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도 안전지대 아니다"…자금력 앞세운 PEF의 '무차별 사냥'
(1) MBK 쇼크…대기업 최초로 경영권 뺏기나
자금력 앞세운 PEF의 '무차별 사냥'
승계·상속 거친 대기업 지주사
최대주주 지분율 취약해진데다
PBR 0.6배로 기업가치 저평가
'兆단위 실탄'으로 우량기업 타깃
IT·게임·바이오 분야도 '사정권'
차등의결권·포이즌필 없는 韓
자사주 매입이 유일한 방어장치
시가총액 16조원,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 기업인 고려아연의 경영권이 결국 뒤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동북아시아 최대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MBK파트너스가 기존 경영진과 이사회를 무력화하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PEF 주도로 적대적으로 경영권을 확보한 첫 사례로 기록될 전망이다.
경제계는 그야말로 초비상이다. 오너 경영진이 조그만 허점이라도 보이면 막대한 자금을 앞세운 PEF의 표적이 될 수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SK, LG 등 주요 그룹사의 지주회사 시총은 고려아연보다 적다. 일본에서 경영권 분쟁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린 글로벌 PEF는 물론 조단위 자금을 굴리는 토종 PEF도 참전 채비를 하고 있다.
“경제계 MBK 쇼크”
고려아연 사태는 어떤 상장기업도 경영권 분쟁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말해준다. 자금력을 갖춘 PEF가 시장에서 공개매수를 통해 경영권 지분을 확보하겠다고 선언하면 방어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지켜봤다. 무엇보다 고려아연 사례로 대주주 친인척이나 동업자들이 PEF와 손잡으면 언제든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학습했다.
자본시장에서는 기업과의 분쟁을 금기시하던 관행도 사라지고 있다. MBK파트너스가 지난해 공개매수로 한국앤컴퍼니의 적대적 M&A에 나섰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NH투자증권이 일찌감치 MBK파트너스에 줄을 서 1000억원에 달하는 수수료 수입을 앞두고 있다. 시장에선 ‘대주주를 공격할 명분만 만들어 오면 자금을 대줄 곳은 넘쳐난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다.
대기업 지주사 대다수는 승계와 상속 과정을 거치며 대주주 지분율이 취약해 언제든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게 경제계의 우려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과 특수관계인 지분율이 21.2%에 불과한 한진칼은 지분 17.82%를 보유 중인 호반그룹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다. 가족 간 분쟁이 있을 때는 최대주주 지분율이 과반에 육박하더라도 재판 결과에 따라 지분이 쪼개지고 경영권 공격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분쟁이 진행 중인 금호석유화학은 물론 최대주주의 이혼이나 승계를 둘러싼 잡음이 커진 그룹이 모두 사정권에 포함될 수 있다.
국내 지주사의 평균 주가순자산비율(PBR)은 0.6배 수준에 머문다. 주가가 자산가치의 절반 수준에 그칠 정도로 저평가돼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PEF는 결국 저평가 기업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게 목적인데 경영권 분쟁을 감수하고 사고 싶을 기업이 국내에 산적하다는 게 핵심”이라며 “대기업들이 주가를 끌어올리는 밸류업에 속도를 낼 촉진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투자자 자금으로 성장한 정보기술(IT)·게임·바이오기업 등도 취약한 대주주 지분율 탓에 언제든 적대적 M&A의 다음 타깃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토종PE “제2 MBK 되자”
수많은 PEF는 MBK의 고려아연 승부 결과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토종 PEF도 가세할 분위기다. 그동안 바이아웃 PEF는 국내에서 대기업들의 사업 재편 과정에서 비주력 계열사를 인수하거나 기업의 재무 부담을 줄여주는 파트너로 활동하는 등 ‘주어진 거래’를 따내는 게 주요 전략이었다. 하지만 펀드 규모가 커지고 인수 경쟁도 치열해지며 전통적인 전략으론 출자자에게 목표한 수익률을 돌려주기 어려워지자 분쟁에 직접 뛰어들어 ‘스스로 만드는 거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엔 뚜렷한 방어 장치조차 없다. 해외 주요국에 있는 차등의결권, 포이즌 필(신주인수선택권), 황금주 등이 적용되지 않는 국내 기업에는 자사주 매입만이 유일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고려아연 사태에서 봤듯이 시총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방어하기 어렵다”며 “대주주가 천문학적인 자금을 구해오는 게 불가능하고 자사주 매입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차준호/박종관/하지은 기자 chac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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