힌드라 덕분에 인도 시장의 판로가 개척되면서 손실을 만회했고 내수 물량만큼의 수출 실적도 꾸준히 챙겼어요.
이외에도 가성비 좋은 중고차로 쏠쏠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아웃도어 인구들은 해가 갈수록 늘어났는데 웬만한 험로는 거뜬히 주파할 수 있는 4륜구동과 보디 온 프레임을 모두 만족시키는 차는 귀해졌거든요. 여타 국산차 대비 비싼 정비비는 걸림돌이지만, 지금도 일부 매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특히 2.1L 엔진과 벤츠 7단 변속기가 맞물린 최후기형 렉스턴은 좋은 상품성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판매량 자체가 적어 상태 좋은 매물이 등장하면 삽시간에 사라진다고 하네요.
여담으로 울릉도나 지리산 등 일부 도서 및 산간지역에서는 택시로 쓰이기도 했고, 엔진 보링 없이 100만 km를 주행한 무쏘의 피를 이어받아 한국도로공사의 고속도로 순찰 차량, 업무용 차량으로 납품되는 등 뛰어난 내구성을 인정받기도 했어요.
이에 더해 이 모델 역시 군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쌍용차의 오랜 단골인 국군에 납품되어 공군 통신 차량 및 장성급 지휘 차량으로 쓰이면서 얼떨결에 군 생활 중 이 차를 경험해 본 분들도 꽤 있죠. 가솔린 엔진이 탑재된 일부 수출 사양이 주한미군 차량으로 공급되기도 했고요.
빈약한 제품 라인업을 채우기 위해 전작을 격하시키는 쌍용차의 전략이 참 아쉬울 따름인데요. 어찌 보면 자존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단 체어맨마저 격하시킨 바 있는데 뉴 체어맨은 그래도 체어맨 W라는 후속이라도 있었지만 렉스턴은 그것도 아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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