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책을 덮을때…일본은 이야기를 폈다

유주현 2026. 2. 1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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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뜨는 출판왕국
도쿄 시부야에 가면 한 달 5000엔(약 4만7000원)으로 서점 주인이 될 수 있다. 쉐어하우스 같은 공동 서점에서 책장 한 칸을 임차해 내맘대로 콘셉트를 정해 책을 팔 수 있다. 도서강국 일본답게 사람들이 책을 사다 못해 이젠 팔겠다고 나선 것일까. 알고 보면 얘기가 좀 다르다. 일본에서도 서점은 멸종 위기라고 한다. 한 해에만 문 닫는 서점이 1000여 곳에 이르고, 지방 기초자치단체 4곳 중 1곳은 서점 제로 상태다. 유통망이 이런데 출판사들은 오죽할까 싶지만, 의외로 침체된 분위기가 아니다. 업계 1위 가도카와는 5년 전 도쿄 외곽에 거대한 ‘가도카와 무사시노 뮤지엄’을 열고 도서관과 애니메이션 뮤지엄, 아트갤러리가 빼곡한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몄다. 만화, 애니메이션 등 대중문화의 산실로 막강한 IP를 보유한 전통의 출판사가 ‘일본 최대 팝컬처 발신기지’를 모토로 콘텐트를 홍보하고, AI서점 등 디지털 실험까지 하니 ‘이웃집 토토로’의 배경인 한적한 시골마을이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디지털화로 인한 출판업 위기는 세계적 현상이다. 하지만 전통의 출판대국 일본은 그 대처법을 찾은 듯하다. 강태웅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가 일본 출판업계를 살펴봤다.

지난 주 발표된 2026 책방대상 후보작들이 주요 서점 매대에 진열되어 있다. [사진 강태웅]
지난 6일 일본에서는 ‘2026년 책방 대상(本屋大賞)’ 후보작 10권이 발표됐다. 한국에서도 인기 높은 미나토 가나에의 미스터리 소설 『새벽별』, 현직 의사 작가 나쓰카와 소스케의 메디컬 휴먼드라마 『에피쿠로스의 처방전』 등 가족의 다양한 형태나 사회적 고립, 창작업계 자체를 다룬 작품들이 눈에 띤다.

일본에 수많은 문학상이 존재하지만 ‘책방 대상’이 특별한 이유는 선정위원이 소설가나 평론가가 아닌 전국의 책방 점원들이라서다. 앞으로 두 달간 1차 투표에 참가한 점원 600~700명이 10권을 모두 읽고 2차 투표를 해서 4월 9일 최종 결과를 발표한다. 대규모 집단평가를 거친 ‘책방 대상’의 책들은 일단 읽는 재미가 보장된다. 10권의 후보에만 들어도 판매 부수가 몇 배 늘어나니 ‘책방 대상’ 후보작 발표는 일본 서점 업계가 학수고대하는 날이다.

업계, 생성형 AI에 경고 “저작권 침해 엄벌”
‘책방 대상’은 디지털화로 출판시장 축소가 감지되던 2004년 서점업계의 자구책으로 생겨났다. 문예잡지에 실린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다른 문학상에 비해 단행본을 대상으로 하니 즉각적인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 일본 지하철에 책을 읽는 사람이 많다는 말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요즘 지하철에선 일본인들도 죄다 스마트폰에 빠져 있고, 이런 일상의 변화는 잡지시장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일본은 ‘잡지 왕국’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잡지가 매주 쏟아져 나왔고, 출판시장도 단행본이 아니라 잡지가 이끌어왔다. 출판시장이 최절정기이던 1996년, 단행본 시장의 1.5배에 달하는 1조5600억 엔의 매출을 자랑하던 잡지 시장이 2024년에는 4119억 엔으로 4분의 1토막이 났다. 단행본 매출도 1996년 1조900억 엔에서 2025년 5900억 엔으로 반토막 신세다.

시부야의 초미니 공동서점. [사진 강태웅]
서점도 문을 닫았다. 2003년 2만 곳이 넘던 서점이 2024년에는 1만 곳만 남았다. 그런데 요즘엔 독특한 서점들이 눈에 띤다.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는 작은 책방들이다. ‘초미니 공동서점’도 늘고 있다. 매장 임대료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책장의 한 단만 빌려 운영하는 형태다. 공동서점에 놓여있는 책장을 들여다 보면, 한 단 한 단 조그맣게 각기 다른 서점명이 적혀있다. 그 단에 어떤 책을 어떤 방식으로 진열할 지는 주인 마음이다. 한 달에 5000엔 안팎의 비용을 지불하면 누구라도 서점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난해 진보쵸에서 열린 K-BOOK 페스티벌. 나태주 시인 등이 초대됐다. [사진 쿠온출판사]
새로운 독자층 확보에도 열심이다. 한국 책 번역 열풍도 그 일환이다. 요즘 서점들은 경쟁적으로 한국 책 코너를 열고 있다.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이후 불이 붙었는데, 새로운 시장이 생기는 셈이니 한국 책 소개에 매우 적극적이다. 일본 고서점가 진보쵸(神保町)에서 2019년부터 열리고 있는 ‘K-BOOK 페스티벌’이 해를 거듭할수록 성대해지는 이유다.

출판업계는 어떨까. 2001년 4424개였던 출판사가 2020년에는 2907개로 줄어들었지만, 대형 출판사들은 여전히 굳건하다. 고단샤(講談社), 슈에이샤(集英社), 가도카와(KADOKAWA), 쇼가쿠칸(小学館) 등 4대 출판사는 계속해서 규모를 키워왔고 매출 1위 가도카와와 2위 슈에이샤는 연매출 2000억 엔(약 1조8900억원)이 넘는다. 젊은이들이 취업하고 싶은 기업으로도 출판사가 인기다. 일본 취업정보회사인 가쿠조의 조사에 따르면 ‘2025년 졸업하는 대학생들이 들어가고 싶은 기업’ 10위 안에 4대 출판사가 모두 포함됐었다.(고단샤 2위, 슈에이샤 3위, 가도카와 7위, 쇼가쿠칸 9위)

젊은이들이 출판사를 선호하는 이유는 IP(Intellectual property·지식재산권) 때문이다. 일본의 출판사는 소설이나 만화를 원작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게임 제작에서 중심 역할을 한다. 물론 소극적인 원작 사용권 판매는 원래 있었지만, 21세기 들어 출판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출판사는 잡지나 단행본의 디지털화는 물론 IP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길을 찾아 나섰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제작에 직접 투자하거나 아예 제작을 출판사가 주도적으로 기획하기도 한다.

일본영화 역대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 ‘귀멸의 칼날’ 극장판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제작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투자자를 모집한다. 영화라면 영화회사와 광고회사가 손을 잡고, 애니메이션이라면 방송국과 애니메이션 제작사 그리고 완구 제조업체가 들어간다. 여기에 출판사가 투자금을 들고 참여한다. ‘귀멸의 칼날’ 극장판 제작위원회에는 특이하게 방송국이 빠지고, 애니플렉스(애니메이션 기획·유통), 유포테이블(ufotable·애니메이션 제작사), 그리고 원작 만화를 출간한 슈에이샤가 들어갔다. 출판사는 투자금 회수를 못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떠안지만, 그만큼 얻는 수익도 커질 수 있다. 또 애니메이션 제작을 진두지휘하는 중심에 출판사가 자리하니, 문화산업 최전선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출판사는 꿈의 직장이다. 사실 출판사의 이런 행보는 마블(Marvel)에서 시작됐으니 낯선 것도 아니다.

시부야 파르코 백화점의 점프샵. [사진 강태웅]
슈에이샤가 총 매출의 3분의 1일을 인쇄물이 아닌 IP를 이용한 사업에서 올리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슬램덩크’ ‘드래곤볼’로 대표되는 만화잡지 주간 소년 점프를 발행하는 출판사로 지금도 ‘원피스’를 연재하며 매주 100만 부 이상을 찍어내고 있다. 자사 원작 만화의 굿즈 판매도 상당액을 차지한다. 자사 캐릭터를 이용한 굿즈 매장 ‘점프숍’을 2004년 론칭해 15개 점포를 운영 중인데, 최근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에서도 팝업스토어가 2주간 열려 팬들이 몰렸다.
가도카와 무사시노 뮤지엄의 책장 극장. 책을 새로운 감각으로 느끼게 만든 공간이다. [사진 강태웅]
출판업계 1위인 가도카와는 디지털 세계에 빠진 현대인에게 책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가도카와 무사시노 뮤지엄을 세웠다. 세계적 건축가 구마 겐고는 이 뮤지엄을 “원시인의 동굴과 같이 만들었다”고 했다. 세계를 이해하는 아홉 개의 주제 별로 놓여있는 책 터널을 지나면 높이 8m의 ‘책장 극장’이 펼쳐지는데, 정말 원시인의 동굴벽화를 보듯 책을 새로운 감각으로 느끼게 된다. 가도카와는 라이트 노벨(Light Novel)이라는 만화책과 소설의 중간에 해당하는 장르를 개척하기도 했다. ‘책장 극장’ 밑 층에는 3만 권 이상의 라이트 노벨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이 있다. 내부 서점인 ‘더 다빈치 스토어’는 기간 한정으로 AI와 프로젝션 맵핑 등의 기술을 활용해 책의 발견성을 높이는 실험적인 공간으로 운영되는 등 다양한 출판 트렌드도 뒷받침하고 있다.

스크린·테마파크 등 유연한 생존 전략 주목
IP 활용을 앞세우는 출판업계에 당면한 위기는 다름 아닌 생성형 AI다. 무슨 책을 쓸지 모르지만 책을 내고 싶은 사람에게 AI가 저술부터 편집까지 모두 도와주는 출판사가 2023년 등장했다. 문제는 AI가 책 작업 중 다른 사람의 저작권을 도용하고 있는지, 애당초 그러면 안 된다는 윤리 인식을 가지도록 프로그램 되었는지 여부다. 지난해 10월 가도카와 등 대표적인 출판사들은 일본만화가협회와 함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생성형 AI가 창작활동에 사용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겠지만, 저작권 침해 행위가 발생했을 때 절대 용인하지 않고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이다.

필자는 지난달 교토에 있는 275년 역사의 서점 ‘치쿠호 서루(竹苞書樓)’를 찾아가 봤다. 고서와 함께 목판화인 우키요에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곳이다. 고흐에게도 영향을 준 히로시게의 우키요에를 손에 들자 사장이 “그건 모두 초판(初版)”이라고 자랑했다. 초판이 귀한 건 목판에 거듭해서 찍어낼수록 마모와 변형이 생겨서다. ‘출판(出版)’이란 한자 그대로 판을 내는 행위, 즉 목판이나 활자판에 찍어 인쇄물을 만들어낸다는 의미다. 판권(板權)은 판이 누구 소유냐를 가리키고, 저작권과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됐다. 이제 대형 출판사들에게 ‘출판’은 인쇄물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 더해 판권을 다양하게 활용한다는 뜻이 강해지고 있다.

일본의 출판산업은 종이책을 파는 단계에서 ‘이야기(IP)’를 파는 단계로 진화했다. 나무 판(板)에 새겨 찍어내던 과거의 방식은 이제 스크린과 테마파크, 굿즈라는 새로운 ‘판’으로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 책이 안 팔려 걱정이라면, 텍스트의 위기 속에서도 이야기라는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 시대에 맞춰 유연하게 그릇을 바꿔 담는 일본의 생존 전략을 주목할 만하다.

강태웅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울대와 히토츠바시대, 도쿄대에서 일본영상문화를 연구했다. 현재 도쿄이과대학 객원교수이다. 저서로는 『이만큼 가까운 일본』 『전쟁과 일본영화: 전쟁 때 일본인은 어떤 영화를 만들고 보았나』 등이 있다.

유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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