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정착한 ‘시골 언니’들의 현실 조언… “시골살이는 사람이 전부야!”

심윤지 기자 2022. 11. 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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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X농림축산식품부X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 공동기획
전북 순창에서 열린 농림축산식품부 ‘시골언니 프로젝트’ 참가자들이 9일 순창군 적성면 ‘모두의숲’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한수빈 기자

[시골언니 프로젝트①] 아는 ‘시골언니’ 한명이 농촌에 가져 올 놀라운 변화

지난 9일 전북 순창 적성면의 한 시골마을. 차 한 대 들어가기도 비좁은 시골길에 자전거와 바이크를 탄 청년 여성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지난 5일부터 10일까지 전북 순창에서 진행되는 농림축산식품부의 ‘시골언니 프로젝트’에 참가한 이들은 자동차 소음도 고층건물도 없는 한적한 풍경을 저마다의 속도로 눌러 담았다.

1년 전 다니던 출판사를 퇴사한 곽하늘씨(33)도 그중 한 명이다. 서울의 비좁은 사무실 안에서 막연히 전원생활을 동경해왔다는 그는 ‘시골언니 프로젝트’를 소개한 기사(경향신문 9월3일자 12면)를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신청서를 썼다. 하지만 시골언니들과의 5박6일이 그에게 남긴 것은 결코 가볍지 않다.

“언니들과 섬진강변을 달리면서 ‘내가 원하던 삶이 이런 느낌이겠다’ 하는 생각이 처음 들었어요. 그전에는 ‘시골에서 살고 싶다’였다면 지금은 ‘시골에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로 바뀌었어요.”

곽씨의 마음을 바꾼 ‘시골언니’는 누구이고, ‘도시언니’들에게는 무엇을 알려준 것일까. 경향신문은 그 답을 찾기 위해 8~9일 순창에서 진행된 ‘시골언니 프로젝트’에 동행했다.

시골언니 프로젝트 참가자들이 9일 섬진강변 인근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있다. 한수빈 기자
시골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법

농식품부의 정식 사업명은 ‘청년여성 농업농촌탐색교육사업’이다. ‘탐색’이나 ‘교육’이라는 표현이 딱딱하게 들리지만, 사실 프로그램의 취지는 단순하다. 농촌 정착에 관심이 있는 청년 여성들이 ‘시골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시골에 먼저 정착한 선주민 여성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다.

시행 첫해인 올해는 현장운영기관으로 총 21개 단체가 지원했다. 1차 서면평가, 2차 현장실사, 3차 발표평가를 거쳐 생태전환마을 내일협동조합(강원 강릉), (주)자연에서찾은행복(충남 서천), 사단법인 10년후순창(전북 순창), 협동조합청풍(인천 강화), 고래실(충북 옥천), 덕산누리협동조합(충북 제천), 울산생태문화교육협동조합(울산 울주), 청년이그린협동조합(경북 상주) 등 총 8곳이 최종 선정됐다.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지역 특색이나 운영기관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강원 강릉팀은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안하는 ‘파머컬처 전환마을 운동’을 소개하고, 충북 옥천팀은 옥천신문 중심 네트워크를 활용해 지역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기록하는 식이다.

전북 순창팀의 캐치프레이즈는 ‘순창언니들과 함께하는 농촌생활 뽀개기’였다. 귀농·귀촌인들의 끈끈한 네트워크라는 강점을 내세웠다. 농사를 짓고, 빵을 굽고, 술을 빚고, 공예를 하고, 글을 쓰는 언니들의 다채로운 일상을 보여주게다는 것이다. 프로그램 기획을 맡은 ‘시골언니’ 김현희씨(34)는 “청년들이 관심 가질 만한 분야를 최대한 다양하게 선정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전북 순창에서 진행되는 시골언니프로젝트 참여자들이 10일 ‘언니와 하루 (죽공예) 체험 활동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나는 손만 보면 이미 장인이야. 다 트고 난리 났어.”

8일 오후 구림작은도서관 한쪽에선 대나무로 냄비받침을 만드는 죽공예 수업이 한창이었다. 나란히 앉은 도시언니 4명이 선생님 서경선씨(48)의 시범에 따라 쉴 새 없이 대나무를 쪼개고 구부리고 꼬았다. 귀농 5년차인 서씨(48)는 순창군 귀농귀촌종합지원센터에서 죽공예 수업을 처음 듣고, 이를 생업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이렇게 전문 죽공예가가 된 이들이 순창에만 20명이 넘는다고 했다.

정민영씨(38)에게 선생님 서씨의 존재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도 같았다.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고 싶은데, 도시에선 내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순창에 와서 죽공예를 처음 배웠다고 하시는거에요. 공예가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전통 기술도 계속 계승해나가고 계시고요. 농촌에선 이런 삶도 실현할 수 있겠다, 꿈꿔보게 됐어요.”

전북 순창에서 진행되는 시골언니프로젝트 참여자들이 10일 ‘언니와 하루 (음식) 체험 활동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는 순창 쌀가루를 이용한 제빵 수업, 순창 고추장과 텃밭 재료를 활용한 요리 수업 등이 진행됐다. 정윤주씨(33)는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순창의 뒷골목을 산책하고 글을 써보는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작가님 말씀에 따르면 ‘어떤 장소에 정이 드는 순간은 의외성을 발견했을 때’래요. 이날 저희가 한 작업은 순창의 의외성을 발견하는 것이었어요. 각자 발길 닿는 대로 골목길을 걷고, 기억에 남는 장소들을 공유했는데, 참가자들의 답변이 모두 달라 인상적이었어요.”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귀농·귀촌을 고민하는 도시언니들의 제1 관심사는 단연 생계였다. 시골언니 프로젝트에 참여한 순창 여성들은 대부분이 ‘n잡러’였는데, 여기에는 직업 한두 개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현실이 있다. 시골언니들은 집이 물에 잠기거나, 불에 타거나, 돈이 없어 식료품을 사지 못했던 경험까지 가감없이 털어놓았다.

도시언니들은 시골언니들의 이러한 솔직함 덕에 귀농·귀촌을 진지한 삶의 선택지로 여기게 됐다고 했다. 곽씨는 “농촌 생활에 어려움이 없지는 않지만, 자신이 선택한 삶이기에 그 어려움까지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시골 언니들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전북 순창에서 진행되는 시골언니프로젝트 참여자들이 8일 ‘시골언니들의 일터 체험’ 일정을 마무리한 후 소감을 나누고 있다. 한수빈 기자
연결이 순창을 바꾼다

기존의 귀농·귀촌 교육 사업은 ‘시골에서 한 달 살기’ 같은 체험형이거나, 이미 귀농을 결심한 이들에게 농기계·창업 지원금을 전달하는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귀농을 결심하기 ‘전 단계’의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해당 지역에 먼저 정착한 이들의 조언이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귀농인 교육 활동을 오래 해왔던 이유미씨(39)는 ‘시골언니’ 한 명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는지를 경험으로 깨달았다고 했다. 그가 순창이라는 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도 이곳에 먼저 정착한 ‘언니들’ 덕분이었다.

“많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인구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더 많은 귀농·귀촌 인구를 유입시키려 해요. 하지만 ‘돈이나 기계를 줄테니 귀농하라’는 정책 방향은 한계가 뚜렷해요. 연고가 없는 청년들일수록 해당 지역을 자주 오가며 ‘정착해도 괜찮겠다’는 확신을 서서히 쌓아가야 하죠.”

전북 순창에서 진행되는 시골언니프로젝트 참가자들이 9일 오전 채계산 출렁다리를 산책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농촌의 가부장적 분위기로부터 소외될 수 있다는 두려움은 청년 여성들이 농촌 진입을 망설이는 가장 큰 장벽이다. 하지만 장벽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마음 맞는 젊은 여성들의 연대’는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며 농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부산 출신인 장희정씨(38)가 순창에서 쌀빵을 만들게 된 건 ‘씨앗모임’에서 만난 ‘언니들’ 때문이었다. “어느날 제가 좋아하는 언니 한 분이 ‘쌀이 남아돈다’며 우는거에요. 좋은 토종 씨앗을 골라 정성스럽게 농사를 지어도 대농·기업농 중심의 구조에선 이를 팔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거든요. 어떻게 하면 언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쌀가루를 이용해 떡 대신 빵을 만들어보게 됐죠.”

순창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순창현대죽예회’, 전국 가양주 대회 수상자를 배출한 ‘순발력’은 모두 취미를 기반으로 한 동아리에서 출발했다. 귀농 16년차 양은선씨(53)는 “순창 지역 여성들이 끈끈해질 수 있었던 건 생활에서의 노하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힘든 일을 나누고 서로를 지켜주는 동료들이 있기에 성공적인 정착이 가능했던 것 같다”고 했다.

장희정씨(왼쪽에서 세번째)가 순창에서 쌀빵 만드는 일을 하게 된 것은 ‘씨앗모임’에서 만난 ‘언니들’ 때문이었다. 한수빈 기자

시골언니들은 도시언니들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며 정성껏 환대했다. 청년 여성 한 명이 농촌에 가져올 변화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김현희씨는 농식품부의 시골언니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당장 농촌 이주 계획이 없더라도, 언젠가 제 이웃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고 싶었어요. 지역에서 건강하게 정착하고 싶은 젊은 청년 여성들과 연결될 기회가 생각보다 많지 않거든요. 중앙정부 차원에서 이러한 정책이 나와 정말 반가운 마음이에요.”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해서

시골언니 프로젝트에 참가한 여성들에게 귀농·귀촌은 단순히 거주 공간을 도시에서 시골로 옮기는 문제 이상이었다. 저마다 고민의 결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들은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한’ 삶의 방식을 찾고 싶어 했다.

대안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며 농촌 정착을 준비 중인 곽진숙씨(33)는 “쓰레기를 만들지 않고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고 싶었지만 도시에서는 한계가 분명했다”며 “시골언니 프로젝트를 통해 제가 원하는 삶의 실현 가능성을 확인하게 됐다”고 말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번아웃’을 겪었다는 한 참가자는 “농촌은 도시보다 인구가 적고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 ‘나’를 발휘할 기회가 더 많은 것 같다”고도 했다.

도시보다 끈끈한 공동체는 농촌살이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정민영씨는 “한 시골언니가 어느 날 옆집 할머니가 자신의 집 거실에 들어와 앉아있었던 경험을 이야기해줬다”며 “농촌 이주를 고려하면서도 사생활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마을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됐다”고 했다. 지방자치단체 지원이 귀농·귀촌인들에게 집중되면서 선주민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역시 넘어야 할 산이다.

양씨는 “선주민들 입장에서 귀농인들에게 경계심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경계심을 이해하고 설득하는 것이 농촌으로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이 싫다는 이유로 도시를 떠나온 이들은 시골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며 “시골 살이를 결심했다면 공동체에 들어갈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골에 온 사람과 원래 있던 사람 모두 상처를 받는다”고 조언했다.

전북 순창시골언니프로젝트 참가자들이 9일 ‘모두의 숲’에서 열린 파티에서 바비큐를 먹고 밴드 공연을 감상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일정 마지막은 ‘모두의숲’에서 진행한 바비큐 파티였다. 마트에서 사온 고기와 맥주가 ‘메인’이었지만 한쪽에 놓인 시골언니들이 직접 만든 채식 음식과 전통술, 직접 따온 텃밭 야채들이 파티를 다채롭게 했다. 식사가 끝난 후엔 마을 사람들이 결성한 ‘잉여밴드’의 공연이 이어졌다.

목포에서 지역 관련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는 임수연씨(27)는 “지역에 새로운 문화를 만들겠다며 목포로 내려오는 청년들이 없지는 않지만 선주민과 문을 닫고 지내는 경우가 많아 아쉬웠다”며 “해당 지역에 연고가 없더라도 선주민과 잘 지내는 귀농·귀촌인들의 이야기를 정말로 듣고 싶었는데, 오늘 그 가능성을 실제로 확인한 느낌”이라고 했다.

시골언니 프로젝트가 얼마만큼의 귀농·귀촌 인구를 끌어들일지는 알 수 없다. 성과를 ‘계량화’하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숫자로 말할 수 없는 변화가 농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파티를 즐기는 도시언니들을 지켜보던 정필숙씨(56)가 이렇게 말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다들 지치고 힘든 상태여서 마음이 아팠는데 지금은 얼굴이 좋아 보여 다행이에요. 이 시간들이 버팀목이 됐으면 좋겠어요.”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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