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년간의 작업
〈땅에 쓰는 시〉는 6년간의 작업을 통해 완성한 작품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오랫동안 촬영을 했지요. 여기 선유도 공원만 해도 50번 넘게 왔습니다. 매번 올 때마다 풍경이 달라지고, 늘 다른 표정을 만났고요. 하지만 항상 최고의 순간을 담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당신이 온 순간이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땅에 쓰는 시〉를 만들기 시작할 때, 선유도 공원과 정영선 선생님의 양평 정원은 사계절을 모두 담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사계절을 다 잘 표현할 수 있는 타이밍을 잡는다는 게 정말 고통과 좌절의 연속이었어요. 시간을 쏟아붓고 그 공간에서 살지 않는 한 최고의 순간을 잡는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비 오는 장면과 눈 오는 장면은 꼭 찍어야 했는데, 이에 관한 에피소드도 많습니다. 비가 막 내려서 촬영 장소로 달려갔는데, 촬영 버튼을 누르려고 하면 비가 그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결국 메인 카메라로는 촬영을 못 하고 항상 들고 다니는 작은 카메라로 겨우 촬영한 적이 많은데, 그 순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사실 〈땅에 쓰는 시〉에 넣고 싶었던 비 오는 장면은 보통 비가 아니었어요. 기후변화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기후가 점점 아열대로 바뀌면서 몬순 지역 스콜처럼 폭우가 쏟아지는 경우가 많아졌지요.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는데, 워낙 쏟아지는 시간이 짧아 항상 타이밍을 놓쳤어요. 결국 스콜 장면은 영화에 넣지 못해 안타깝고요.

선생님의 전체 작품을 놓고 보면, 작품마다 어느 계절에 가서 찍어야겠다는 것이 보였어요. 예를 들어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은 봄과 겨울에 촬영을 했어요. 싹 트는 버드나무를 보여줄 수 있는 봄, “겨울이 아름다워야 봄도 아름답고 여름도 아름답다”는 선생님의 철학이 그대로 재현되는 겨울, 전부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이 제격이었던 거지요.
선생님께서 이때 여기 가자고 권하시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어요. 선생님과 함께 선생님의 작품을 만날 때마다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 눈빛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이니까요. 사전 조사도 아주 철저히 했고, 시뮬레이션도 많이 했어요. 그래도 창작자로서는 그 아름다운 자연을 다 담지 못한 것 같아 괴로웠어요.

정영선 조경가의 세계 – 그리움의 정경
정영선 선생님은 우리의 국토를 정말 사랑하세요. 그렇다고 자연적이고 한국적인 경관을 복사하여 붙여 넣으시는 것은 아니에요. 선생님께서는 지사적 맥락이라는, 그 공간의 역사성과 특징을 오랫동안 고려하시고 작품을 만드십니다.
예를 들어 이곳 선유도공원과 다산생태공원을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둘 다 강 옆에 있는 공간이지만, 저희가 보는 풍경은 서로 사뭇 다릅니다. 선유도공원은 원래 선유봉이라고, 작은 봉우리 섬이었어요.
일제 강점기에 채석장으로 사용되다가 1970년대 선유정수장이 되었고, 그것을 어떻게 복원할까 하는 프로젝트에 정영선 선생님이 참여하셨지요. 옛날에 봉우리가 있었다고 해서 ‘선유봉’을 고스란히 복원하는 게 선생님의 목표는 아니었어요. 선유봉이었던 역사와 선유정수장이었던 역사, 그 모든 맥락을 다 품고 이제는 이곳을 공원으로 쓸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와 정신과 그 아름다움을 전달할지 고민하셨지요. 그래서 현재의 독특한 풍경이 나온 것이고요.

한편 다산생태공원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철학을 복원하는 개념으로 접근하셨어요. 원래 거기 있던 늪지를 복원하시고, 한편으로는 누구에게나 남아 있는 추억 속의 정경을 펼쳐놓으셨어요. 여길 가면 어릴 적에 보았던 어떤 풍경이 펼쳐지고, 이 길은 꼭 어릴 적 내가 걸었던 길 같고. 영화를 보면서 정영선 선생님의 작품에 감동하셨다면, 그것은 선생님께서 모두의 안에 남아 있는 그리움의 정경을 떼어내 작품으로 만드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 덕분에 저희 영화도 덩달아 사람들에게 감동과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이겠지요.
정영선 조경가의 세계 – 조경이라는 미래
조경의 시제는 미래입니다. 지금 당장 아름다운 모습을 만드는 게 아니라 다음 시즌에는 무엇이 들어오고 앞으로 어떻게 자라날지를 그리는 작업이에요. 같은 곳에 심은 꽃도 제철이라고 동시에 피지 않아요.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잖아요? 자기만의 속도가 있고, 어떤 사람이 언제 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누가 100% 완성형으로 살겠어요. 그래서 인간을 서로 비교할 수 없고, 누구의 삶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어요. 저희 엔딩 음악으로 〈모두가 꽃이야〉라는 동요를 사용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우리 모두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꽃이라는 메시지이지요.
그런 시간성이 선생님의 조경 철학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구조도 시간의 흐름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아이의 모습으로 시작해 아이의 모습으로 영화를 끝내는 것도 처음부터 의도한 바예요.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니까요.
영화에도 나오지만 선생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도 같아요. 아이들, 미래 세대의 세상을 위해 우리가 가진 좋은 것을 잘 보존하고 현대적으로 잘 발전시켜서 물려줘야 한다고요. 개발을 하더라도 덜 파괴적이고, 더 미래지향적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요. 선생님께서는 한국적 경관이 본디 지닌 자연스러운 미적 감각과 현대성을 연결하는 것이 미래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세요. 사람의 손길이 닿는 조경이지만, 원래 자연에 있던 듯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지금도 양평 정원을 실험실처럼 가꾸시고, 전국 곳곳을 다니며 관찰하고 공부하시는 것이고요.

시간의 예술다운 피날레, 우드랜드 묘지공원
소위 말하는 독립 예술 다큐멘터리 영화는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알려져야지만 배급사와 연결이 되어서 상영관에 걸릴 수 있어요. 그런 과정 없이는 개봉하기도 어렵고, 개봉해도 어렵지요. 〈땅에 쓰는 시〉는 2023년 EIDF(EBS 국제다큐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었어요. 저도 굉장히 사랑하는 영화제인 EIDF가 작년에 20주년을 맞이했는데요, 20년 동안 국내 작품이 개막작이 된 사례는 〈땅에 쓰는 시〉가 최초예요. 감사하게도 개봉한 지 한 달이 넘은 지금까지 27개 관 정도에서 상영되고 있고요.
다큐멘터리는 시간과 공간의 예술입니다. 인간도 시공간성을 지닌 존재이고, 건축과 조경 역시 시공간의 예술이지요. 저에겐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서 건축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 ‘성공한 덕후’라고 불러요. 작업 과정이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요.
그런데 소위 시간의 예술인 다큐멘터리라 그럴까요? 제20회 EIDF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후 저희에게 또 다른 사건이 찾아와요. 정영선 선생님께서 세계조경가협회(IFLA)가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상인 ‘제프리 젤리코’를 수상하신 거예요. 사실 몇 개월 전에 수상자에게 연락이 가기 때문에 저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2023년 9월 28일 수상 당일까지는 비밀에 부쳐야 했어요.
그래도 촬영 기획은 하고 있었어요. 제 첫째 아들을 짐꾼 삼아 시상식이 열리는 스톡홀름으로 날아갔지요. 단지 선생님의 수상 장면을 찍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스톡홀름에는 우드랜드 묘지공원이 있거든요. 선생님께서도 꼭 한 번 가 보고 싶으시다 하셨던 곳이요.
우드랜드 묘지공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유일한 묘지공원입니다. 사실 영화에 묘지 프로젝트를 꼭 넣고 싶었어요. 선생님께서 하신 좋은 묘지 프로젝트도 많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에 넣을 수가 없었거든요. 묘지는 조경가와 건축가 모두에게 공통된, 마지막 희망 프로젝트 같은 것이라고 해요. 누군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가장 강력한 위로의 공간이기 때문이지요.
영화 속 사계절 풍경처럼 공간을 통해서도 시간성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병원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공원에서 뛰어놀고, 성장해 열심히 살다가 아프기도 해서 다시 병원에 가고, 그러다 다 나으면 멀리 여행을 가서 어딘가 아름다운 공간을 즐기고. 어떻게 보면 인생의 사이클 모든 곳에 조경가의 손길이 들어가 있는데, 삶의 마지막인 묘지공원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지요.
공원, 모두를 위한 나만의 비밀 정원
공공의 공간은 힘을 갖고 있어요. 저희는 공공 프로젝트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선유도공원은 〈땅에 쓰는 시〉의 상징 같은 곳이에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도 선유도공원을 자주 찾았어요. 태교를 하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이 공간에 오면, 선유정수장의 구조물을 일부러 남겨두어 그 위로 식물이 덮이는 그림을 처음부터 그리셨다는 게 보여요.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그래서 감사하지요. 그렇기에 행복할 때도, 고통스러울 때도 선유도공원을 찾아왔어요.

무엇보다 선유도공원이 공공의 공간이라는 그 자체가 너무 좋아요. 모두를 위한 나만의 비밀 정원, 그것이 저는 공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누구나 이렇게 큰 자기만의 정원을 가질 수 없잖아요. 예컨대 도서관도 마찬가지이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책으로 가득한 건물을 소유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누구나 찾아올 수 있지만, 그 공간에서 어떤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누구와 함께 보내느냐에 따라 저만의 의미가 생기는 공공의 공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나만의 비밀 정원’인 것이지요.
앞으로 이런 공공의 공간이 더 많아져야 해요.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좋은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지요. 그래서 저는 전국의 공무원들이 〈땅에 쓰는 시〉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고건축, 한국의 전통 정원을 찾아가는 다음 행보
우리는 우리 것이 좋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역사와 문화 수준은 어마어마해요. 예술성이 엄청나지요. 다음 작품에서는 우리 것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한국의 고건축과 전통 정원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K-아키텍처’를 외국에 알리는 건 물론이고요, 그 전에 국내에 먼저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어요.
정영선 선생님께서도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절절히 이야기하신다고 말씀드렸죠. 〈땅에 쓰는 시〉 중간에 한라산 설경이 등장해요. 정영선 선생님의 작품이 아닌 국립공원을 삽입한 이유는 “우리 국토는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정원이야.”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영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였어요.
다음 작품은 음악도 미리 생각해 두었어요. 〈이타미 준의 바다〉에도 나오신 음악가 양방언 선생님이 국립중앙박물관의 반가사유상 전시와 연계하여 만드신 음악이 있는데, 다음 작품에 쓰게 해달라고 벌써 허락도 받아두었어요. 다음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의 어마어마한 아름다움의 결정체를 작정하고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미나리아재비
6년 동안 〈땅에 쓰는 시〉 작업을 하며 제게 남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꽃이 있어요. 미나리아재비예요. 영화를 보시면 미나리아재비가 정영선 선생님께는 ‘초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꽃이라는 사실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우리 산과 들에 흔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그 꽃을 보며 저도 이제 정영선 선생님과 〈땅에 쓰는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요.

인터뷰 | 이주호, 신태진
사진 | 신태진
인터뷰 도움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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