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번의 피란, 하루 한 끼도 못 먹는 절망의 땅… "전쟁은 충분, 그저 평화를 원할 뿐"
가자지구 피란민 4명 화상·서면 인터뷰
삶의 터전 파괴 1년... 절망하는 주민들 중동전쟁>
"어제는 우리의 '슬픈' 결혼 1주년이었어요. 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났고, 우리가 결혼한 뒤로 1년이 흘렀네요. 그리고 전쟁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네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남부에서 피란 중인 아흐메드 알다두흐(26)는 지난달 26일(현지시간)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팔레스타인 치과의사 부부인 알다두흐와 비산 이드(24)는 지난해 9월 25일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이 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 전쟁이 시작되면서다.
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났다. 전쟁은 무고한 민간인들의 목숨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이들의 삶의 터전과 평화로웠던 일상까지 앗아갔다. 가자지구에 남아 피란 중인 팔레스타인인들의 이야기를 화상과 서면 인터뷰로 들어봤다.
전기 부족에… 매일 50분씩 이동해 인터넷 사용
이들과의 화상 인터뷰는 순탄치 않았다. 가자지구 내 전기가 부족해 인터넷 연결이 원활하지 않아 화상 통화는 어려웠다. 수차례 시도 끝에 연결한다 해도 화면이 고르지 않거나 금세 접속이 끊겨버렸다.
전쟁 발발 당시 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아흐메드 마흐무드(21)는 지난달 27일 한국일보 인터뷰를 위해 도보로 50분가량 걸리는 친구의 집을 찾았다고 했다. 인터넷 연결이 그나마 원활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매일 같이 들르는 그곳에서 마흐무드는 피란민으로서의 일상을 소개하며 기부를 호소하는 '쇼트폼'(짧은 동영상)을 찍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한다고 했다. 그는 "내가 머무는 캠프에는 인터넷이 전혀 없다"고 했다.
가자지구 북부에 살다가 현재 중부 데이르알발라 내 캠프에서 피란 중인 아흐메드 탈렙(25)은 "전력이 공급되는 이웃의 집 앞에서 다 같이 몇 시간 동안 휴대폰을 충전하는데, 이마저도 비가 오면 불가능하다"며 "그렇지만 인터넷이 외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전했다.
끊임없는 이주, 식량 부족, 위생 문제… '재앙' 수준
전력과 통신 상황이 이럴진대 가자지구 의식주 문제는 거의 '재앙' 수준이다. 이들은 1년째 거듭되는 피란에 주거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고 토로했다. 탈렙은 "전쟁 전만 해도 거주민이 10만 명에 불과했던 데이르알발라에는 현재 거의 100만 명이 모여 산다"고 전했다. 4세와 2세 딸을 키우는 하야 무르타자(30)는 "비가 오면 텐트 안으로 물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주도 이들에겐 지겹게 반복되는 일상이 됐다. 유엔 인도적업무조정실(OCHA)은 지난 8월 "지난해 개전 이후 가자지구 전체 주민 약 220만 명 중 90%가 한 번 이상 강제 이주를 해야만 했다"며 "이스라엘의 대규모 대피 명령은 현지 주민들을 과밀한 지역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전쟁 발발 이후 알다두흐는 18번, 탈렙은 9번, 무르타자는 10번에 걸쳐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했다.
당장의 식량과 식수 부족도 이들에겐 큰 문제다. 마실 물과 식량을 얻기 위해 긴 줄을 서는 것도 힘들지만 이마저도 돈이 부족해 충분히 얻지 못하고 있다. 지난 6월 발표된 유엔 통합식량안보단계(IPC) 보고서에 따르면 가자지구 주민 5명 중 1명이 하루 종일 한 끼도 먹지 못하는 심각한 식량 불안에 직면했다.
마흐무드는 "돈이 부족해 하루 한 끼밖에 사 먹을 수가 없다"며 "매일 가자지구 북부쪽으로 가서 물 2병을 사는데 총 14셰켈(약 4,900원)을 낸다. 이조차도 지금은 돈이 없어서 걱정"이라고 호소했다. 간혹 자선단체에서 제공하는 쌀도 얻지만, 이 또한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식량이 부족하니 물가도 치솟았다. 무르타자도 "물품들이 다 부족하다 보니 예전엔 1달러에 불과했던 것들이 거의 20달러로 올랐다"고 전했다.
의약품과 의료 서비스도 중단되면서 위생과 건강 문제도 심각하다. 무르타자는 "샴푸와 세제가 부족하다보니 두 딸 모두 이와 딱지가 퍼진 적이 있다"고 했고, 마흐무드는 "아빠는 당뇨와 신경 질환이 있고 엄마는 고혈압이 있는데, 정말 마음이 아프다"고 토로했다.
일자리∙교육은 머나먼 얘기… "일도 꿈도 없어져"
이들의 생계를 지탱해 준 일자리도 이제는 머나먼 얘기일 뿐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지난달 10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가자지구 내 일자리는 전쟁 직전 대비 20만1,000개가 감소했다. 전체 일자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수치다. 알다두흐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아내와 운영하던 치과 클리닉이 완전히 파괴됐다"며 "개전 이후 전혀 일을 하지 못해 생활하는 데 필요한 돈을 못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터뷰 도중 기자에게 일자리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가자에서 당신들을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다"며 "정말로 일거리가 절박하다"고 호소했다.
치대생 출신인 탈렙도 "인턴십을 마친 지 며칠 되지 않아 전쟁이 터지면서 지금 거의 360일 넘게 수련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2016년 대학을 졸업한 뒤 마케터 겸 가수로 활동해 왔던 무르타자는 "유튜브에 노래 영상을 올려왔는데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도 없어졌고 내 꿈도 없어졌다"고 전했다.
전쟁이 앗아간 삶 속에 아이들은 더욱 무력한 상황이다. 무르타자는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첫째 딸 샴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안나를 좋아하는데 매일 'TV 보고 싶다' '친구들 보고 싶다'고 한다. 밤에는 로켓포 소리 때문에 귀를 막고 자고 두려움에 소리를 지르면서 깨곤 한다." 행복한 가정을 꿈꿨던 알다두흐에게 자녀 계획은 사치일 뿐이다. "내 자녀를 이런 세계로 초대하고 싶지 않다. 가자를 벗어나서 집과 일거리가 있는 곳에서 아이를 낳고 싶다."
"가자 탈출 원해… 전쟁 끝나기를 바랄 뿐"
1년째 지속되는 전쟁 속에서 죽음도 점점 이들 곁으로 다가왔다. 탈렙은 "아무 잘못 없는 친구 아실 타예와 누르 야히가 '순교'했다"고 했고, 알다두흐도 "수많은 친척들과 동료들이 이유도 없이 죽었다"고 전했다. 마흐무드는 "전쟁 중 죽은 삼촌과 이모, 사촌동생들이 그립다"고 했다.
다만 이들은 전쟁과 죽음에 대한 질문에는 길게 답을 이어가려 하지 않았다. 가자에선 죽음이 너무 일상이 됐고, 남일이 아니었다. 전쟁이 남긴 아픔이고, 마음의 상처였다. 가자지구 보건부에 따르면 개전 이래 팔레스타인인 4만1,825명이 목숨을 잃었고, 9만6,910명이 부상을 입었다(5일 기준).
이러한 비극 속에서 이들은 가자 탈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SNS를 통한 기부금을 모아 가자지구와 국경을 맞댄 이집트로 가기만을 꿈꾸고 있었다. 알다두흐는 "이집트로 가려면 1인당 7,000달러가 필요하다"며 "이집트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돈과 서류가 준비되면 바로 떠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하루하루가 절망의 연속이라고 입을 모았다. "매일 마음이 무너진다. 내가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다."(마흐무드) "제발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 아이들과 여성이 죽어가는 이 전쟁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알다두흐) "우리는 매일 죽음을 목격한다. 가자지구 어느 곳에도 안전한 장소는 없다."(탈렙) "텐트는 우리의 삶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평화로운 삶을 원한다. 전쟁은 충분했다."(무르타자)
손성원 기자 sohns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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