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바다 빼앗긴 고성 어민들…저임금·민족차별에 맞서다 [광복 81주년, 경남의 숨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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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15 광복 81주년을 맞습니다.
경남도가 당시 판결문과 신문기사, 경찰기록 등을 확인하면서 지역사에 묻혀 있던 고성 어민항쟁 실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당시 기록을 바탕으로 고성 어민항쟁 배경과 전개, 역사적 의미를 살펴봤다.
또 "1910년대 민중의 저항은 자료 부족으로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며 "판결문과 경찰기록 등 당대 자료가 확인된 만큼 고성 어민항쟁도 독립운동사 한 영역으로 연구와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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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식민지 바다 달군 고성 어민항쟁
3·1운동보다 7개월 앞선 1918년 무단통치기
일본인 어업자 어장 장악에 생존 벼랑 내몰려
임금 인상 요구·동맹파업 헌병 개입 속 집단 충돌
“숨은 민중 독립운동…역사적 재조명 필요”

1918년 8월. 3.1운동이 일어나기 반년 전이다. 일제 무단통치가 한창이던 시기다. 집회와 결사, 노동운동은 철저히 억압받았다. 일본인들은 어장과 어업권을 장악했고, 한국 어민들에게는 저임금과 차별을 강요했다. 목소리조차 내기 어려운 시대, 삶의 터전을 빼앗긴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 어민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임금 인상을 요구했고 수백 명이 동맹파업에 나섰다. 일본인 헌병의 무력에도 굴하지 않았고 결국 집단 충돌로 이어졌다. 경남도가 당시 판결문과 신문기사, 경찰기록 등을 확인하면서 지역사에 묻혀 있던 고성 어민항쟁 실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당시 기록을 바탕으로 고성 어민항쟁 배경과 전개, 역사적 의미를 살펴봤다.
한국 어업 집어삼킨 일제
일제의 수산업 침탈은 한반도 강점 이전 시작됐다. 일본은 1883년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을 통해 한반도 연안에서 어업권을 장악한 데 이어 1889년 '조선일본양국통어장정'을 체결하며 조업 범위를 더욱 확대했다.
이후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을 거치며 한반도 지배력이 커지자 한반도 전 해역에서 사실상 자유롭게 조업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일본 자본과 제도는 한국 어업을 본격적으로 잠식하기 시작했다. 1908년 10월 일제 통감부가 주도해 '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하고, 같은 해 11월 '한국어업법'을 공포했다. 두 제도는 1909년 4월 1일 시행됐다. 이를 통해 한국 어업은 면허·허가제로 전환됐다.
일제는 1911년 6월 '조선어업령'을 공포해 수산업 수탈을 더욱 제도화했다. 기존 한국인 어업권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 면허를 받도록 했다. 한국인 소유 유망한 어장과 황실 소유 어장을 약탈해 일본인에게 재분배하려는 의도였다.
저인망어업 등 근대적 기계어업은 일본인에게만 허용했다. 한국인에게는 조어업만 허가해 영세어민으로 전락하게 했다. 한국 어민들은 어장과 생계 기반을 잃으며 일본인 어업자들에게 종속됐다. 바다는 더 이상 한국 어민들의 자유로운 삶의 터전이 아닌 식민 통치 관리 대상이 됐다.
이후 일제는 '어업조합규칙'을 만들어 어업조합을 설치했다. 조합 실권을 장악한 일본인 어민 약 3만 명이 한국인 어민 약 20만 명을 억압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생존권 짓밟힌 고성 어민들 분노
식민지 어업 구조 속에서 한국인 어민들의 생계는 갈수록 위협받았다. 고성 일본인 멸치망 어업장의 어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상황은 일제 경찰 기록인 <고등경찰관계적록(경남도)>과 고성문화원이 발간한 <고성독립운동사> 등을 통해 확인된다. 기록을 보면, 1918년 8월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에는 일본인 멸치망 어업자 9가구가 다수 한국인 어민을 고용해 어업을 운영했다.
일본인 기술자 약 50명에게는 월등히 높은 임금을 지급했다. 한국인 어민들은 턱없이 낮은 임금에 고된 노동을 떠안았다. 결국 어민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준비했다.
이를 파악한 일본인 어업자들은 당동주재소 헌병에 지원을 요청했다. 헌병은 현장에 출동해 어민들을 집합시켰다. 어민들은 이를 일본인 고용주를 비호하기 위한 식민 권력의 개입으로 받아들였다.
유삼두 선생 등을 중심으로 어민 약 500명이 모였다. 헌병이 칼을 뽑아 위협하자 어민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다. 결국 고성헌병분견소와 통영경찰서 지원 병력이 투입된 뒤에야 사태가 겨우 진압됐다고 적혀 있다.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 1918년 10월 14일 자 1심 판결문에는 당시 상황이 구체적으로 기록됐다. 사건은 1918년 8월 31일 일본인 어업자 화본설조 집 앞에서 열린 임금 협상 과정에서 발생했다.
당시 한국인 어민들의 월급은 3~7원에 그쳤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여파로 쌀값과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기존 임금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어민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했고, 일본인 어업자 측은 최고 월 10원까지 인상을 제시했다. 일부 어민들은 부산 등 다른 지역 사례를 들며 최대 월 15원은 받아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며 이를 거부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됐고, 동맹파업은 집단 충돌로 번졌다.
판결문에는 어민들의 임금 인상 요구와 동맹파업 추진, 일본인 어업자 측의 임금 인상 제안이 담겼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노동쟁의 배경보다 충돌 과정에서 발생한 폭행과 상해 행위에 책임을 물었다.
박용수·박원오·오동업·유삼두·조용옥 선생 등 한국인 어민 17명은 '태90'을 선고받았다. 반면 일본인 학전을송 등 3명은 벌금 30원을 선고받았다.
원심 검사가 항소한 2심에서는 일부 형량이 더 무거워졌다. 대구복심법원은 1918년 11월 12일 유삼두·곽명옥·조운옥·박용수 선생 4명에게 원심 판결을 취소하고 각각 징역 4개월을 선고했다.

"지역 어민 저항사 조명 가치"
일제의 어장 장악과 어업권 침탈에 맞선 어민들의 저항은 1919년 3·1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이어졌다. 그해 전남 여수에서는 많은 어민이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1926년 통영에서는 일본인 어장 독점과 사용료 인상에 맞서 집단 탄원이 이어졌다. 1931~1932년에는 제주 해녀들이 일본인 중심 해녀어업조합에 맞서 대규모 항쟁을 벌였다.
이들 항쟁의 출발점은 생계와 어업권이었다. 그 배경에는 일본인 어장 독점과 어업권 침탈, 민족 차별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민들의 저항은 임금투쟁을 넘어 식민지 경제질서에 맞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행동이었다.
특히 1918년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 어민항쟁은 이들보다 앞선 사례다. 당시 일제는 헌병경찰을 앞세워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고, 집회와 결사, 노동운동을 철저히 억압하며 식민지 수탈 체제를 구축하던 시기였다.
전성현 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고성 어민항쟁을 식민지 경제질서에 맞선 민중 저항으로 평가했다.
전 교수는 "독립운동은 만세운동이나 무장투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식민 권력과 일본인 경제적 침탈에 맞선 저항 역시 독립운동 한 계열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일본인들은 어장과 어업권, 생활 터전을 장악했고 한국인 어민들은 저임금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며 "생활권과 어업권을 지키기 위한 저항은 결국 식민 권력에 대한 저항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또 "1910년대 민중의 저항은 자료 부족으로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며 "판결문과 경찰기록 등 당대 자료가 확인된 만큼 고성 어민항쟁도 독립운동사 한 영역으로 연구와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해룡 고성지역 향토사학자는 고성 어민항쟁이 3·1운동 이전 무단통치기에 발생한 지역 민중의 집단 저항이라는 점에 의미를 뒀다.
그는 "일본인이 어업 운영과 기술직을 장악하고 한국인 어민을 저임금 노동자로 종속시킨 식민지 구조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며 "수백 명 어민이 민족 차별과 식민지 경제 수탈에 함께 맞섰다는 점에서 지역 어민 저항사로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문정민 기자
◇참고 문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민족독립운동사>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