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여권·돈 다 못챙기고 급박 탈출.."승무원들 목 다 쉬어"

정세진 기자 2022. 10. 25.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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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당시 KE631편 타고 있던 승객 인터뷰
지난 23일(현지시간) 필리핀 세부 막탄공항에서 악천후 속 착륙 후 활주로를 이탈(오버런·overrun)하는 사고가 발생한 대한항공 여객기가 동체가 파손된 채 멈춰서 있다. /사진=뉴스1

"세부 공항입니다. 승객 여러분 세부 공항에 비상 착륙하겠습니다. 승무원 안내에 따라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23일(한국시각) 대한항공 여객기 KE631편이 필리핀 세부 막탄 공항을 향해 오후 7시20분쯤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이날 오후 11시 도착 예정이었지만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려 2차례 착륙에 실패했고 비행기는 1시간째 세부 공항 인근 상공에 떠 있었다. 기장은 이날 자정쯤 기내 방송으로 비상 착륙을 시도하겠다고 알렸다.

"머리 숙여, 자세 낮춰."

비행 내내 친절함을 유지하던 승무원들은 비행기가 활주로에 닿기 약 10초 전부터 갑자기 소리치기 시작했다. 각자 지정된 위치에서 머리를 숙이고 자세를 낮출 것을 한국어와 영어로 알렸다. 스킨스쿠버 강사로 활동하며 세부와 한국을 오가는 장석현씨(45)는 당시 KE631편 앞쪽에 타고 있었다.

장 씨는 25일 머니투데이와 한 전화통화에서 "비상 착륙 직전 승무원들이 모여 비상착륙과 관련한 지침을 공유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들었다"며 "비상착륙 후 비행기를 나왔을 때 승무원들의 목이 쉬어 있었다"고 말했다.

비상착륙이라는 말에 승객들은 긴장했지만 비행기는 활주로와 닿는 충격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공항에 들어섰다. 승객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하지만 KE631편은 속도를 늦추지 못한 탓에 곧 활주로를 벗어났다.

포장된 활주로를 벗어나자 기체는 심하게 흔들리며 '쿵쿵' 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승객들의 박수와 환호 소리가 곧 비명과 기도 소리로 바뀌면서 한순간에 기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와중에도 승무원들은 비행기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머리를 숙이고 자세를 낮추라고 외쳤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춘 후에도 승무원들은 기내를 돌아다니며 좌석에 앉아 있으라고 소리쳤고 기체 상태를 점검했다.

승무원들은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고 큰 부상자가 없음을 확인한 후 미끄럼틀을 펼쳐 승객 하차를 도왔다. 활주로에는 세부 현지 소방과 경찰 당국이 출동하며 사이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국시간 지난 24일 0시 7분, 인천을 출발한 대한항공 여객기 KE631편이 필리핀 세부 막타 공항에 비상착륙한 직후 촬영한 영상. /영상=독자제공

장씨는 "나와서 비행기 상태를 보고 정말 많이 놀랐다"며 "그 정도로 심한 줄 상상도 못 했다. 불과 몇백미터 앞에 민가가 있었다"고 했다. 그가 사고 직후 촬영한 영상에는 현지 안전 관리 직원인듯한 남성이 필리핀 억양의 영어로 '기다려' '첫번째 이륙' 등을 언급하는 음성이 담겼다.

급박한 탈출 순간 최소한의 짐만을 챙기라는 안내에 따라 대다수 승객이 여권과 휴대전화 정도만을 몸에 지닌 채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현지 당국은 안전을 이유로 탑승객이 KE631편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162명 승객 중 20여명은 여권조차 챙기지 못했다.

장씨는 급박한 순간까지 승객들을 챙긴 승무원들과 달리 대한항공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장씨는 24일 0시쯤(한국시각) 발생한 사고 직후부터 같은 날 오후 1시까지 약 13시간 동안 대한항공 측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여권을 챙긴 승객들은 각자 입국 수속을 마치고 알아서 숙소를 찾아가야 했다. 이들 대다수가 급박하게 탈출한 탓에 현금·카드 등도 없었다.

장씨는 "세부 공항에는 한국어가 가능한 직원이 없었고 현지에 탑승객을 지원하는 대한항공 직원도 없었다"고 했다.

장씨는 "현지 입국 수속을 마친 사고기 탑승객들을 대상으로 공항 직원으로 보이는 필리핀인이 영어로 이름, 전화번호, 투숙 호텔 등 정보를 적고 있었다"며 "영어가 자유로운 외국인은 문제가 없었지만 대다수 한국인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해당 직원은 가슴에 명찰을 달고 있었지만 탑승객 입장에선 명찰만으로 해당 직원의 소속과 직함 등을 알 수 없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173명이 탑승한 대한항공 여객기(KE631)가 필리핀 세부 막탄공항에서 악천후로 착륙 후 활주로를 이탈하는 사고가 발생한 모습이 보인다./사진=뉴스1

장씨는 "20여명의 한국인 패캐지 여행객들이 영어를 못해서 공항 밖에 기다리는 현지 가이드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며 "내가 통역을 도와줘 한국인 관광객들이 현지 가이드를 찾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장씨는 "사고 발생 후 공항에서 오전 1시쯤 한국의 대한항공 콜센터에 전화했지만 영업시간이 끝났다는 안내멘트만 들렸다"며 "다음날 오전 9시에 지인이 사고기 탑승객이 공항 근처 호텔 3곳에 흩어져 묵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실 확인차 한국에 있는 대한항공 콜센터 전화하자 사고대응센터로 안내해줬다"고 했다.

장씨에 따르면 사고기 탑승객이 묵을 수 있는 세부 근처 호텔 등에 대해 안내받은 건 다시 4시간이 흐른 뒤인 이날 오후 1시쯤이었다. 이마저도 장씨가 현지 체류 중인 지인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 확인 차원에서 직접 대한항공에 전화한 후에 들은 답변이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173명이 탑승한 대한항공 여객기(KE631)가 필리핀 세부 막탄공항에서 악천후로 착륙 후 활주로를 이탈하는 사고가 발생한 모습이 보인다./사진=뉴스1

승객들은 사고가 발생한 지 24시간이 지나서야 현지에 도착한 우리 정부 관계자와 대한항공 측 직원들 도움으로 비행기에 놓고 내린 짐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전까지 사고기 탑승객들이 투숙한 현지 호텔에서 승객 지원 업무는 승무원들이 담당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승객들 안내가 최우선이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한정된 인력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상황 중에 승객들에게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하다"며 "세부공항 재개 시점이 수차례 연기되면서 대책반 현지 도착 스케줄이 지연됨에 따라 선제적인 안내를 드리지 못했으며, 많은 부분 현지 조업사와 객실 승무원들을 통해 안내 및 지원에 의존하게 됐다"고 했다.

이어 "현재 마닐라지점 파견인력, 본사지원인력 44명이 현지에서 승객들 불편 최소화를 위해 노력 중"이라며 "불편이 없도록 안내할 예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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