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아섭이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기록’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다. KBO 통산 최다 안타 2618개. 이 숫자 하나만 놓고 보면 설명이 필요 없는 선수다. 한 시대를 대표한 리드오프였고, 어느 팀에 있든 타선의 흐름을 잡아주는 존재였다. 그런데 2026년 1월, 이 리빙 레전드는 아직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못한 채 FA 시장의 끝자락에 서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장 밖으로 밀려난 모습에 가깝다.

이번 손아섭의 겨울이 유난히 길어진 이유를 단순히 “나이가 많아서”, “장타력이 떨어져서”라고 정리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실제 성적을 보면 여전히 1군에서 쓸 수 있는 선수다. 2025시즌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된 이후에도 111경기에 출전해 107안타를 쳤고, 출루율은 0.352였다. 홈런은 1개에 불과했지만, 콘택트와 선구안은 여전히 리그 평균 이상이었다. ‘망가진 베테랑’과는 거리가 멀다.
문제는 실력이 아니라 구조다. 지금 KBO FA 시장은 과거와 완전히 다른 기준으로 돌아간다. 예전에는 통산 기록과 이름값이 계약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면, 지금은 “이 선수가 내년, 그리고 2~3년 뒤에 팀에 어떤 효율을 주는가”가 최우선이다. 손아섭은 바로 이 지점에서 애매한 위치에 놓였다.

한화의 상황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한화는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강백호를 영입하며 사실상 지명타자 자리를 고정했다. 여기에 노시환의 비FA 다년 계약이 최우선 과제로 올라가 있고, 내부 FA인 김범수 정리도 남아 있다. 구단 운영 순위에서 손아섭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렸다. 구단이 손아섭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쓸 수 있는 자리와 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이다.
그래서 한화는 이례적으로 사인 앤드 트레이드 카드까지 꺼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차례나 조건을 낮췄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보통 이런 단계까지 가면 어딘가 한 팀은 움직이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끝내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다. 여기서 많은 팬들이 의문을 품는다. “손아섭은 C등급 FA인데, 왜 아무도 데려가지 않느냐”고.

C등급이라는 말은 듣기에 좋아 보인다. 보상선수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7억 5000만 원이라는 현금 보상금이 붙는다. 요즘 구단들은 이 돈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는다. 단순히 연봉 문제를 넘어서, 로스터 한 자리를 차지하는 비용, 젊은 선수의 기회를 줄이는 기회비용까지 함께 계산한다. 베테랑 외야수에게 그만한 비용과 출전 시간을 동시에 보장할 수 있는 팀은 많지 않다.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은 ‘출전 보장’이다. 손아섭에게 이번 FA는 단순한 계약 문제가 아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KBO 최초 3000안타. 지금까지 2618안타를 쌓았고, 382안타가 남아 있다. 현실적으로 최소 4시즌 이상 꾸준히 타석에 들어서야 가능한 숫자다. 단년 계약, 백업 역할, 플래툰 기용으로는 이 기록에 도전조차 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구단과 선수의 시선이 엇갈린다. 구단은 “값을 낮추면 데려올 수 있는 베테랑 보험”을 원하지만, 손아섭은 “타석이 보장된 마지막 도전”을 원한다. 연봉을 깎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앞으로 얼마나 꾸준히 기회를 받을 수 있느냐는 약속이다. 이 약속을 해줄 수 있는 팀이 거의 없다는 점이, 지금의 교착 상태를 만들고 있다.
시장 분위기도 손아섭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구단이 리빌딩 또는 세대교체를 선택했고, 샐러리캡 운용에 극도로 보수적이다. 시즌 초반부터 확실한 ‘윈 나우’ 버튼을 누른 팀이 아니면, 베테랑 외야수를 위해 모험을 걸 이유가 없다. 그래서 키움 이적설, 깜짝 영입설 같은 이야기들이 돌았지만, 정작 현실적인 움직임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손아섭이 맞닥뜨린 현실은 냉정하다. 기록은 레전드지만, 자리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손아섭 개인의 실패라기보다, KBO 리그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에 가깝다. 지금의 시장은 과거의 공로보다 미래의 효율을 본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손아섭은 ‘아직 쓸 수 있는 선수’이지만 ‘투자하기엔 조심스러운 선수’가 되어버렸다.
앞으로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한화에 단년 계약으로 남아 제한된 역할 속에서도 시간을 벌거나, 시즌 중 변수와 기회를 기다리는 길이다. 어느 쪽이든 쉽지 않은 선택이다. 다만 분명한 건, 손아섭이라는 이름의 가치는 계약서 한 장으로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팬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이 리빙 레전드가 기록의 끝을 향해 달릴 수 있는 무대를, 조금만 더 허락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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