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SUV 연대기 3 - SUV의 대중화, 크로스오버로의 대전환
오늘날 전세계의 자동차 산업에서 전통적인 승용 세단을 밀어내고 대세를 넘어 상식이 된 장르가 있다. 바로 SUV다. SUV는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Sports Utility Vehicle)의 줄인 것으로, 여행 및 레저활동에서의 활용을 염두에 둔 다목적 차량을 의미한다. SUV는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장르로, 1930년대, 픽업트럭의 적재함에 지붕을 씌우고 좌석을 넣은 형태로 만들어진 쉐보레 서버번 캐리올(Chevrolet Suburban Carryall), 1940년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전세계를 누비며 기동력을 증명한 지프(Jeep) 등으로 출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0년대 국내 SUV 세계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97년 외환위기로 인한 IMF 체제에서 벗어나고 경기가 조금씩 회복되면서 레저인구는 더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에 발맞춰 제조사들 또한 새로운 SUV와 더불어 MPV 시장도 덩달아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SUV들은 기존 정통 오프로더형 SUV의 바디-온-프레임 방식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크로스오버 SUV로의 전환기를 맞았다.
현대자동차 싼타페(2000)
앞에서 다룬 SUV들이 아직까지는 전통적인 바디-온-프레임 SUV들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승용차의 모노코크(Monocoque) 차체구조를 적용한 '크로스오버 SUV'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첫 크로스오버 SUV라고 할 수 있는 모델은 바로 현대자동차의 초대 싼타페로, EF쏘나타의 플랫폼을 기반으로 현대자동차 캘리포니아 디자인센터의 혁신적인 스타일링으로 완성되었다. 이 차는 종래의 SUV 대비 한층 편안한 온로드 주행질감과 SUV의 기능성을 양립, 출시 당시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특히 파격적인 외관 디자인은 국내외 전방위적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출시된 2000년도에 우수산업디자인(Good Design) 대통령상을 수상하기까지 이르렀다. 도심지향 소프트로더 SUV의 선두주자로 등장한 싼타페는 다양한 파워트레인과 편의사양을 갖춰,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그 이름은 지금까지 현대자동차 중형 SUV의 이름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현대자동차 테라칸(2001)
갤로퍼를 생산하던 현대정공(現 현대모비스)이 1999년 현대자동차에 흡수 합병되면서 갤로퍼의 생산라인과 설계를 손에 넣은 현대자동차는 갤로퍼(정확히는 미쓰비시 파제로)의 우수한 기반설계를 재활용, 쌍용자동차 무쏘에 대항할 수 있는 정통파 고급 SUV를 개발키로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차가 바로 테라칸(Terracan)이다. 테라칸은 본래 90년대 후반에 출시할 계획이었으나 외환위기로 인해 개발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2001년이나 돼서야 출시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갤로퍼의 튼튼하고 검증된 섀시를 바탕으로 선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으나, 쌍용자동차에서 "대한민국 1%"를 주장하며 내놓은 렉스턴에게 성능과 디자인 등에서 밀려, 크게 빛을 보지는 못한 채, 5년 남짓한 기간만 채우고 단종되고 만다.
쌍용자동차 렉스턴(2001)
지금도 회자되는 희대의 광고 카피인 "대한민국 1%"의 기원, 쌍용자동차 렉스턴은 본래 무쏘를 대체하는 차종으로 개발 및 출시되었다. 그러나 무쏘의 인기가 여전히 식을 줄을 몰랐기 때문에 쌍용자동차는 무소를 중형급으로, 렉스턴을 대형 플래그십으로 포지셔닝을 달리하여 판매했다. 렉스턴은 비록 설계사상 면에서는 바디-온-프레임 방식의 정통 SUV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컨셉트카를 방불케 하는 파격적인 외관 디자인과 더불어 체어맨을 개발한 경험을 살려서 완성된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5링크 서스펜션 적용을 통한 승차감 개선 등, 쌍용자동차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량을 투입해 완성한 역작이었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렉스턴은 훗날 프레임부터 완전히 새로 개발한 G4 렉스턴이 등장하기 전까지 장장 16년동안 자리를 지키며, 험난했던 쌍용자동차의 역사를 함께 했다.
기아자동차 쏘렌토(2002)
지금은 2세대에 해당하는 쏘렌토R이 등장한 이래 기아의 중형 크로스오버 SUV가 되었지만, 초대 쏘렌토는 명실상부한 기아의 정통 플래그십 SUV 모델이었다. 현대자동차에 인수되고 나서 자사 SUV 라인업이 스포티지 아맥스와 레토나 뿐이었던 기아차가 완전히 새롭게 내놓은 SUV 모델로, 비록 설계기반은 전통적인 바디-온-프레임 방식이기는 하지만 승용 세단 못지 않은 세련된 외관 디자인과 인테리어는 물론, 고급 승용차 뺨치는 풍부한 편의사양, 선진적인 커먼레일 연료분사 기구를 적용한 최신형의 A엔진 등에 힘입은 뛰어난 주행성능을 두루 갖춰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쏘렌토의 기반설계는 훗날 기아의 새로운 플래그십 SUV, 모하비의 밑바탕이 된다.
현대자동차 투싼(2004), 기아자동차 스포티지(KM, 2004)
앞서 등장한 초대 싼타페가 EF쏘나타를 바탕으로 개발된 중형급 크로스오버였다면, 투싼은 아반떼XD의 플랫폼을 기반으로 개발된 소형~준중형급 크로스오버 SUV 모델이다. 외관 디자인은 호평이 이어졌던 초대 싼타페의 디자인을 더욱 깔끔하고 균형잡힌 스타일로 가다듬어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우수한 주행성능과 연비, 차체크기 대비 넉넉한 공간 덕분에 가족용 자동차로도 손색 없는 구성을 가져 인기를 끌었다.
이 차는 싼타페와 마찬가지로 해외에서도 평가가 좋았으며, 심지어 같은 설계기반을 공유하는 기아 스포티지(KM)와 나란히 2006년 美 모터트렌드 트럭 오브 더 이어(Truck of the Year)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투싼의 등장은 싼타페로 인해 촉발된 크로스오버 SUV의 붐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투싼은 윗 형님인 싼타페와 형제차로 태어난 기아 스포티지(2세대, KM)과 함께 국내 SUV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오늘날의 준중형급 SUV 세그먼트를 정립하는 단초가 되었다.
쌍용자동차 카이런(2005)
쌍용자동차가 상하이자동차(SAIC)에 넘어갔었던 시절 개발된 중형 SUV 모델인 카이런은 무쏘의 플랫폼을 바탕으로 새로운 디자인의 차체와 인테리어, 그리고 강력한 성능의 XDi270 엔진, 그리고 당시 드물었던 전자식 주차브레이크와 TPMS(타이어 공기압 모니터링 시스템) 등을 탑재하는 등, 안전/편의사양 면에서도 이전 차종들 대비 한층 진보했다. 하지만 로디우스로부터 시작해 액티언으로 이어지는 괴악한 외관 디자인이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 물론 대규모 페이스리프트가 이루어진 후기형 모델은 현저히 개선된 외관을 지니긴 했지만 로디우스, 액티언 등과 함께 항상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GM대우 윈스톰(2006)
현대자동차 싼타페가 2세대로 풀체인지를 맞으며 시장을 휩쓸던 도중에 나타난 GM대우의 처음이자 마지막 독자개발 SUV, 윈스톰이 등장했다. GM대우 윈스톰은 2004년 공개한 쉐보레 S3X 컨셉트카를 바탕으로 양산화된 모델로, 승용차의 모노코크 차체구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본격적인 도심형 SUV 모델로 만들어졌다. GM대우 윈스톰은 당시 부드러운 곡선 중심의 디자인을 가졌던 싼타페와 달리, 직선 중심의 남성적이면서도 세련된 스타일링과 더불어 직접적인 경쟁차종인 싼타페에 비해 저렴한 가격과 더 충실한 편의장비를 갖추는 등, '2인자의 생존법'을 제대로 따른 판매 전략을 통해 싼타페의 가장 큰 경쟁자로 통했다. 처음으로 개발한 SUv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완성도가 뛰어났다.
현대자동차 베라크루즈(2006)
테라칸의 실패로 쓴 맛을 본 현대자동차가 절치부심으로 개발한 (준)대형급 플래그십 SUV 모델인 베라크루즈는 그동안 국내 플래그십 SUV 시장에서 상식으로 여겨졌던 요소들을 모조리 혁파했다. 그동안 국내 플래그십 SUV는 정통파 오프로더의 바디-온-프레임 기반의 후륜구동 기반 SUV가 중심이었던 반면, 베라크루즈는 처음부터 승용차의 모노코크 차체구조를 전면도입하고, 승용 세에단 버금가는 세련된 내외부 디자인과 강력한 동력성능의 3.0리터 디젤엔진을 품고 출시되었다. 베라크루즈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성능과 편의장비, 세련된 디자인으로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르노삼성자동차 QM5(2007)
2000년대 들어서까지 오직 세단 라인업만으로 운영했던 르노삼성자동차는 2007년에 들어서야 르노 콜레오스 기반의 첫 SUV 모델, QM5를 선보였다. 르노삼성은 물로느 르노 입장에서도 첫 번째 SUV 모델에 해당하는 QM5는 독특한 디자인과 구성이 특징이었다. 유럽식의 당시 처음으로 선보이는 유럽형 SUV 모델인 QM5는 현대차 투싼 정도에 해당하는 작은 크기에, 랜드로버 레인지로버에나 들어갔던 클램쉘 타입의 테일게이트를 적용하고 디자인 역시 자기만의 색채가 확실한 프랑스식 디자인으로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국내 사정에는 맞지 않는 구성과 더불어, 가격이 동급으로 취급되었던 현대 투싼이나 기아 스포티지 등에 비해 지나치게 비싸서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기아자동차 모하비(2008)
정통 SUV였던 초대 쏘렌토의 뒤를 이어 탄생한 기아의 모하비는 베라크루즈에 버금가는 덩치에 강건한 바디-온-프레임 방식으로 만들어진 모델이다. 모하비는 지금까지도 현대차그룹에서 만들어지는 SUV들 중 유일하게 바디-온-프레임 구조를 사용하는 정통 SUV 모델이기도 하다. 모하비는 베라크루즈와 동일한 파워트레인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뼈대부터 완전히 다른 SUV로, 철저한 도심형인 베라크루즈에 비해 험로주파나 견인 등, 레저용 유틸리티 차량으로서의 정체성에 훨씬 가깝다. 여기에 오피러스 등과 같이, 전용의 엠블럼에 더해 다른 기아차 라인업과는 차별화되는 고급스러운 외관과 인테리어, 우수한 정숙성을 갖춰, 고급 모델임을 강조했다.
기아자동차 쏘렌토R(2009)
정통 SUV였던 1세대 쏘렌토의 이름은 2세대로 와서는 철저하게 도심 지향의 중형 크로스오버 SUV로 이어졌다. 그리고 정통 SUV로서의 정체성은 모하비가 계승했다. 2009년 출시한 기아의 2세대 쏘렌토는 싼타페와 설계기반을 공유하는 형제차이면서도, 싼타페와는 다른 7인승 좌석 배치를 갖추는 등, 패밀리카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구성이 특징이다. 여기에 당시 국내 2리터급 디젤 엔진 중 최강의 성능을 자랑했던 R 엔진을 탑재, 국내 중형 SUV 최강의 성능까지 겸비하고, 피터 슈라이어의 지휘 하에 대대적으로 일신한 세련된 디자인을 입고 태어나, 국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쏘렌토는 동사의 MPV 카니발과 함께 패밀리카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도 그 이름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