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뜨거운 사랑' 나눈 아내…남편이 모른 척한 이유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3)
끔찍한 피해, 여성 차별 딛고
유럽 인기 화가로 우뚝 서다
“사실입니다. 사실입니다. 제가 말한 모든 것은 사실입니다.”
1612년 3월 이탈리아 로마의 법정. 19세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고통으로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에게 성폭행당한,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 법정에는 피해자에게 고문을 가하는 야만적인 제도가 있었습니다. ‘고문을 받으면서도 똑같은 진술을 해야 진실을 증명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바탕으로, 일종의 ‘거짓말 탐지기’로 고문을 이용했던 겁니다. 그리고 아르테미시아는 피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고문받기로 했습니다. 얇은 줄로 손가락을 죄는 시빌레(Sibille)라는 고문이었습니다.
줄이 손가락을 부러트릴 듯 죄어왔지만 그녀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가해자를 당당히 노려봤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성폭행했어요. 그러고 나서 나와 결혼하겠다고 하더군요. 내 명예와 집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어요. 당신, 지금 내 손을 봐. 지금 내 손가락을 죄고 있는 줄이 당신이 말했던 결혼반지야? 이게 당신이 했던 약속이야?” 그 말에 가해자는 시선을 피했습니다. “저 문란한 여자가 날 유혹했다”고 주장할 정도로 뻔뻔한 가해자였지만, 아르테미시아가 말하는 진실 앞에서는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세세한 피해 사실까지 일관적으로 증언하는 피해자, 각종 전과가 있는 데다 수시로 말을 바꾸는 가해자. 둘 중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는 뻔한 일이었습니다. 판사는 가해자에게 유죄 판결을 내립니다. 그리고,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당대 유럽의 인기 화가로 우뚝 서게 되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3)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오늘은 그의 삶과 작품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아버지 친구’가 뻗친 마수
아르테미시아는 1593년 로마에서 중견 화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1563~1639)의 첫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아르테미시아가 열두 살 때 출산 도중 목숨을 잃었고, 그녀의 밑에는 남동생만 네 명 있었습니다. 가족 중 여성이라고는 오직 아르테미시아 한 명뿐. 사회에는 폭력이 만연했고, 거리는 무질서했고, 여성은 ‘2등 시민’ 취급받았던 당시 로마 상황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성장 환경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르테미시아를 화가로 키우기로 했습니다. 화가라고 하면 절대다수가 남성이고, 여성 화가는 그 존재를 찾아보기 어렵던 시절. 그런데도 이런 결정을 내린 건 딸의 미술 재능이 그만큼 탁월해서였습니다. 열네 살이던 1607년부터 아버지의 공방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아르테미시아는 불과 3년 만에 웬만한 성인 화가들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을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그림 공방에서 불행하게도 성폭행 가해자인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1578~1644)를 마주치게 됩니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타시는 종종 공방을 방문했고, 그 과정에서 친구의 딸인 아르테미시아에게 눈독을 들이게 됐습니다. 그 사실을 몰랐던 아버지가 “딸에게 그림을 가르쳐 달라”고 타시에게 부탁한 게 화근이었습니다. 남들 눈을 신경 쓰지 않고 공방에 드나들 수 있게 된 타시는 밤낮으로 아르테미시아에게 추근댔습니다. 분명한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소용은 없었습니다. 아르테미시아가 열여덟 살이던 1611년, 타시는 그녀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
기록에 따르면 아르테미시아는 격렬하게 저항했고, 칼을 던져 타시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타시는 뻔뻔한 태도를 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혼하면 되잖아. 결혼하자.” 아르테미시아는 분노했고, 좌절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동의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명예를 지키려면 그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당시 이런 일은 그렇게 드물지 않았습니다.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타시 같은 인간성의 소유자가 약속을 제대로 지킬 리 없습니다. 훗날 재판에서 밝혀지지만, 타시는 사실 여러 강력 범죄를 저지른 상습범이었습니다. 바람을 피우고 도망간 자기 아내를 청부살인했다는 혐의로 감옥을 갔다 온 적도 있고, 처제와 불륜을 저질러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너와 결혼하겠다”는 말도 아르테미시아에게 반복해서 접근하기 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반년 뒤, 아르테미시아는 타시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는 타시를 고소했습니다.
법정에서 타시는 악랄한 전략을 펼쳤습니다. 그는 “아르테미시아는 문란한 여성이고, 자신도 유혹당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자기 친구들을 내세워 평소 아르테미시아가 아주 문란한 생활을 했다고 거짓 증언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려다 보니 이들의 증언은 자꾸 꼬였습니다. 재판 기록에는 “거짓말 좀 그만 하라”는 판사의 경고가 여러 번 기록돼 있습니다. 반면 아르테미시아는 고문받으면서도 상세하고 일관적인 진술을 했습니다. 결국 재판부는 타시에게 유죄 판결을 내립니다.
재판이 마무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테미시아는 결혼합니다. 재판에서 “아르테미시아는 평소 몸가짐이 정숙했고 거짓말을 할 사람도 아니다”고 증언해준 사람의 사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과 함께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이사합니다.
멋진 인기 화가, 아르테미시아
아르테미시아는 피렌체에 가자마자 유명 화가로 떠올랐습니다. 탁월한 실력 덕분이었습니다. 예술 후원으로 유명한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고, 불과 스물세 살인 1616년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예술가 협회(아카데미아 델 디세뇨)에 여성 최초 회원으로 가입합니다. 귀족 사회와 가까워지면서 아르테미시아는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고급문화에도 익숙해졌습니다. 그만큼 그녀의 예술 세계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여러 후원자가 몰려들면서 그녀는 큰돈을 벌었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아이를 다섯 명이나 낳으면서도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했습니다.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참여한 벽화 작업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던 그녀는 다른 화가들의 세 배에 달하는 사례금을 받았습니다.
이후 아르테미시아의 삶에 대한 기록은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을 연상시킬 만큼 파란만장합니다. 아르테미시아가 피렌체의 부유한 귀족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는 기록이 대표적입니다. 이 시기 아르테미시아가 연인과 주고받은 편지가 몇 통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만나지 못한 동안 내 체중이 많이 늘었어요. 날 못 알아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편지가 짧은가요?”와 같은 내용들. 아르테미시아의 남편은 이런 관계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별말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당 귀족이 아르테미시아의 강력한 후원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연애에 대한 소문이 피렌체에 퍼지면서 아르테미시아 가족은 로마로 다시 이사해야 했습니다.
이후 아르테미시아는 남편과 별거하고, 실질적인 ‘싱글맘’으로 아이를 키우며 화가로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그녀는 인기 화가로 화려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작품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천재 화가 카라바조(1571~1610)의 스타일과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620년대 중반에는 아르테미시아의 명예를 기리는 메달(기념 주화)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메달에는 라틴어로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Pictrix celebris’(유명한 여성 화가). Celebris를 요즘 말로 하면 ‘셀럽’입니다. 이미 그녀의 명성은 중견 화가였던 아버지를 넘어선 지 오래였습니다.
그 후로도 아르테미시아는 전 유럽을 누비며 그림을 그리고, 연애를 하고, 아이를 키웠습니다. 영국 왕 찰스 1세의 초청을 받아 영국 궁정에 2년간 머무르기도 했고, 베네치아와 나폴리 등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오갔습니다. 자신이 번 돈으로 남편과 낳은 아이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의 결혼 지참금도 마련해 줬습니다.
미술사학자들은 그가 다른 남성과의 사이에서 딸을 한 명 더 낳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배우자가 죽어야 재혼을 할 수 있었는데, 1630년대 “(전)남편이 죽었는지 여부를 알고 싶다”며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낸 기록이 있고, 1640년대 후반에 딸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느라 고생했다는 기록이 한번 더 있거든요. 이렇게 드라마 같은 삶을 산 아르테미시아는 60세가 되던 165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 가지 시선
누구나 저마다의 시각으로 화가와 그림을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여기엔 보는 사람의 생각과 신념이 크게 반영됩니다.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가장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인 시각은, 아르테미시아가 ‘복수자’라는 겁니다.
아르테미시아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세례 요한의 목을 베는 살로메’ 등 남성의 목을 베는 여성 이야기에 관한 그림을 많이 남겼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가해자인 타시에 관한 복수심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수라는 주제에 집착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일부 진실을 품고 있습니다. 분명 이런 주제 선택에는 화가 자신이 겪었던 끔찍한 일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시각에는 아르테미시아를 ‘분노와 복수를 표현한 피해자 화가’로만 보는 관점이 녹아 있다는 게 현대 미술사학자들의 비판입니다.
이는 아르테미시아 자신도 원치 않았던 해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국 내셔널갤러리가 소장 중인 ‘성 카타리나로서의 자화상’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아르테미시아는 수레바퀴에 묶이는 고문을 당해 순교한 성녀, 카타리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타리나는 깨진 수레바퀴 조각을 들고 있습니다. 박살이 난 건 자신을 고문한 수레바퀴일 뿐, 카타리나의 고결한 영혼에는 아무 상처가 없습니다. 아르테미시아에게 고통이 있었던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을 통해 아르테미시아는 말하는 듯합니다. 비극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게 자신을 진정으로 상처입히지는 못했다고.
두 번째로 아르테미시아를 보는 시각은 여성주의적 시각입니다. 미술 역사에서 대부분의 남성 화가들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봤습니다. 성경이나 신화 속 이야기를 그릴 때도 여성을 더 예쁘게, 성적으로 묘사하는 데 집중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림을 구입하고 소장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게 그거였거든요. 그래서 이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성은 젊고 아름다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간혹가다 사악한 노파, 마녀의 모습으로 묘사될 때도 있지만요. 어쨌거나 그림에 ‘평범한 여성’이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젠틸레스키의 그림에는 중년 여성의 의지나 결단을 드러내 여성을 강인하고 믿음직한 존재로 표현한 장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미술계 일각에서는 이런 해석이 아르테미시아의 이미지를 ‘여성 투사’로만 한정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실제로 여성주의 시각의 미술사학자들은 아르테미시아의 그림 중 전통적인 주제를 다룬 것들, 즉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작품이나 수태고지를 받아들이는 성모와 같은 작품의 가치를 낮게 평가합니다. 예술사학자 주디스 워커 만은 “아르테미시아가 복수에만 집착했다는 게 고정관념인 것처럼, 아르테미시아가 여성주의 투사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고정관념”이라며 “이는 아르테미시아의 작품 세계와 가치를 좁히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아르테미시아를 ‘영리한 전략가’로 보는 관점입니다. 아르테미시아는 타시에게 복수하고 싶었고 그림을 통해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을 겁니다. 그녀가 여성 차별에 피해를 봤고 이에 분노했으며 현실을 바꾸고 싶었던 것도 분명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을 옭아매는 것들에 지배되지 않았고, 자신을 ‘피해자’나 ‘차별받는 투사’라는 좁은 범주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철저히 이용했습니다. 자신이 겪은 비극을 연상시키는 작품을 통해 그는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고귀한 성품의 희생자이자 당대 여성들의 일종의 ‘롤모델’로 이미지를 굳혔고, 더욱 큰 명성과 존경을 얻었습니다.
실제로 아르테미시아는 주문자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자신만의 시각을 그림에 가미했습니다. 그가 후원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성 화가의 작품에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작품을 보기도 전에 화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 수준을 의심하곤 하지요. 하지만 제 작품을 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한 여인의 영혼 속에서, 위대한 황제 카이사르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전략을 통해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의 진정한 목표인 화가로서의 꿈과 사랑, 행복을 거머쥔 멋진 삶을 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초월해 한 사람의 존엄한 인간이자 탁월한 화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의 묘비에 이렇게만 적혀 있다는 사실이 증거가 될지도 모릅니다. ‘여기, 아르테미시아(Haec Artemisia)’.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아르테미시아는 그 드라마틱한 삶 덕분에 여러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로 다뤄졌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창작이 마치 사실처럼 잘못 알려지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이번 기사는 실제 아르테미시아의 로마 재판 기록과 생전 남긴 서신이 포함된 Artemisia Gentileschi(메리. D 개러드 지음), Orazio and Artemisia Gentileschi(Keith Christiansen, Judith W. Mann 지음), 여기, 아르테미시아 (메리 D. 개러드 지음), BBC 기사 The artist who triumphed over her shocking rape and torture(2018년 8월 27일 Holly Williams 작성) 등 신빙성 높은 1·2차 자료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프리즈 런던 아트페어와 한국 작가들의 전시 취재를 위해 1주일 정도 출장을 떠납니다. 다음 2회는 런던에서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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