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관계증명서도 줬는데…아이 통장 만들기 산 넘어 산

김은정 기자 2023. 2. 1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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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최모(44)씨는 얼마 전 10살 된 딸 이름으로 예금 통장을 만들어주려고 은행 지점에 갔다가 헛걸음을 했다. 온라인으로는 아예 개설이 안 된다고 해서 방문했는데 “제출해야 할 서류가 모자란다”고 했다. 가족관계증명서 정도면 부모와 자식 사이가 증명될 것 같았는데 딸 기준으로 발급받은 기본증명서와 가족관계증명서, 그리고 딸 명의의 도장, 부모 신분증까지 필요하다고 했다. 최씨는 다음 날 주민센터에서 서류를 떼서 통장을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몇 억짜리 주택담보대출도 모바일로 몇 분 만에 끝나는 시대인데 아이들 통장 개설은 부모가 도와줘도 온라인으로는 불가능하다. 왜 이 모양이냐”고 했다.

부모가 미성년 자녀 명의의 계좌를 대신 만들려면 은행 창구를 방문해야만 한다. 민법상 미성년자는 법정 대리인인 부모 동의를 받아야 통장 개설 등 법률 행위를 할 수 있는데 1993년 금융실명제 이후 금융위원회가 ‘대면’ 방식의 동의만 유효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온라인 비대면 금융이 확대되는 추세에 맞지 않는 낡은 규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자녀 통장 만들기가 첩첩산중”

지난달 설 연휴 직후 상당수의 인터넷 맘카페에는 자녀 명의 통장을 만들려다 혼쭐이 났다는 후기들이 꼬리를 물었다. “세뱃돈을 아이 이름으로 된 통장에 넣어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고 했다.

부모가 미성년 자녀 명의의 통장을 대신 만들어주려면 자녀 기준의 기본증명서와 가족관계증명서, 부모의 신분증과 자녀 명의 도장을 가져가야 하는데 같은 은행에서도 지점마다 요구하는 양식이 다를 정도다.

‘대면’ 방식의 부모 동의를 원칙으로 하는 금융위 유권해석에 묶여 케이뱅크, 카카오뱅크, 토스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들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처지다. 오는 4월부터 적금 만기 규정이 완화돼 1개월 이상의 초단기 적금을 출시할 수 있게 됐지만, 지점이 없는 인터넷뱅크들은 자녀 명의로 부모가 대신 만들어주는 ‘탄생 기념 100일 적금’을 내놓을 수 없다. 인터넷뱅크 관계자는 “초단기 적금 출시는 인터넷은행들이 앞장서서 요구했던 사안인데, 정작 규정이 완화되고 나니 ‘대면 동의’ 관행에 발목이 잡혀 상품 출시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했다.

◇미성년자 비대면 통장 개설 험난

미성년 자녀가 직접 비대면으로 통장을 만드는 것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만 14세 미만의 미성년자는 혼자서는 통장을 만들 수 없고, 만 14세 이상인 경우에도 일부 은행에서만 비대면 계좌 개설이 가능하다. 주요 은행 중 신한·KB국민·하나은행에서는 가능하지만, 우리·NH농협·인터넷전문은행에서는 불가능하다.

일부 은행이 비대면 개설을 허용하고는 있지만 문턱이 높다. 미성년자 본인 명의의 여권과 휴대전화를 요구하는데 이 같은 요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미성년자가 많지 않다. 초등학교 고학년 스마트폰 보유율이 90%에 달하고, 초중학생 대상 경제 교육이 확대되고 있는데도 비대면 계좌 개설 문턱을 이렇게 높여 놓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당국 “통장 개설 규제 완화하겠다”

금융 당국은 뒤늦게 규제 완화에 나설 움직임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국민들 불편이 크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며 “법정 대리인의 비대면 계좌 개설 규제 완화를 위한 막바지 조율 중”이라고 했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인터넷뱅크 측과 만나 의견 청취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 당국은 법정 대리인이 자녀 또는 후견하는 미성년자의 명의로 계좌를 비대면으로 쉽게 개설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 탈세나 대포 통장 등으로 범죄에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이었다.

한 은행 관계자는 “비대면 계좌 개설 문턱을 낮춰서 아이들이 일찍부터 통장을 쉽게 만들 수 있게 하면 경제 관념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미성년 자녀 명의 계좌는 입·출금 한도를 제한하는 방식 등으로 범죄 악용 가능성을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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