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리 본즈는 "가장 공이 더럽다"고 평했고, 블라디미르 게레로는 "저런 공을 던지는 투수는 메이저리그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며 혀를 내둘렀다. 당대 최고의 타자들이 이렇게까지 말한 투수가 있었다. 키 178cm의 작은 체구로 20살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한국인 사이드암 투수 김병현이다.
3개월 만에 마이너리그 초토화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김병현은 중국을 상대로 8타자 연속 탈삼진을 포함해 12개의 삼진을 잡아냈다. 이 활약에 해외 스카우터들이 몰려들었고, 국내 아마추어 선수 최고액인 225만 달러(약 27억원)를 받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입단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루키 리그 첫 경기를 본 감독은 그를 곧바로 더블A로 승격시켰고, 몇 경기 후 다시 트리플A로 올렸다. 마이너리그 감독은 "이 선수는 빨리 메이저리그에서 뛰어야 한다"고 구단에 보고했고, 김병현은 단 3개월 만에 메이저리그로 콜업됐다. 기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얘네 야구 잘 못해요."
데뷔전에서 마이크 피아자를 삼진

20세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김병현은 첫 경기에서 메이저리그 역사상 손꼽히는 강타자 마이크 피아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의 비장의 무기는 '업슛'이었다. 중지로만 실밥을 걸치고 낚아채듯 던지는 그만의 구종으로, 150km가 넘는 속도에 뱀처럼 휘어지니 타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내셔널리그 불펜 투수 중 피안타율 1위와 탈삼진 2위를 동시에 기록하며 단숨에 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월드시리즈의 악몽

2001년 창단 4년 차 신생팀 애리조나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했고, 상대는 4년 연속 우승에 도전하는 최강팀 뉴욕 양키스였다. 애리조나가 2승 1패로 앞서가던 4차전에서 3-1 리드 상황에 김병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9회말 투 아웃, 한 명만 잡으면 끝이었는데 동점을 허용했고 이어 끝내기 홈런까지 맞았다. 5차전에서 다시 기회가 왔지만 또다시 9회말 투 아웃 상황에서 동점을 허용하는 믿기 힘든 일이 두 경기 연속 벌어졌다. 동료들이 마운드로 달려와 그를 끌어안으며 격려했다.
운명의 7차전에서 애리조나는 기적 같은 역전승으로 창단 4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김병현은 우승 반지를 손에 쥐었지만 악몽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2002년, 전설의 시즌

복수의 기회는 2002년에 찾아왔다. 뉴욕 양키스를 다시 상대했을 때 김병현은 2이닝 무실점 4탈삼진으로 세이브를 기록하며 지난 악몽을 떨쳐냈다.
그 시즌 42세이브 기회 중 36번을 성공시키며 방어율 2.04를 기록했고 올스타에도 선정됐다. 전설의 기록도 남겼는데, 단 9개의 공으로 세 타자를 모두 삼진 처리한 '1이닝 9구 3삼진'이었다. 약물 의혹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했다. "약 먹어도 못할 사람은 못해요. 약 먹고 한번 던져보실래요?"
'법규형'의 탄생

보스턴으로 트레이드된 후 김병현의 커리어는 내리막을 걸었다.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단 하나의 아웃카운트만 남기고 교체됐는데, 후속 투수가 동점을 허용하자 야유는 이상하게도 김병현에게 쏟아졌다. 그는 관중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고, 사실상 보스턴 커리어가 끝났다.

이후 헬스장에서 무단 촬영을 하던 기자와 몸싸움이 벌어져 경찰 조사를 받게 됐는데, 사과 요구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느꼈을 때는 그분이 저한테 사과를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미국 출국 전 공항에서 또다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가운데 손가락과 성균관대 법대 출신, 그리고 '본투K(BK)'라는 별명이 합쳐져 '법규'라는 별명이 붙었고 그렇게 '법규형'이 됐다.
마지막 도전, 진짜 공을 찾아서

고질적인 발목 부상과 함께 김병현은 서서히 무너졌다. 콜로라도, 말린스, 애리조나, 피츠버그를 거쳐 2008년 9년간의 메이저리그 생활을 마무리했고, 일본 라쿠텐에서는 2군에만 머물다 방출됐으며, KBO 넥센과 기아에서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방출됐다.

팬들에게 잊히고 주변에서 끝난 선수로 무시당하던 시기에 김병현은 마지막 도전을 결심했다.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라는 궁금증을 해결하지 않고 그만두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도미니카 독립리그를 거쳐 2018년 호주 프로야구 멜버른 에이시스에 입단한 그는 9경기 1실점에 방어율 0.93을 기록했다.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공을 다시 던지게 됐고, 그제야 미련 없이 글러브를 내려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