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이성민이 오랜 무명 시절 겪었던 극심한 생활고와 가족의 도움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결혼 후에도 수입이 거의 없어 도시가스 요금조차 장인어른의 카드로 결제해야 했지만, 끝까지 연기를 포기하지 않은 끝에 충무로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 잡았다.
대학 원서까지 찢었던 아버지의 반대

이성민은 고등학생 시절 연극을 접한 뒤 배우의 꿈을 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는 거셌고, 연극영화과 진학을 준비하던 그의 대학 원서를 눈앞에서 찢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연기를 선택했고 20대부터 극단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꿈과 달리 현실은 지독한 가난의 연속이었다.
떡볶이 국물로 끼니 때우던 무명 시절

당시 이성민은 버스비가 없어 먼 거리를 걸어 다닐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떡볶이 국물로 배를 채우거나, 마가린과 커피 크림에 뜨거운 물을 부어 죽처럼 먹었던 적도 있었다. 방충망조차 없는 방에서 모기를 잡다가 배고픔과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던 일화도 공개했다. 배우라는 꿈 하나만으로 버텨야 했던 시간이었다.
결혼 후에도 장인어른 카드로 가스비 결제

생활고는 결혼 후에도 이어졌다. 현대무용을 전공한 아내와 가정을 꾸렸지만 안정적인 수입이 없어 도시가스 요금을 낼 돈조차 부족했던 시기가 있었다. 결국 장인어른의 카드를 빌려 공과금을 결제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성민은 당시 처가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위를 탓하거나 압박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줬다며 고마움을 전한 바 있다.
무명배우에서 천만 흥행 이끈 배우로

오랜 연극 무대를 거친 이성민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후 ‘미생’을 통해 대중적인 인지도를 크게 높였고, ‘공작’, ‘남산의 부장들’, ‘서울의 봄’ 등 굵직한 작품에서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다. 특히 천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에도 출연하며 이제는 흥행성과 연기력을 동시에 인정받는 배우로 자리 잡았다.

한때 가스비조차 스스로 낼 수 없었던 무명배우는 오랜 시간을 버틴 끝에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이성민은 성공 이후에도 자신을 끝까지 믿어준 아내와 처가 식구들에 대한 고마움을 꾸준히 밝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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