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광의 독일 작가 사랑이야기]
20세기초 독일어권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고독과 방랑, 장미의 시인’으로 불리는 릴케는 괴테와 하이네 이후 독일어권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독일어뿐 아니라 프랑스어로도 시를 썼는데, 유명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금세공 장인의 솜씨로 글을 빚는 언어의 대가’라고 릴케에게 찬사를 보낸다.
릴케는 시인을 보이지 않는 것을 모아들이는 꿀벌 같은 존재로 보았다. 릴케의 원래 이름은 ‘르네(René)’였는데 운명적 연인 루 안드레아스-살로메(Lou Andreas-Salomé, 1861~1937)의 제안을 받아들여 ‘라이너(Reiner)’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는 루 살로메의 도움을 받아 조악한 필체도 오랜 연습 끝에 바꾸었다.
릴케는 요제프 릴케(1839~1906)와 조피 엔츠(1851~1931) 사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열망하던 군인의 길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급 철도원이 되었다. 군대의 복무규정 같은 것에만 익숙한 채 고지식했던 아버지는 사회생활에 서툴렀다. 동료들은 상관에게 보고할 문서에 외국어를 집어넣어 아버지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릴케는 부유한 공장주의 딸이었던 어머니의 강요로 육군 군사학교에 들어갔지만 몸이 약하고 예민해 잘 적응하지 못해 퇴교하고 말았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허문다고 생각했고, 40세가 넘은 나이에도 어느 날 어머니가 나타난다고 하니까 ‘꾸지람을 들은 아이처럼’ 공포에 질려 안절부절 못했다고 한다.

14살 연상 루 살로메를 품에 안다
1897년 스물 두 살의 릴케는 독일 뮌헨에서 작가 야코프 봐서만(Jakob Wassermann. 1873∼1934)의 집에서 러시아 출신의 작가 루 안드레아스-살로메를 만나 이내 사랑에 빠진다. 세기적인 사랑의 시작이었다. 그때 릴케는 22세, 루 살로메는 36세로 니체의 짝사랑이기도 했다. 루 살로메가 동양학자 안드레아스와 결혼 아닌 결혼을 한 지 10년째 되던 해였다. 지적인 루 살로메는 자기 확신과 자긍심이 강한 여자였다. 릴케는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그녀를 만나면서 어머니의 억지스러운 강압으로부터 해방된 기분을 느꼈다.

릴케는 루 살로메를 알고 난 다음 환희에 차 노래했다. “어떤 사람도 나보다 먼저 그 길을 밟지 못했으리. 나는 그대 안에 있노라.” 그동안 성적으로 미숙했던 루 살로메의 몸이 비로소 눈을 떠서 진정한 여인이 된 것이다. 니체를 만나던 시기만 해도 루 살로메는 육체에 관심이 없는 소녀에 불과했다. 남편 안드레아스와도 평생 관계를 갖지 않아 남편은 하녀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았고, 루 살로메는 그 아이를 정성껏 돌보았다.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와 조피의 관계처럼 루 살로메는 뮤즈이면서 릴케의 시를 냉정하게 평가한 스승이었다. 그녀는 행복과 함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수수께끼 같은 생 속에서 자신을 불태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여자였다. 두 사람의 열정적인 관계는 1900년까지 지속되었다.
릴케는 그녀와 함께 한 곳을 따뜻한 고향처럼 느꼈다. 둘이 헤어진 후에도 생이 끝날 때까지 루 살로메는 그의 가장 중요한 친구이자 상담자였다. 1912~1913년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게서 배운 정신분석학 지식과 경험이 그녀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1937년 루 살로메 사망 추모사에서 “그녀는 삶에 아주 무기력했던 위대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뮤즈이자 자상한 어머니였다”고 말했다.
사랑에 빠진 릴케는 열정에 불타는 시 수십 편을 써서 루 살로메에게 보냈는데, 그녀는 릴케의 편지를 남편이 볼까 봐 시들이 쓰인 종이를 찢어버렸다. 그렇지만 릴케는 그 시들의 복사본을 남겨두었다. 루 살로메를 위해 쓴 시들은 후일 릴케의 시집에 고스란히 실렸다.
릴케는 루 살로메에게 ‘아가서’의 한 대목을 즐겨 낭송해주곤 했다.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
그대는 내 마음 사로잡아
우리는 그대 눈 속에 하나가 되고
그대의 목걸이로 하나가 된다.
그대의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천재 시인 릴케 역시 니체처럼 루 살로메의 덫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그는 루 살로메와의 사랑의 감정을 노래하면서, 끝없는 헌신적 자세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표출한다.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난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난 당신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꺾으세요. 난 당신을 내 마음으로 잡을 겁니다.
내 심장이 멈추게 하세요. 그러면 내 머리가 고동칠 겁니다.
내 머리에 불을 지르면, 그때는 내 핏속에 당신을 실어나를 겁니다.”
『기도시집』에 수록된 이 처절한 시는 「내 눈을 감기세요」(Lösch mir die Augen aus)라는 릴케의 시이다. 이 시에는 루 살로메를 향한 가없는 사랑이 들어 있다. 릴케가 애절하게 갈구하는 ‘당신’이 바로 루 살로메다.

러시아의 영혼에 감염되다
1899년 4월 25일부터 6월 말까지 릴케는 루 살로메 부부와 함께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러시아 방문에 나선다. 러시아라는 나라와 국민, 그리고 무엇보다 ‘러시아의 영혼’은 그에게 큰 인상을 남긴다. 그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성지 순례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톨스토이, 화가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 일리야 레핀 등을 만나서 메말랐던 정신적 토양에 새로운 양분을 공급받는다.
그 후 1900년 5월부터 8월까지 릴케는 두 번째 러시아 여행길에 올랐다. 꾸준히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화를 익힌 릴케는 루와 단둘이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뿐 아니라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녔고 볼가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광활한 대지의 러시아 풍경은 인간이 그 앞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창조의 원초적 형상이었다. 릴케는 러시아정교회의 부활 축제와 이를 주관하는 러시아 민중의 놀라운 힘에 큰 감흥을 받았다. 또한 엄격한 도덕주의자 톨스토이와 영혼의 탐구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내면세계를 깊이 파고들어 잠자고 있던 그의 심성을 새롭게 일깨워준다. 삶의 본질을 체득하게 된 릴케는 이제 창작 행위에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집착증, 히스테리...틀어지는 관계
릴케와 루 살로메는 두 번째 러시아 여행때부터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 여행에 그녀의 남편 안드레아스는 동행하지 않았다. 감수성이 뛰어난 릴케는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였지만, 인간적으로는 매우 심약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그는 주변의 사소한 소음이나 냄새에도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의 하루하루는 폭탄을 안은 듯 위험했다. 릴케는 점점 히스테릭해졌고 집착적인 행동을 보였다. 루 살로메는 릴케의 이러한 점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그녀에게는 자신을 숭배하는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당신의 아내였던 이유는 당신이야말로 내게 유일하게 실존하는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주제로 쓴 릴케의 시들과 편지를 받은 루 살로메는, 릴케에게 헤어지자는 내용의 짤막한 답장을 보내고 죽는 날까지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 릴케는 루 살로메의 단호한 이별 통보를 아무 저항없이 받아들였다. 루 살로메에게 차이고 나서 그는 니체처럼 정확히 아홉 달 뒤 걸작 『형상시집』을 완성했다.
클라라와 결혼했지만...
그해 가을, 러시아 여행에서 돌아온 릴케는 북부 독일의 화가촌 보르프스베데에 있는 하인리히 포겔러를 방문한다. 그곳에서 화가 파울라 베커(Paula Becker)와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Clara Westhoff, 1878∼1954)를 알게 된다. 릴케는 처음에 금발의 파울라 쪽에 마음이 끌렸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다음해인 1901년 4월 28일 브레멘에서 건장하고 담대하며 활달한 클라라와 “서로의 고독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자”면서 결혼했다. 그녀는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제자 겸 비서였다.
그해 말 딸 루트 릴케(1901~1972)가 태어났다. 생애 처음으로 정착지가 생긴 순간이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생활은 아니었고 둘은 얼마 후 따로 살게 된다. 릴케에게 혼인생활은 두 개의 고독을 존속시키고 키워가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가정을 가지면서 릴케는 정신적으로 안정되었고, 루 살로메와의 관계도 회복했다. 그 후 둘은 평생 친구로 지내게 된다.
릴케는 한 곳에 정착해 사는 시민적인 가정생활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1902년 8월 말, 그는 아내의 스승인 로댕의 전기 집필을 위해 파리로 떠난다. 『말테의 수기』에서 보듯이 릴케가 파리에서 보낸 첫 시기는 힘들었다. 파리에서 부딪힌 비참한 현실이 그의 마음에 충격으로 다가오자 그는 오직 시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려 했다. 릴케와 클라라의 결혼 생활은 평탄할 수 없었지만 평생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두 사람은 결혼한지 1년이 되지 않아 예술가로서 직업적 연대감을 가지고 서로를 독려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같이 살기 보다는 같은 구역이나 같은 건물에 살면서 따로 거처를 갖고 자신의 예술을 위한 시간을 보냈다. 예술을 위해 삶을 버리고,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을 피하려는 자세였다. 현실 생활에 대한 책임 의식이 부족했던 릴케로서는 일상적인 일을 쉽게 감당할 수 없었다. 가족을 생각해서 돈을 벌려고 강연도 하고 글도 많이 썼지만 살아가는데애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툭하면 재정적 문제에 시달렸고, 의뢰받은 작품을 통해서만 겨우 그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었다. 결혼 이후 릴케는 창작 부진에 빠져 이렇다 할 업적을 내지 못했다.

죽어가는 릴케를 외면한 루 살로메
릴케는 백혈병으로 임종하기 직전, 루 살로메에게 편지를 보내 그녀의 방문을 애절하게 요청했다. 루 살로메는 답장을 보냈지만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정신분석가로서의 글이었다. 그녀는 릴케의 병이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고 오해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위안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라며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면서 오지 않는 루 살로메를 애타게 기다리던 릴케. 그는 죽는 순간에도 루 살로메를 잊지 못했다. 그는 이 말을 남겼다. “나의 어떤 점이 루 살로메를 실망시켰는지 물어봐주시오.”
릴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루 살로메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뼈저린 회한에 빠졌다. 루 살로메는 릴케와 헤어진 후 여러 연인과 자유분방하게 교제하면서 새롭게 눈뜬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항상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고뇌에 시달렸는데, 근본적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 살로메가 프로이트 문하에 들어간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프로이트는 말년에 루 살로메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루 살로메처럼 그토록 빠르고 훌륭하며 완벽하게 나를 파악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녀를 악마같다고 한 니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 홍성광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독문학박사로, 독일 문학 및 철학 관련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실러의 『도적들』,『간계와 사랑·빌헬름 텔』,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소송』,『변신 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