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는 어쩌다 세계 3대 악처(惡妻)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을까?

[홍성광의 독일 작가 사랑이야기]

콘스탄체는 정말 악처였을까?

역사상 세계 3대 악처(惡妻)가 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그리고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를 흔히 세계 3대 악처라고 일컫는다.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는 과연 악처였을까?

불멸의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음악뿐만 아니라 사랑에서도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모차르트의 사랑 이야기는 그의 음악만큼이나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그의 사생활은 음악적 천재성과 함께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그의 가장 유명한 사랑 이야기는 콘스탄체 베버(Constanze Weber, 1762∼1842)와의 결혼이지만, 그전에 그녀의 언니 알로이지아(Aloysia)와 열렬히 연애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1763년, 연주 투어중인 모차르트 가족.

첫사랑 알로이지아 베버

모차르트는 1777년 만 21세 때 독일 만하임에서 음악가 베버 가족을 만났다. 이 때 아름다운 소프라노 가수였던 알로이지아 베버(Aloysia Weber, 1760∼1839)에게 깊이 빠졌다. 그는 그녀에게 마음을 바쳐 곡을 써주며 사랑을 고백했지만, 알로이지아는 모차르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알로이지아는 그를 무시하며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모차르트는 실연으로 큰 충격을 받아 병에 걸리기도 했다.

알로이지아는 당대에 주목할 만한 오페라 가수로, 유명한 작곡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와는 사촌지간이었다. 그녀는 모차르트의 삶과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단순히 모차르트의 처형(妻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뮤즈이자 가장 중요한 해석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자매들 또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동생인 콘스탄체 베버가 훗날 모차르트의 아내가 되었다.

알로이지아는 어린 시절부터 오페라 가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비범한 목소리, 뛰어난 기교는 많은 이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1777년 만하임에서 모차르트를 만났을 당시, 그녀는 이미 훌륭한 성악 교육을 받았고, 유망한 가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그녀와 함께 연주하면서 사랑에 빠졌다. 만하임 체류 중 두 사람은 같이 연주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모차르트는 그녀를 위해 콘서트 아리아를 헌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1778년 12월, 알로이지아는 모차르트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모차르트는 몇 달 동안 베버 가문의 집에서 지내며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후 그의 시선은 여동생 콘스탄체에게 향해다. 머지않아 그는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태어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생가.

영원히 사랑한 여인 콘스탄체 베버

알로이지아와의 관계가 끝나고서도 모차르트는 베버 가족과 계속 연락을 유지했다. 알로이지아의 동생인 콘스탄체 베버는 모차르트가 병에 걸렸을 때 간호하면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콘스탄체는 여러 면에서 모차르트에게 완벽한 파트너였다. 때때로 엉뚱하고 충동적인 모차르트의 유머를 받아칠 만큼 유쾌했고, 현실감각이 있었으며 살림도 잘 하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언니 알로이지아와는 달리, 온화한 성품에 동정심이 많았다.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에게 결국 마음을 열고,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콘스탄체의 어머니는 모차르트가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고 모차르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그녀를 간단히 말해 이렇게 표현했다. “그녀는 단지 작은 검은 눈 두 개와 괜찮은 몸매를 지닌 그런 정도로만 예쁠 뿐이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1782년 8월 4일 비밀리에 빈의 성 슈테판 성당에서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 시기는 아마도 모차르트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콜로레도 대주교의 구속에서 벗어난 상태였고, 사랑에 빠져 있었으며, 새로운 작업의 가능성도 무궁무진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연주회도 가지면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탈출"(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로 빈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명성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또한, 피아노 협주곡 11번(K. 413), 12번(K. 414), 13번(K. 415) 등을 작곡하며 빈에서 피아니스트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독립적인 음악가로 자리 잡으며 창작의 황금기를 맞이하는 시점이었다.

모차르트의 아내가 된 콘스탄체 베버.둘이 결혼한 1782년의 모습.
1782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모차르트.

당시 모차르트의 머리속은 두 가지로 가득 차 있었다.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는 일과 콘스탄체와의 연애가 그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점점 더 괴팍해지는 아버지 레오폴트의 편지를 받아내는 일에도 신경써야 했다. 우리는 아버지 레오폴트의 편지를 읽다 보면 마치 아들인 모차르트가 점점 이름을 알리는 작곡가가 아니라, 그저 실망스러운 낙오자라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아들에 대한 압박을 늦추지 않았는데, 모차르트는 끝까지 아버지에게 심하게 화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인내심도 읽을 수 있다.

결혼 9년만에 요절...아내는 악처가 되고?

그러나 모차르트는 결혼한 지 9년만에 천재의 삶을 끝내고 요절한다. 9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콘스탄체가 악처였다고 비난한다. 성격이 변덕스럽고 바람기가 다분했으며, 사치와 낭비가 심해서 모차르트를 과로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일찍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이들 부부의 삶을 겉모습만 보면 그들이 그다지 행복했다고 말하기 힘들 것 같다. 9년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결혼생활 동안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네 명의 아이가 1년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결혼 후에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과 "돈 조반니"가 큰 성공을 거뒀지만 둘 다 재테크와는 담을 쌓은 데다 근검절약과는 거리가 멀어 갈수록 빚이 늘어났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4년은 몹시 궁핍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결혼 생활은 사랑으로 가득했다. 모차르트는 돈을 잘 관리하지 못했지만, 콘스탄체는 가정의 재정을 책임지며 남편을 지원했다. 두 사람은 종종 이사를 다녀야했고, 때로는 이웃에게서 식료품을 빌리기도 했다. 모차르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유럽의 각 도시를 돌며 연주회를 열었으나 차츰 성공하지 못할 때가 많아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병마가 드리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가난이 찾아들면 행복은 창문 너머로 소리 없이 도망간다고. 모차르트도 그랬을까?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며 함께했다. 모차르트는 아내를 위해 여러 곡을 작곡했는데, 그의 대표적인 오페라 "마술피리(Die Zauberflöte)"속 파미나(Pamina) 캐릭터는 콘스탄체를 모델로 했다는 설도 있다.

1782년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떠난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를 묘사한 엽서.

애정으로 가득찬 모차르트의 편지들

모차르트는 아내에게 애정 넘치는 편지들을 수없이 많이 남겼다. 편지에는 다정한 표현들이 가득하다. 그는 여행 중에도 아내를 그리워하며 끊임없이 편지를 썼는데, 때로는 ‘내 사랑하는 작은 아내’라며 장난스러운 어투로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1790년, 세상을 떠나기 바로 1년 전에도 모차르트는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나 독일의 각 도시를 전전하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편지에서 콘스탄체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을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한 편지에서 “나는 온 영혼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면서 눈물을 흘리며 썼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 중 한 편지에 추신으로 덧붙인 글에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천진난만한 모차르트의 사랑이 듬뿍 들어 있다.

추신.
내가 마지막 페이지를 쓰는 동안 종이 위에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힘을 내야겠지요.​
- 잡았다! - 수많은 키스가 날아다니고 있어요.​
- 두 개 잡았다! 키스들이 거대하게 모여 있는 것이 보여요.​
하하 방금 세 개를 잡았어요. - 정말 맛있군요. -​
안녕, 가장 사랑하는 아내여, 건강을 돌보세요.​
안녕, 당신에게 백만 번의 키스를 보냅니다.

콘스탄체가 모차르트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순전히 세상 사람들의 말일 뿐이다. 모차르트에게 콘스탄체는 악처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악처로 부르는 이유는, 성공한 천재가 왜 그렇게 힘들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위대한 음악가의 무덤이 사라지고 만 것이 결정적이다. 장례식에 콘스탄체가 몸이 아파서 참석하지 못했고, 돈이 없어 묘를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시신들과 합장됐는데 매장할 때 아무도 따라가지 않아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현재 모차르트의 묘로 알려진 곳은 실제 묘가 아니라 기념비만 세워져 있는 곳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차르트의 생애 마지막이 얼마나 고생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으니, 그를 사랑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콘스탄체가 곱게 보였을 리 없었을 것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초상화

아름다운 음악처럼 감동 그 자체의 사랑

그러나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콘스탄체는 남편이 죽은 후 그의 음악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고, 그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그녀는 모차르트가 사망한 후에도 남편의 명예를 지키려 애썼으며, 그의 작품과 편지를 정리해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녀는 모차르트 사후 18년이 지난 뒤인 1809년 덴마크 외교관 니센과 재혼했다. 그녀는 니센과 함께 모차르트 전기를 집필하며 그의 음악과 삶을 기록하는 데도 힘썼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의 주인공 이름은 콘스탄체로, 아내 이름을 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터키의 후궁에 갇힌 콘스탄체가 연인 벨몬테와 함께 탈출하는 이야기를 내용으로 했다. 콘스탄체 베버는 모차르트의 인생에 실존 인물인 동시에 오페라 속 영웅으로 등장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모차르트의 삶과 예술 모두에 깊은 영향을 준 뮤즈였던 셈이다.

모차르트와 아내의 사랑 이야기는 그의 음악만큼이나 열정과 실연, 그리고 헌신이 뒤섞인 감동적인 실화다. 알로이지아와의 실연, 콘스탄체와의 깊은 사랑,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변치 않은 애정은 그의 삶과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단순한 천재 음악가가 아니라, 사랑 끝에 실연하고, 나중에는 끝까지 아내를 열렬히 사랑한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천재였다. 모차르트는 사랑을 통해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사랑과 고통, 희망을 담은 음악을 세상에 남겼다.


※ 홍성광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독문학박사로, 독일 문학 및 철학 관련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실러의 『도적들』,『간계와 사랑·빌헬름 텔』,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소송』,『변신 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