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노래가 품은 역사]
①편에 이어
“박종철 사건 조작” 감옥에서 날린 ‘비둘기’
그런데 박종철 사망 후 부검을 실시해 본 결과 시신은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 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당시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국민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 시위를 하기도 했다. 결국 고문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전두환은 "개헌 논의는 곧 있을 서울올림픽 끝나고 하자"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묵살했다. 국민들의 민심은 격앙되었다. 1985년부터 야당인 신한민주당(신민당)은 대통령 간선제안(案)에 대해 ‘헌법 개정 1000만인 서명 운동’을 추진하는 등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에서도 이를 무시할 수 없어 대통령 간선제안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던 시점이었다.
민정당과 신민당 두 당이 제시한 개헌안의 내용은 매우 달랐다. 여당인 민정당은 의원내각제를 주요한 내용으로 삼은 반면, 야당인 신민당은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했다. 야권의 기세가 올라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 직선제 선거가 실시될 경우 정권교체 가능성이 크다고 본 여권에서는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이 양분되는 의원내각제안을 추진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민당 총재 이민우가 의원내각제 추진에 호응하는 듯한 ‘이민우 구상’을 발표하면서 신민당은 분열한다. 결국 신민당 주류인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가 일거에 탈당하여 새로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이런 와중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되었고 고문경찰은 모두 5명이었다”는 내용을 폭로하자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높아졌다.
정의구현사제단의 발표 과정은 매우 극적이었다. 당시 고문치사 사건 주범들은 사건의 축소 ·은폐로 자신들이 모든 죄를 뒤집어쓴 것에 대해 억울해하며 영등포교도소 감방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이것을 우연히 근처 방에 수감 중이던 재야인사 이부영(전 동아일보 기자)이 듣게 되어 안유 보안계장에게 물었더니 "박종철 사건이 은폐·조작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된다.
이부영은 크게 분노하여 관련 내용을 종이에 빼곡히 써서 다른 교도관인 한재동을 통해서 외부에 내보냈고, 이를 받은 김정남(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이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하여 발표하게 된 것이다. 이부영이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김정남에게 날린 ‘비둘기’(감옥에서 몰래 보내는 편지)는 모두 4통이었다.
김승훈 신부에 의해 다시 날게 된 ‘비둘기’는 거대한 날갯짓으로 세상을 바꿨다. 여론은 폭발했고 재야단체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5월 27일 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결성되어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주세력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본은 6월 10일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에 맞춰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를 규탄하는 집회를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기로 했다.

쓰러진 또 한 명의 대학생, 이한열
6월 9일, 전국의 각 대학 학생들은 다음날 집회를 앞두고 교정에서 사전집회를 연다. 연세대도 예외가 아니어서 1000여 명이 노천극장에 모여 집회를 진행했다. 그런데 사전집회가 끝나고 교문 앞으로 이동하면서 사건이 발생한다. 학교 밖으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는데, 그 중 한 발이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의 후두부를 직격한 것이다.
이한열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같은 학교 도서관학과 이종창이 겨우 부축해서 근처의 세브란스병원으로 후송한다. 그리고 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을 이종창이 힘을 다해 부축하는 장면을 당시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인 정태원 기자가 담아냈고, 이 사진이 뉴욕 타임스 1면과 중앙일보에 보도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뇌사 상태가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학교 전체가 뒤집혔다. 예비역 출신부터 과격한 시위를 벌이는 운동권에 반감을 가지던 학생들까지 모두가 뭉쳐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을 지키러 나섰다. 당시엔 과도한 공권력 사용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경찰이 탈취해 강제로 부검한 뒤 사망 원인을 조작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6월 10일, 전두환 정권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규탄 집회'를 봉쇄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다. 낮 12시에 선언문 발표가 예정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을 수일 전부터 봉쇄했다. 또 당일 차량 경적시위에 동참할 것을 우려해 "경적을 울리는 모든 차량운전자는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아넣겠다"고 뉴스를 통해 으름장을 놓았으며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의 경적을 제거했다.
그러나 6월 10일 저녁 6시, 서울시내 곳곳에서 집회가 열린다. ‘국본’의 방침대로 저녁 6시에 차량 경적을 신호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경찰이 시위대들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는 가운데 일부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하면서 이른바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5월 이전부터 진행 중이었던 시위를 특별히 '6․10 항쟁' 또는 '6월항쟁'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두환 정권은 6월 10일의 대규모 시위로 일순 긴장했지만 이내 자신감을 회복했다. 13~14일의 주말이 찾아오면서 시위가 소강상태에 이르렀고 가장 우려한 광주가 첫 날을 빼고 비교적 조용했기 때문이다. 이 자신감과 내각 내 온건파의 주장으로 치안 당국은 명동성당 농성자들에게 농성을 중단하면 아무도 구속하지 않고 무사 귀가를 보장한다고 약속했다. 농성자들은 찬반 투표 끝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판이었다. 월요일이 되자마자 주말 시위가 소강 상태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인파가 다시 거리로 몰려나왔다. 특히 주요 대학가들은 일제히 6월 15일을 신호탄으로 하여 본격적인 시위를 시작했다.
경찰이 무차별로 쏘아대는 최루탄에 반대하는 ‘최루탄 추방 대회’가 6월 18일 전국 각 도시에서 열렸다. 이때의 시위 참가자 규모는 150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이에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할 정도에 이르렀다.

전두환 정권, 결국 ‘백기’를 들다
그러나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전두환 정권은 결국 타협을 택했다. 먼저 민정당은 6월 21일 비상 의원총회를 열어 대통령 직선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인 22일에 전두환 대통령은 위기상황 타개를 위해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를 만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틀에 걸쳐 협상을 조율한 끝에 24일 전두환과 김영삼의 영수회담이 성사되었지만, 김영삼이 요구한 대통령 직선제, 선택적 국민투표, 구속자 석방 등을 전두환이 거부하면서 회담이 결렬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 전두환 대통령과 한국국민당 이만섭 총재의 회담도 이루어졌는데, 이때 이만섭은 "깨끗이 직선을 해서 국민 심판을 받도록 하시지요. 그래서 동교동, 상도동 머리 처박고 싸우게 하고 이쪽은 정정당당하게 물가 안정, 올림픽 가지고 심판받는 게 좋습니다"라고 했다. 25일에는 김대중이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다.
드디어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직선제 수용 선언(6․29 선언)을 하면서 6월항쟁은 막을 내린다. 이 6월항쟁의 결과물로 대한민국 역사상 9번째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직선제를 담고 있는 이 헌법은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된다.
6․29 선언의 후속 조치로 7월 9일 김대중이 사면복권되자 통일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로 김영삼과 김대중 중에서 누가 출마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다. 대립과 갈등 끝에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면서 야권후보 분열은 기정사실화 된다.
결국 야권 후보가 분열된 상태에서 12월 16일 실시된 제 13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민정당의 노태우 36.6%, 민주당의 김영삼 28%, 평민당의 김대중 27.1%, 공화당의 김종필 8.1%로 나타나 민정당의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31년 후, 박종철 곁으로 떠난 아버지
2018년 7월 28일.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가 그리운 아들 곁으로 떠났다.
당시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박상기 법무부 장관, 김부겸 행안부 장관, 문무일 검찰총장, 추미애 민주당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이해찬 의원 등이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아버님은 아들을 대신해, 때로는 아들 이상으로 민주주의자로 사셨다”며 추모했다.
박종철 사망 당시 아버지 박정기는 정년퇴직을 한 해 앞둔 부산시 수도국의 공무원이었다. 박종철 사건 이후 공안당국은 박정기가 누구와 만나는지, 조의금을 누구에게 얼마나 받았는지, 야당 인사를 접촉하고 있는지 등을 모두 감시했다. 심지어 첫째 아들 결혼 준비를 위해 가족들이 서울에 왔을 때도 이들이 어느 여관에 묵는지까지 샅샅이 조사해 상부에 보고했다.
아들을 떠나보낸 박정기는 이후 거리로 나서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고,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활동에 앞장선다.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 모두 유가협에서 함께 싸운 '동지'였다.
1999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박정기는 그제야 "'동지가 되어 달라'는 아들 부탁을 들어준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박종철이 "데모 그만하라"는 부모에게 오히려 "동지가 되어 달라"고 했던 말을 떠올린 것이다.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아들의 유해를 임진강에 뿌리며 이렇게 말했던 박정기는 2015년 그의 삶이 담긴 책 ‘유월의 아버지’가 나왔을 때는 하늘에 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철아, 어머니 아버지는 너를 길렀고 너는 어머니 아버지의 남은 인생살이를 개조한 큰일을 했다. 막내야, 다음에도 나는 이 아버지는 민주화운동을 할 거야. 역사에 없어도 나는 네가 하다 간 그것 할 거야!”
박정기의 부산 빈소에 민갑룡 당시 경찰청장도 조문했다. 민 청장은 장례식장에 비치된 방명록에 "평생을 자식 잃은 한으로 살아오셨을 고인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이라고 글을 남겼다. 아들 곁으로 간 박정기는 ‘경찰’의 사과를 받아들였을까?
※ 이영훈 가요연구가는 국제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근무하다 방송으로 옮겨 10년째 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채널A 보도본부에 근무하면서 메인뉴스 편집데스크와 디지털뉴스부장을 지냈고 쾌도난마, 뉴스톱텐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데스크로 일해 왔다. 보도본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심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한국정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