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자 8점대 투수를 마무리로?
9회가 시작된다. 스코어 3-1이다. 홈 팀이 앞섰다. (11일 광주 챔피언스 필드, KIA 타이거즈 – 삼성 라이온즈)
불펜 문이 열린다. 누군가 모습을 드러낸다. 순간 관중석이 술렁인다. 뜻밖의 인물이 등장한 탓이다.
훤칠한 좌완 투수다. 전광판에 기록이 뜬다. 경기수 15, 이닝수 43, 2승 6패 1홀드…. 그런데 다음 숫자가 문제다. 평균자책점 ‘8.16’.
“이 상황에? 저런 투수를? 괜찮을까?” 챔스필드에 1만 4,496개의 물음표가 뜬다.
중계석도 비슷한 반응이다. KBS N SPORTS가 실황을 전했다.
이호근 캐스터 “3-1 두 점 차 상황에서 이범호 감독의 선택은 이의리(24)였습니다.”
해설자는 한 술 더 뜬다. 긴 감탄사를 내뱉는다. “야~~.”
박용택 “예상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그도 그럴 법하다. 데뷔 6년 차다. 아직 마무리 경험이 없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올리다니.
2점 차이다. 결코 안심할 수 없다. 게다가 상대가 누군가. 리그 1, 2위를 다투는 강팀이다. 특히 공격력은 최강이라는 평가다.
처리할 타순은 어떤가. 하필이면 클린업(3~5번)을 막아야 한다. 구자욱 – 최형우- 르윈 디아즈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얘기인가. 여기에 ERA 8점대 투수를 올린다고? 그것도 마무리 경험이 전혀 없는 24살짜리를?

공 8개로 중심 타순을 잠재웠다
투수 자신도 그런 것 같다. 이미 얼굴이 약간 상기됐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중계 카메라는 홈 팀 덕아웃을 잡는다. 선발 투수가 클로즈업된다. 애덤 올러(32)가 마운드를 응시한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연습 투구가 끝났다. 드디어 첫 번째 공이다. 153km 빠른 볼이 꽂힌다. 스트라이크 존 가장 멀고, 높은 곳이다. 그야말로 ‘꼼짝도 못 하는 코스’다.
타자(구자욱)는 멀뚱히 바라본다. 스윙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아니, 어차피 그렇게 작정했을 것이다. ‘볼이 많은 투수다.’ 그런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 ‘일단 지켜보자.’ 지극히 타당한 전략이다.
그런데 의외다. 너무나 완벽한 초구였다. 최상의 스트라이크가 들어갔다. 일거에 기세가 바뀐다. 마운드의 긴장감은 한결 사라진다.
이후는 일사천리다. 다음 공은 슬라이더다. 몸 쪽 코스에 스윙이 막힌다. 빗맞은 타구를 중견수가 건져낸다. 손쉬운 아웃 1개가 만들어진다.
다음은 최형우다. 153km 빠른 볼로 윽박지른다. 역시 힘으로 밀어붙인다. 타구가 우중간에 뜬다. 그러나 담장까지는 어림도 없다. 한참 앞이 한계다. 김호령의 수비 범위를 못 벗어난다.
마지막은 디아즈다. 파울, 헛스윙으로 타자를 압박한다. 카운트는 벌써 투수 편이다. 1-2에서 4구째다. 슬라이더를 떨어트린다. 배트가 허공을 가른다.
스리 아웃, 경기 끝이다. 공 8개면 충분했다. 깔끔한 끝내기다.

“아유, 긴장 많이 했습니다.”
챔스 필드의 조명이 꺼진다. 마운드에 나인들이 모인다. 투수의 어깨를 두드려준다. 생애 첫 세이브를 향한 축하 인사다.
멀리 벤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선발 올러가 엄지 척을 보낸다. 승리를 지켜준데 대한 경의와 감탄이다.
경기 후 인터뷰도 인상적이다. 아마 “큐” 사인 직전인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카메라가 돌고 있다. 격의 없는 사담까지 방송으로 송출된다.
박용택 해설 “의리야, 얼굴이 아직도 상기돼 있는데? 지금?”
의리 “아유, 긴장 많이 했습니다.”
용택 “그지?” 일동 빵 터진다. ㅎㅎㅎㅎ
비로소 본방이 시작된다. 격식을 차린 인터뷰다. 정리하면 이런 얘기다.
“김지용 코치께서 ‘일단 마운드에서 전력 투구하는 것만 집중하라’고 하셔서, 그 조언해도 하려고 한 결과가 좋게 나타난 것 같다.” (이의리)
캐스터가 기분을 묻는다.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항상 완봉하고, 마지막에 (마운드에) 서 있고 싶다. 그런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서 있을 줄은 몰랐다. 나한테는 오늘이 2024년 한국시리즈 마지막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들뜬 기분과는 사뭇 다르다. 내내 차분한 어조를 유지한다. ‘혹시 말실수가 있을까 봐.’ 하는 걱정 탓이다.
“상대 팀에서, 듣는 입장에서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말을 하지 않도록,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조심하고 있다.”

꽃 감독의 계획
시계를 되돌려보자. 오후 6시다. 그러니까 플레이볼 1시간 전이다.
출전 선수 명단이 교환된다. 상대 라인업을 살핀다. 아니나 다를까. 좌타자가 대부분이다. 특히 클린업 트리오가 핵심이다. ‘이걸 못 막으면 어렵다.’ 그런 결론이 당연하다.
사령탑은 고심한다. 감독실의 (선수단) 현황판을 살핀다. 불펜진의 면면을 살핀다. ‘막아줄 투수는 딱 하나다.’ 좌완 파이어볼러(이의리)에게 눈길이 꽂힌다.
은밀한 특명이 떨어진다. “경기 후반 상황이 생기면 투입한다. 맞춰서 잘 준비하고 있어라.”
일단 6회 초에 한 번 타순이 걸렸다. 이때는 한 번 참았다. 아직 선발이 괜찮을 때다. 올러에게 버티게 했다. (김성윤 좌비, 구자욱 좌파, 최형우 삼진)
그리고 다시 찾아온 것이 9회다. 불펜으로 인터폰 연락이 간다. “때가 됐다.”
경기 후 인터뷰 때다. 꽃 감독이 저간의 사정을 밝힌다.
“게임 전부터 계획을 갖고 있었다. 딱히 마무리 역할보다는 7회 이후 중심 타선이 걸릴 경우는 이의리를 올리겠다는 생각이었다. 믿고 내보냈고, 기대한 대로 정말 잘 던져줬다.” (꽃 감독)

사실 위험천만한 구상이다. 실패할 경우 충격이 크다. 후유증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이미 실패 사례는 많다. 볼 스피드만 믿으면 안 된다. 제구가 우선이다. 아니면 곤란하다. 9회에 그런 도박은 팀 전체를 위험에 빠트리기 십상이다.
팀 내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포수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박용택 해설 “(이의리 등판에 대해) 미리 알았나? 깜짝 놀랐나?”
김태군 “8회 끝나고, 이미 알았다. 9회 수비 나갈 때 계속 기도했다.”
물론 태군마마의 평가는 단호하다. “오늘 구위가 좋았다, 불펜으로 가니까 스피드가 더 좋아졌다, 이런 말들을 하지만, (이) 의리의 구위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간절한 바람은 딱 하나였다. “의리야 제발 가운데만 던져라.” 하는 기도였다. 그리고 어제는 그 기도가 응답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