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기반 수목 유통 플랫폼 루트릭스

신축 아파트는 건물 외관이나 평면 설계 만큼이나 ‘조경’이 중요하다. 아파드 단지 내 녹지 공간은 주거 품격을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서울 강남의 한 신축 아파트 단지는 조경 시공비에만 400억원을 투입했는데, 그중 나무 구매비만 100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경 산업의 뒷단은 여전히 펜과 종이, 그리고 인맥에 의존하는 아날로그 방식에 머물러 있다. 전국에 흩어진 1만여 개의 나무 농장 중 누가 어떤 나무를 얼마에 팔고 있는지 통합된 데이터도 없다.
스타트업 ‘루트릭스’(ROOTRIX)는 데이터 기반 조경 수목 유통 플랫폼을 개발했다. 루트릭스의 안정록(34) 대표를 만나 창업기를 들었다.
◇전국 700개 농장 데이터를 한눈에, 조경 수목 유통의 ‘컨시어지’

루트릭스는 나무가 필요한 건설사, 시공사, 개인과 나무 공급자를 연결하는 유통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전국 700개 이상의 농장 데이터를 수집해 수종, 규격, 수형, 가격 등의 정보를 정량화하고 디지털화했다. 단순한 중개를 넘어 구매자가 필요로 하는 나무 리스트를 바탕으로 견적부터 구매, 복잡한 유통 프로세스까지 전담하는 컨시어지 방식으로 서비스를 운영하는 것이 핵심이다.
서비스 범위는 작은 묘목부터 수억원대에 달하는 명품 소나무까지 폭넓게 아우른다. 이전까지는 시공사 현장 담당자가 조경 시공에 필요한 수십가지의 나무를 확보하기 위해 수십명의 중개업자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리고 직접 농장을 찾아가 나무를 확인해야 했다. 루트릭스를 이용하면 48시간 이내에 정확한 재고와 가격이 반영된 견적을 받을 수 있다. 발주 시 전문가를 동원해 배송까지 해준다.
◇DMZ에서 자란 소년, 하버드를 거쳐 선택한 길

안정록 대표는 파주 북한 접경지역 시골 마을 출신이다. 산과 논밭을 마당 삼아 자연스럽게 자연과 호흡하며 자랐다. 닭이 뛰어다니는 마당과 목장이 그의 놀이터였다. 초등학생 때 뉴질랜드 기숙 학교에서 2년의 시간을 보내며 자연과 더욱 가까워졌다.
그에게 자연은 휴식 공간을 넘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관찰하고 보호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과외 활동으로 DMZ 생태 탐사를 했습니다. 매달이나 매주 한 번 연구 활동을 했어요. 여름엔 식생과 곤충을 조사하고 겨울엔 월동하는 조류를 관찰했죠. 꾸준히 활동한 덕에 환경올림피아드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땐 UN에서 주최하는 세계기후변화포럼에 한국 청소년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당시 다른 나라의 참가자들은 환경 활동의 계기로 각종 환경 위기를 꼽았는데요. 저는 자연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때 정립한 생각은 제 삶을 관통하는 철학이 됐죠.”
환경 보호라는 ‘당위’를 앞세우기 전에, 멋지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보여줘서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에 진학했다. “자연의 다각적인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환경생태공학은 연구와 이론 중심의 학문이더군요. 전공 공부에 아쉬움을 느끼던 찰나에, 2학년 때 수강했던 ‘환경조경학’ 수업이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제가 꿈꿨던 학문이었어요.”

세계 조경학의 시초인 하버드 건축대학원에 진학해 조경설계 석사 과정을 밟았다.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탄탄대로를 걷던 그가 설계 도면 대신 사업계획서를 쓰게 된 것은 조경 현장의 비합리적인 현실을 목도하면서부터다. “설계자가 아무리 훌륭한 도면을 그려도, 시공 단계에서 나무를 구할 수 없거나 가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설계가 무분별하게 변경되는 일이 잦았습니다. 설계만으로는 세상에 큰 임팩트를 줄 수 없단 걸 깨달았습니다. 이때부터 창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대학원 수료 후 지리정보시스템 기업의 엔지니어로 취직했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조경산업의 고질적인 문제를 포착했다. “이 산업은 정보 비대칭이 심합니다. 구매자인 시공사와 건설사는 전국에 흩어진 나무들의 위치와 가격을 알 수 없어 오로지 네트워크나 중개업자에 의존해왔어요. 이로 인해 품질 낮은 나무를 비싸게 사거나 나무를 찾기 위해 과도한 리소스를 낭비하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했죠.”
나무 공급자인 농장주들 역시 고통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농장의 90% 이상이 60~70대 어르신입니다. 사실 이분들 중 나무 키우기를 본업으로 하는 사람보다 빈 땅에 나무를 키우는 분들의 비중이 큰데요. 마땅한 인맥이 없다 보니 나무를 수년간 키워놓고도 판로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적절한 가격 기준이 없는 깜깜이 시장에서 생산자는 제값을 받지 못하고, 구매자는 신뢰할 수 없는 가격에 직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국을 누빈 4년간의 발품

2021년, 한 스타트업 경연 대회 본선 진출을 계기로 루트릭스 법인을 설립했다. “후배와 창업 경진 대회에 참가했어요. IR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사업계획서를 처음 써서 제출했어요. 나무 농장의 3D스캐닝 데이터를 기반으로 나무를 유통하는 아이디어였는데요. 예선에 이어 본선까지 진출했습니다. 수상은 못했지만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높게 본 투자자들이 투자 의사를 보였습니다. 용기를 얻었죠.”
투자자들이 루트릭스의 아이디어를 눈여겨 본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나라의 조경 시장 규모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연간 나무 거래액 규모만 4조원에 달하죠. 나무농장은 1만 곳, 조경 시공업체는 7000곳 정도 있고요. 하지만 규모에 비해 허술한 점이 많은 시장이기도 합니다. 조경산업을 전담하는 정부 부처도 없고, 거래 당사자간의 표준 계약서도 없어요. 주먹구구로 흘러가는 이 시장을 통합한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플랫폼을 위해 데이터를 쌓는 과정은 결코 화려한 기술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창업 초기, 조경 분야 인맥을 총동원해서 각 지역에서 나무를 잘 아는 분들을 다 만나고 다녔습니다. 맨땅에 헤딩도 했어요. 위성 지도를 보고 나무 농장으로 추정되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죠. 농장 주인이 없으면 나무에 명함을 매달아 놓고 오거나 테이프로 연락처를 붙여두는 식으로 무모할 만큼 정직하게 데이터를 모았습니다.”
발로 뛰며 확보한 현장의 데이터는 루트릭스의 가장 강력한 자산이 됐다. “라이다(LiDAR) 카메라를 활용한 스캐닝 기술을 통해 나무 수량뿐만 아니라 수형까지 정밀하게 데이터화 합니다. 지금까지 전국 700곳 이상의 나무 농장 데이터를 수집했죠. 이를 기반으로 시공사, 건설사 등에 견적을 빠르게 내주고, 전문가 집단을 활용해 유통합니다. 나무가 현장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소통까지 대행하죠.”

루트릭스는 스타트업 특유의 기민함으로 기존 산업의 이해관계자들을 빠르게 흡수했다. “이전까지 조경 산업은 정보 비대칭이 심각했습니다. 대기업 시공사조차 수목 가격을 확신하지 못할 정도였는데요. 저희가 구축한 플랫폼은 가격과 품질에 대한 신뢰의 기반이 됩니다. 또한, 복잡하고 전문적인 유통 과정을 전담해 나무를 구할 때 수반되는 모든 단계의 불편함을 최소화했죠. 현재도 전국 각지의 나무 농장을 열심히 확보하고 있습니다. 입정 농장이 늘어날수록, 구매자에게 보다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고 가격 경쟁력도 좋아질 겁니다.“
◇ AI 다음은 나무의 시대

스타트업 불모지인 조경 산업을 바꾸겠다는 패기는 달콤한 결실로 돌아왔다. 퓨처플레이, 소풍벤처스로부터 시드투자를 받고 출발해 2024년 엑스플로인베스트먼트, 스마일게이트 인베스트먼트, 스프링캠프 등 투자사에서 프리A 시리즈 투자를 유치했다. 2025년에는 스마일게이트 인베스트먼트, CJ인베스트먼트, IBK기업은행,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 등으로부터 시리즈A 투자를 유치했다. 같은 해 디캠프의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 배치 5기 기업으로 선정됐다.
루트릭스는 국내 상위 15개 조경 시공사 중 8곳을 고객사로 확보하며 시장에 안착했다. 납품 포트폴리오도 탄탄하다. 강남의 고급 아파트인 반포 메이플자이 아파트에 조경용 수목을 납품했으며, 래미안 원베일리 아파트 펜트하우스 세대의 조경 설계와 시공을 진행하기도 했다. 여주 헤슬리 나인브릿지 골프장에도 명품 소나무를 납품했다. 연 매출은 2024년 33억원, 2025년 47억원을 기록했다.

단순한 나무 유통 플랫폼을 넘어 시스템화된 조경 생태계를 꿈꾼다. “지금까지는 굵직한 시공사에 집중했는데요. 올해는 중소 조경 시공사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이 분들은 덩치가 작은 만큼 네트워크와 일손이 부족합니다. 그만큼 저희의 기술과 데이터가 유용하게 활용될 것 같아요. 이들이 나무를 더 쉽고 편리하게 구할 수 있도록 당분간 시스템 고도화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안 대표는 온 세상이 인공지능(AI)을 외치는 지금이야 말로 나무에 주목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조경산업의 발전은 국내총생산(GDP)의 성장과 궤를 함께 합니다. 나라가 발전할수록 대중의 눈높이가 함께 올라가니까요. AI 도입은 그 현상을 가속할 겁니다. AI와 로보틱스, 그 다음은 어디일까요. 저는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두 기술이 상용화되면 인간은 노동의 압박에서 벗어나 삶을 즐기기 시작할 텐데요. 그 중심에 공원과 레저, 즉 자연이 있거든요. 결국 기술의 끝에서 인간이 마주할 진정한 가치는 자연이 주는 감동이 아닐까요.”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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