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안되는데…이정후가 상대 팀 홈런에 ‘몰래 박수’

조회 70,1352025. 3. 2.
사진 제공 = OSEN

베이스 돌며 “(넘어) 가라, 가라”

첫 타석은 볼넷이었다. (한국시간 2일 애리조나 캑터스 리그, LA 다저스-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나쁜 공에 손이 나가지 않아서 괜찮았다. 하지만 스윙이 하고 싶었다. 다음 타석에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김혜성)

그렇게 맞은 두 번째 타석이다. 5회 말 스코어는 1-2로 뒤지고 있다. 1사에 주자도 없는 홀가분한 상황이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우완 메이슨 블랙의 초구가 한가운데로 온다. 91.6마일(147.4㎞) 짜리 패스트볼이다.

망설임 없이 배트가 출발한다. 마침 타이밍도 괜찮다. 약간 뒤에서 맞은 타구는 출구속도 95.6마일(153.9㎞)로 뻗어 나간다. 엄청난 건 아니지만, 발사각도가 딱 적당하다. 31도를 유지하며 날아간다.

마침 바람이 돕는다. 내야에서 외야(좌익수)로 시속 13마일(21㎞)의 속도로 제법 강하게 불고 있다. 덕분에 비행거리가 조금 더 늘어난다. 착륙 지점은 펜스 너머가 된다.

“치고 나서, 달리면서 계속 빌었다. ‘가라, 가라’ 했는데, 진짜 넘어가더라. 바람 덕을 본 것 같다. 사실 딱히 홈런이라서가 아니라, 뭔가 정타를 쳤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다. 그게 제대로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김혜성)

드디어 시범경기 첫 홈런이 터졌다. 무관심 세리머니 따위는 없다. 덕아웃도 격하게 환영한다. 해바라기씨가 멋지게 흩어진다. 줄줄이 하이파이브가 이어진다. “감사합니다.” 어디선가, 누군가. 익숙한 한국어도 발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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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도, TV 카메라도 놓친 장면

그런 와중이다.

현장의 TV 카메라도, 수십 명의 사진 기자도, 1만 2000명이 넘는 관중들의 SNS도. 모두가 놓친 찰나의 장면이 있다. 바로 원정 팀 중견수의 작은 몸짓이다.

“어쨌든 나도 타구를 쫓아가고 있었다. 공이 펜스를 넘어가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글러브로 박수를 쳤다. 아무래도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숨겨서 이렇게 쳤다.” (이정후)

그러면서 (한국) 기자들 앞에서 손수 시연을 한다.

(키움 히어로즈) 한 팀에서 뛰던 절친 아닌가. 미국에 와서는 마주치는 첫 경기다. 하지만 소식은 잘 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큰지, 불면의 밤을 보내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자신도 비슷하게 힘든 과정을 겪었고, 지금도 겪는 중이다.

친구의 타율은 1할도 힘겹다. 이제껏 야구하면서 상상도 못 했던 숫자다. 팔푼이, 칠푼이라는 놀림거리가 된다.

어깨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24시간 괴롭힌다. 매일 라커룸 가는 게 불안한다. 혹시라도 이름표가 없어졌으면 어쩌나. 짐이 빠져 있으면 어떻게 하나. 당장 마이너리그로 가라고 해도 할 말 없는 처지다.

“혜성이가 지금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첫 해라서 겪는 어려움도 많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홈런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정후)

오죽하면 여북했을까. 아무리 시범경기라고 해도 그렇다. 엄연히 공식전이다. 캑터스 리그라는 명칭도 있다. 1만 2340명의 유료 관중이 지켜본다. 그런데 상대 팀의 홈런에 수비수가 박수를 치다니….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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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지 마” 절친의 조언

절친은 3회에도 마주쳤다. 만루가 되면서 이정후가 2루 주자가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유격수 김혜성과 지척의 거리가 됐다.

“(2루타를 친) 1회에는 포옹이라도 하려는데, 혜성이가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더라. 마침 수비 위치를 잡아야 할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말을 많이 못 나눴다. 그다음에 또 만난 것이 3회였다. 내가 주루 플레이로 2루에서 살아남은 상황이었다. 마침 투수 교체를 위해서 타임이 걸렸고, 그 사이에 얘기를 좀 했다.” (이정후)

말도 참 예쁘게 한다. ‘주루 플레이로 2루에서 살아남은 상황’이라는 설명이 그렇다. 사실은 친구인 유격수의 실수였다. 1루에 던져서 이닝을 끝냈어야 했다. 그런데 판단 미스로 2루를 택했다. 포스 아웃을 시키려다 세이프가 된 것이다.

당사자의 솔직한 고백이다. 기자들이 ‘그때 왜 이정후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냐’고 묻자 이렇게 말한다.

“아, 그때 말인가? 그때는 내가 팀에 미안한 상황이어서 그랬다.” (김혜성) 조금 멋쩍기는 하지만, 환한 표정으로 스스럼없이 인정한다.

어떤 얘기를 나눴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나온다. 혹시 홈런에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이 있었냐는 뜻이다. 이정후가 손사래를 친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해서 홈런을 친 것은 절대 아니다. 본인이 매일 일찍 나와서 훈련을 열심히 한 결과가 이제 나온 것일 뿐이다.”

그럼 무슨 대화였냐. ML 1년 선배의 충고는 간단했다. 한마디로 “쫄지 마”였다.

“그냥 자신 있게 해라. 어차피 되던 안되던 우리가 하는 것 아닌가. 네가 여태껏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 절대로 쫄지 마라. 계속 그 얘기만 했던 것 같다.” (이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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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헬멧의 별 3개

7푼이의 홈런은 많은 칭찬과 만났다.

다저스의 베테랑 내야수 미겔 로하스는 SNS에 축하 멘트를 올렸다. “혜성 킴의 부드러운 스윙”이라는 찬사와 함께 장타의 순간을 동영상으로 공유했다.

그는 며칠 전에 저녁 자리를 베풀었던 인물이다. “(때로는) 클럽하우스에 오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겠지만, 모두와 친하고 익숙해지면 지금 같은 불안함을 사라지고 더 안정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푸근한 말도 해줬다.

중계석에서도 호평이 나왔다. 스포츠넷 LA는 “홈런을 쳐서 말하는 게 아니라, 분명히 이전보다 더 좋은 스윙이 나오고 있다. 인상적이다”라고 밝혔다.

웬일인지 데이브 로버츠도 입에 침이 마른다. “타격이 문제”라던 며칠 전과 180도 달라졌다.

“이번 홈런으로 부담감을 떨쳐버렸으면 한다.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설정을 새롭게 하고 있는데, 짧은 기간에도 괜찮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고무적이다. 그는 분명히 투 스트라이크에서도 타격할 능력을 갖춘 타자다. 장점을 잘 활용해야 한다. 그러면 만족할 결과를 얻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힘이 될 것은 역시 절친의 말이다.

“혜성이는 고교 시절부터 대단했다. 늘 나보다 더 뛰어난 선수라고 생각했다. 성실하고 꾸준하다. 우리 팀 동료들에게는 ‘예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박지성 선배 같다’고 소개할 것이다. 지금은 생소함 때문에 어려움이 있겠지만, 꼭 이겨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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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기억이 있다. 2022년 9월 초의 일이다. 김혜성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1루에서 충돌이 생기며, 왼쪽 손가락 뼈를 다쳤다. 3년 넘게 이어지던 연속 출장기록이 중단됐다.

그다음 날이다. 이정후의 헬멧에 못 보던 별 3개가 그려졌다. 친구 ‘별삼이(백넘버 3번+혜성)’를 기억하라는 반짝임이다.

지금은 다른 팀이다. 서부 지구의 둘도 없는 라이벌이 됐다. 그러나 애틋함은 달라질 리 없다. 몰래 손뼉 치고, 조용히 응원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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