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온가족 다섯번 피난 “우리는 죽을 차례를 기다리는지도 몰라”
영어교사 라자 가족의 피난 여정
“과거(2012년 11월, 2014년 7~8월)에도 이스라엘군의 공격은 여러번 있었습니다. 15일, 60일씩 이어졌지요. 그런데 지난 1년은 우리 생애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입니다. 이 잔인한 전쟁이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다면….”
서울에서 팔레스타인 가자까지의 거리 8135㎞. ‘지구상 가장 큰 감옥’(가로 10㎞, 세로 40㎞, 면적 360㎢)이라고 불리는 가자지구의 남부 도시 다이르알발라흐 난민 캠프에 머물고 있는 영어 교사 라자 란티시(38)는 가자전쟁이 계속된 지난 1년을 “고통스러운 여정”(painful journey)이라고 말했다. 한겨레는 지난 8월26일부터 한달 동안 모바일메신저 와츠앱을 이용해 라자를 인터뷰해 라자 가족의 “고통스러운 여정”에 대해 들었다.
지난해 10월7일(현지시각) 오전 6시30분께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5천발 이상 로켓을 발사하고 대원들이 이스라엘 남부 국경을 넘어 공격을 시작했다. 하마스가 ‘아크사 홍수작전’이라고 이름 붙인 이 공격으로 이스라엘에서 1200명이 숨지고 240여명이 인질로 끌려갔다. 곧, 이스라엘이 보복에 나서면서 가자전쟁이 발발했고, 7일로 1년을 맞는다.
전쟁이 시작된 지난해 10월7일, 가자지구 북부에 있는 가자지구 최대 도시 가자시티에 살던 라자는 여느 날처럼 아이들의 등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됐다는 소식은 페이스북을 통해 접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 교육부로부터 이제부터 “학교는 없다”는 메시지를 받고서야 심각함을 깨달았다.
라자의 막내딸(6)은 학교에 이제 막 입학했다. 딸의 장난감과 책은 학교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에 따르면 가자지구 인구의 90%에 해당하는 190여만명이 가자전쟁 발발 이후 피란길에 올랐는데 라자 가족도 이 중 한 가족이다.
남편 누르 딘(47)의 남부로 가자는 제안에 가족들은 10월12일 집을 떠났다. 전쟁이 나고 6일째였다. 그때만 해도 장남 자브르(16)와 장녀 마르얌(15), 살리흐(12), 마이스(7), 라잔(6)까지 일곱 식구 모두 이렇게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일주일 안에 돌아올 것으로 예상해 약간의 옷과 빵과 같은 음식만 챙겼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 뒤로도 4개의 도시를 더 이동해야 했지요.”
라자 가족은 자동차를 타고 10㎞ 떨어진 가자 중부 누사이라트 캠프로 우선 몸을 피했다. 누사이라트는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당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설립된 역사가 오래된 난민촌이었다. 다음날인 10월13일 이스라엘은 곧 가자 주민 230만명 중 북부 주민 110만명을 상대로 북부에서 대피하라고 요구했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군이 가자시티를 중심으로 북부 지역을 집중 공격하며 가자 주민들에게 토끼몰이 하듯 중·남부로 이동하라고 을렀다. 라자 가족들은 누사이라트 난민촌의 학교에 머물렀다. 라자는 점점 강해지는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고 지난해 가을을 회상했다.
“따뜻한 옷이 필요했습니다. 전쟁 후 수입이 없는데 물가는 점점 올랐습니다. 담요 가격은 전쟁 전보다 2배나 비싸 25달러까지 올랐어요. 감자·양파도 3배가 됐고, 25㎏의 밀가루 포대 가격이 200달러(전쟁 전 라자의 월급은 월 400달러였다)가 넘을 정도로 값이 뛰었지요. 동물 사료 원료로 이용하는 옥수수와 보리 가루를 갈아 먹으며 버텼습니다. 하루에 한 끼만 먹었습니다.”
누사이라트 캠프도 오래 머물 곳이 못 됐다. 다시 이스라엘이 공습을 하며 대피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20일 언니 부슈라의 집이 있는 가자 중부 도시 마가지까지 4.2㎞를 이동했다. 부슈라네 아파트에는 이미 또다른 언니 아이샤 가족들(5명)이 피란 와 있었다.
부슈라의 가족 7명, 라자의 가족 7명까지 더해 총 19명이 좁은 아파트에 같이 머물렀다. 부슈라의 남편은 당뇨병, 신장병 등으로 쇠약해져 혼자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조카들은 자폐와 조현병을 앓고 있는데 약을 구하기 어려웠다고 라자는 말했다.
라자 가족은 올해 1월의 첫날 다시 마가지를 떠나 30여㎞ 떨어진 가자지구 최남부 라파흐까지 도착했다. 남편의 여동생이 살고 있는 도시이며, 이집트와 접경한 이곳을 통해 수십년 동안 가자지구로 구호품 등 물품이 들어온 곳이다. 라자는 “이곳이 안전한 곳인지 열흘을 맘 졸이다” 같은 달 10일 가족들이 머물 텐트를 쳤다.
첫 텐트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족들은 질병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노숙과 다름없는 생활 탓에 주민들 머리에 이가 빠르게 번졌다. 나일론과 천으로 만들어진 텐트는 매우 비좁고 열기를 머금고 있어 생활하기 힘들었다. 특히 깨끗한 물을 구하기 어려웠다.
“텐트는 편안한 삶의 장소가 아니에요. 과일과 채소, 약을 살 수 없으니 자꾸 몸이 안 좋아졌어요. 물을 구하기 위해 서너시간씩 줄을 서야 해요.”
난민들에게 제공되는 매번 거의 같은 음식(쌀, 스파게티, 렌틸콩)으로 끼니를 때웠다. 비싼 빵을 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장기전이 되어가는 전쟁 속에서 통조림 식품에 의존하면서 영양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그나마 이 식사를 하기 위해서 아이들도 한시간씩 줄을 섰다.
라자가 기억하는 가장 참혹했던 순간은 2월11일 이스라엘군의 라파흐 지역 공습이 있던 밤이었다.60여명이 사망한 대규모 공습이었다. 근처에서 나는 굉음을 듣고 텐트 밖으로 뛰쳐나온 라자는 “탱크가 우리 뒤에 있어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라자는 그날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그리고 신이 돕고 있음을 느꼈다고 돌아봤다.
“두려움에 울며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을 안고 있었어요. 심장이 멈출 것같이 무서웠어요.”
이들 가족은 2월21일부터 라파흐에서 21㎞ 떨어진 중부 다이르알발라흐로 이동한 뒤 텐트에서 머물고 있다. 이곳도 반복된 공습으로 곳곳에 쓰레기와 배설물이 버려져 있어 수인성 전염병이 돌고 있다. 세탁 세제는 비싸고 사용한다 해도 더러운 물을 처리할 하수 시설이 모두 파괴되었기 때문에 아무 곳에서나 옷을 빨거나 접시를 씻는 일은 어려운 상황이다.
이슬람교도들에게 명절과 같아 친척들을 방문하는 라마단(음력 기준, 올해 양력 3월10일~4월9일)도 슬픔 속에 보냈다. 가자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의 생사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전처럼 맛있는 음식을 교환하지도, 따뜻한 주홍빛의 전등을 켜보지도 못했다. 그는 “파괴만이 남았다”고 했다.
특히 가자 아이들을 교육해온 학교는 거의 대부분 완전히 파괴됐다. 라자는 미래마저 붕괴된 가자의 참혹한 현실에 매우 분노했다.
“9천명의 아이들이 숨지고 500개의 교육 시설이 파괴됐습니다. 지금 가자에는 가르치는 선생님도, 교육받을 학생도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방향이 없습니다. (깨끗한 물도 아닌) 이미 오염된 물이라도 찾기 위해,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이 이 ‘고통스러운 여정’의 목표일 뿐입니다.”
라자는 지난 12년 동안 “가자 최고의 영어 선생님”이었다. 피란을 떠나기 전 그의 가족은 중산층에 가까웠다. 라자는 가자시티 학교 파흐미 알지르자위 10학년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월 400달러를 벌었다. 이발사인 남편 혼자서 한달에 700달러를 벌었다고 한다.
라자가 소개한 소셜미디어 사진 속의 가족들은 아파트와 자동차,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가족들끼리 나들이를 가고, 케이크를 나눠 먹는 모습 등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전쟁 이후 부부가 합쳐 400달러(약 1500 이스라엘신셰켈·ILS)만 벌며 가족들의 끼니와 생존을 걱정하고 있다.
하늘이 푸르고 높아지는 지난달, 전쟁이 발발한 지 11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가자(북위 31도)의 날씨는 한국(북위 37도)과 비슷하다. 다행히 10살 이하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소아마비 백신 접종을 위해 임시적이나마 전투 중지가 성사돼, 라자의 넷째(7), 다섯째(6) 아이도 지난달 4일 난민 캠프에서 소아마비 경구용 백신을 맞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달 7일 이스라엘군이 자신들이 피란할 수 있는 곳으로 지정한 가자 남부 도시 칸유니스의 난민 캠프를 폭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라자가 머무는 다이르알발라흐와도 아주 멀지는 않은 곳이다.
라자는 이날도 폭격 소식에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하루를 보낸 “평범한 하루”였다고 돌아봤다. 폭격이 이어질 때 라자와 가족들은 난민촌 텐트에서 거주하며 식수와 설거지용 물, 또는 음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폭격 소리는 항상 가까이 들립니다. 우리 가족은 어쩌면 (먼저 숨진 이들처럼) 죽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일까요 내일일까요? 꼭 폭격이 아니더라도 처참한 환경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라자의 집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점령으로 인구가 급감한 팔레스타인 이브나에서, 남편 누르 딘 집안 사람들은 제1차 중동전쟁으로 황폐해진 마스미야에서 왔다고 한다. 라자와 남편의 부모, 그리고 이 부부와 아이들의 고향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가둔 가자이다. 가자지구 밖을 가본 적은 없다.
“나크바(1947~1949년 팔레스타인인들이 난민이 된 전쟁) 이후 70여년 동안 우리는 우리의 땅이 사라지고 도둑맞은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전쟁이 빨리 끝나고 평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고향에서의 ‘고통스러운 여정’은 언제 끝이 날까. 라자와 가족들이 세계에 묻는다. 가자지구 보건부는 2일 기준으로 가자전쟁 발발 이후 가자지구 사망자 수는 4만1689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취재 후기
오는 7일로 가자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된다. 한겨레는 봉쇄 중인 가자 현장 상황을 확인하고, 현지 주민이 견딘 1년을 기록하기 위해 가자지구 안에 거주 중인 라자 란티시와 지난 8월26일부터 한달 동안 모바일메신저 와츠앱을 이용해 소통했다.
한국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 접속이 가능했지만 수시로 이어지는 공습에 라자의 인터넷과 통신 연결은 자유롭지 않았다. 기자가 질문을 남기면 2~3일에 한번씩 텐트에서 3㎞ 떨어진 인터넷 접속 가능 지역에 가서 유료(2시간 1 이스라엘신셰켈, 한국돈 약 355원)로 인터넷망에 접속해 답장을 할 수 있었다. 라자는 웃는 얼굴, 텐트, 해바라기꽃, 초승달과 같은 다양한 이모티콘을 이용해 감정을 표현했다. 그동안의 생활을 소개하기 위한 사진 수십장과 영상도 보내왔다.
라자는 기자와의 한달여 동안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나의 이야기가 전세계에 퍼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길 바란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증오(hate)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라자의 친척이자 한국에 거주 중인 팔레스타인 난민 살레 알란티시(27)와 난민과 난민이 아닌 이들이 연결되고 함께 성장하는 시민단체인 한옥커즈(Hanokers) 정연욱 이사가 취재 도움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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