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강제동원, 이름 없는 피해자들] ① '열살의 봄, 빼앗긴 인생' 이옥순씨의 증언

박지혜 기자 2025. 8. 1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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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 안 중요해…강제 동원 역사, 기억해 주길 바랄 뿐”

1941년 10살때 순사에 붙잡혀
영등포 방직공장서 강제 노동 시작
온종일 물레 돌리며 굶주림 견뎌

일본 끌려가서도 폭행 속 일만 계속
해방 뒤엔 또 잡혀갈까 서둘러 결혼

이어 터진 6·25…고난의 연속
허무한 인생 '나'란 존재는 없어

평생 여성단체 활동에 헌신
日공장 이름 몰라 피해자 인정 못받아
90세지만 당시 기억 아직도 생생

송두리째 빼앗긴 한 많은 내 인생
후손들이 우리 역사 알아주길 바라

#프롤로그

피해의 기억은 선명하지만,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그들. 지난해 인천일보 취재와 경기도의 최초 실태조사를 통해 '강제동원 미인정 피해자'들의 억울한 목소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남은 일은 '기록'이다. 광복 80주년, 인천일보는 도가 수집(연구:아르고인문사회연구소)한 피해자 증언을 기반으로 국가가 남기지 않은 역사를 채우고, 책임을 묻는 '증언집'을 소개하겠다.

첫 번째 이야기는 '열 살의 봄, 빼앗긴 인생' 이옥순(94)씨 이야기다. 이씨는 1941년, 열 살 봄에 순사에게 붙잡혀 영등포 방직공장에서 강제노동을 시작했다. 솜먼지 자욱한 공장에서 하루종일 물레를 돌리며 굶주림을 견뎠고, 일본에서도 폭행과 모욕 속에 일했다. 해방 뒤엔 또다시 잡혀갈까 서둘러 결혼했고, 이어 6·25전쟁까지 겪었다. 평생 여성단체 활동에 헌신했지만, 일본 공장 이름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지금도 90세를 넘긴 나이에 당시 기억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 보상이 중요하지 않다. 먼저, 어린 나이에 빼앗긴 삶과 강제 동원의 역사를 후손들이 기억하길 바란다.

▲ '강제동원 미인정 피해자'인 이옥순 할머니(94)가 경기도 실태조사로 찾아온 연구기관 관계자들에게 자신의 기억을 꺼내 증언하고 있다. 이 할머니는 11살에 정신근로대로 영등포 방직공장으로 끌려가 노동 착취를 당했다. /사진제공=경기도

몽땅 새까만 제복에 새하얀 칼. 울다가도 들으면 눈물이 뚝 그칠 만큼 무서웠던 '순사'가 우리 집 마당 앞에 둘이 서 있었다. 쫄랑쫄랑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 마주한 갑작스러운 공포에 "아버지, 나 왔어요" 인사도 나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집으로 숨어 '우리가 뭐 잘못한 일이 있어 순사가 왔을까, 왜 왔을까?' 머리를 쥐어짰다.

강원도 금화에서 태어나 일곱 살 먹을 즈음 평강군으로 이사를 왔다. 그러고도 3년이 더 지나 막 학교에 입학하려던 참이었다. 순사들이 떠나고도 입을 꾹 다문 아버지를 대신해 마을 구장(이장 또는 통장)을 찾아갔다. "아저씨, 아저씨, 아까 우리 집에 왜 순사들이 왔었는지 알려주시면 안 돼요?" 물었다. "네가 안 가면 너희 아버지를 모셔 가야 한대." 아, 가슴이 와르르 무너졌다. 1941년, 열 살이 되던 봄이었다.

#1. 영등포-일본 방직공장서 '착취'당한 꿈

순사가 집에 오곤 이틀 만에 영등포행 기차를 탔다. 동네 동갑내기 권씨 애랑 둘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선 말이다. 우린 까만 치마에 하얀 윗도리 하나를 건네받고 하꼬방(판잣집) 같은 데에 맡겨졌다. 하얀 솜먼지가 자욱해 앞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방직회사였다.

물레로 씨를 빼 넘기는 일부터 익혔다. 몸이 작고 빠릿빠릿해 어깨에 띠를 매고 광목을 짜는 높은 단계의 일도 금세 맡았다. 그쯤 권씨 애와도 헤어졌고, 영영 소식이 없었다.

집을 나와선 내내 무시래기와 강냉이를 물에 불려 소금 간을 한 죽도 밥도 아닌 무언가를 양은그릇에 받아먹으며 끼니를 때웠다. 무시래기 건더기 두 개가 걸리면 운이 좋았다. 강냉이 10알도 채 들어오지 않은 밥에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온 15살, 17살 아가씨들은 배가 고파 환장했다.

일본 식당에서 버린 똥물 통에 손을 집어넣어 버려진 참외 껍질, 수박 껍질을 주워다 물에 씻어 먹곤 쓰린 배를 움켜쥐는 날도 허다했다. 언니들은 도망을 가려고 담을 뛰어넘다 다리가 부러지고 갈빗대가 부러졌다. 영등포에 끌려 오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면회를 온 아버지는 그사이 바싹 마른 나를 보고 눈물을 툭, 툭, 툭 흘리셨다. "아버지, 나 좋아. 나 좋아. 아버지, 왜 울어." 이를 꽉 깨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강제동원 미인정 피해자'인 이옥순 할머니(94)가 경기도 실태조사로 찾아온 연구기관 관계자들에게 자신의 기억을 꺼내 증언하고 있다. 이 할머니는 11살에 정신근로대로 영등포 방직공장으로 끌려가 노동 착취를 당했다. /사진제공=경기도

돈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그저 20명, 25명이 머리끼리 맞대고 누우면 꽉 차는 방에서 눈을 붙였다 뜨면 일하길 반복했다. 서지도 못해 앉은 채로 바가지에 물을 떠 대충 씻고, 먼지투성이 검정치마를 빨고 널었다 덜 마른 채로 다시 두르고 일터로 향했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난 다시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도 작은 몸을 껑충 뛰어 배 틀에 실을 이었다. 혹여 실이 하나라도 끊어지면 기계가 짤깍 섰고, 어디선가 일본인 여자가 벌같이 날아들어 "빠가야로! ('바보 자식'을 뜻하는 비속어)" 외치며 뺨을 후려쳤다. 정신이 아뜩해졌다. 혹여 엄마가 보고 싶냐 물어오면 '엄마까지 잡아 오려나?' 무서워져서 하라는 데로 열심히 일할 뿐이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세월은 흘러갔다.

#2. '착취'에서 '도피'로…강요받은 인생

열일곱이 된 어느 날 우연히 나간 휴가에서 해방 소식을 들었다. 태극기를 휘두르고 기뻐 '만세'를 외치기 무섭게, 아버지는 시집을 가라고 다그쳤다. 딸이 잡혀가고 병을 얻어 몇 년간 앓았다던 그는 '절름발이한테라도 짝을 맞춰 어디로든 보내야 한다'는 생각만 했댔다. "시집을 가라면 가야지, 또 잡혀갈 거냐?" 노하면서 말이다. 그 말에, 불효를 저지르는 듯 해 승낙은 했지만 한참을 엎드려 울었다. 남자가 뭔지, 시집이 뭔지도 몰랐다. 밥도 먹지 못하고 며칠을 울다 난 내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집을 가고 역에서 복무하던 남편을 따라 복개역에서 신고산역으로 뒷바라지하러 다니던 즈음, 6·25전쟁이 난다며 세상이 술렁였다. 결국 남편과 함께 월남을 시도하며 곳곳을 전전하던 중 흥남 부두에서 LST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18살에 낳은 100일도 안 된 아들을 꽁꽁 숨기고선 강릉 묵호에 내려서 대구로, 화천으로, 의정부로 터를 옮겼다. 숱한 고비와 역경을 마주하며 그렇게 60년의 인생이 또 흘러갔다.

▲ '강제동원 미인정 피해자'인 이옥순 할머니(94)가 경기도 실태조사로 찾아온 연구기관 관계자들에게 자신의 기억을 꺼내 증언하고 있다. 이 할머니는 11살에 정신근로대로 영등포 방직공장으로 끌려가 노동 착취를 당했다. /사진제공=경기도

#3. 산 역사의 증언이 되리라

어린 날의 징용은 내 삶을 송두리째 망쳐놓았다. 열 살, 일본에 끌려갔다 오고선 또 잡혀갈까 서둘러 결혼했고, 6·25전쟁을 겪었다. 억울하고 허무했다. 처녀 시절도, 학생 시절도 없었으며,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도, 배우지도 못했다. '여기 가라', '일해라' 강요받은 삶의 연속에서 '나'는 없었다.

의정부에 터를 잡고 산 60여년간 여성의용소방대장도, 여성단체 연합회장도 하며 누구보다 앞장서서 사회를 위해 헌신했지만 모두 소용없었다. 방송을 보고 알음알음 도움 줄 사람들을 직접 찾아 나서고 강제징용을 증명할 서류를 준비했지만, 강제로 끌려간 곳이 일본의 어느 지역인지, 방직공장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이유로 여성근로정신대 피해자로 인정받지도, 재판을 신청할 수도 없었다.

90세가 넘는 오늘도 어제 일인 듯 생생한 기억들은 아무 쓸모가 없어진 셈이다.

나는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 주변에선 가끔, 에어컨도 없는 10평짜리 삶을 누군가 들여다봐 주길, 조금 더 나은 지원이 있길 바라지만 간혹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부강한 대한민국의 소식들에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나의 과거를 기억해 주길 바란다. 고작 10살짜리 아이들을 눈도 녹지 않은 겨울날 끌고 가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았던 사실을, 36년 동안 나라를 뺏기고 일본인들에게 우리나라가 당해온 역사를 후손들은 꼭 기억해주길. 배우지는 못했지만 늘 증언해 온 나는 오늘도 말한다.

/박지혜 기자 pjh@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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