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령공주의 숲, 야쿠시마
대지의 끝, 수천 년의 세월을 품은 삼나무와 안개로 뒤덮인 울창한 숲이 펼쳐진다. 어디선가 원령공주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도 이상하지 않은 몽환적인 풍경이 반기는 곳. 모두의 버킷리스트, 야쿠시마다.
야쿠시마는 1993년 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일본에서는 최초다. 바다 위에 덩그러니 놓여 산호초로 에워싸인 이 작은 섬에 무슨 보물이 숨겨져 있는 걸까. 전설처럼 전해 듣던 야쿠시마의 삼나무와 안개 숲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가고시마 항구로 달려간다. 가고시마항에서 야쿠시마의 미야노우라항까지 고속선인 제트호일로 약 2시간. 페리 난간에 서서 광활한 태평양과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내는 야쿠시마의 전경을 구경하다 보면 훌쩍 지나는 시간이다. 야쿠시마는 총면적 540.48㎢로 제주도의 약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크기다. 섬의 전체 둘레 역시 130km에 불과해 하루면 섬 한 바퀴를 일주할 수 있다. 야쿠시마는 일본 최남단에 위치한 오스미반도 사타곶에서도 남쪽으로 60km 가량 떨어진 바다 위에 자리한다. 덕분에 사계절 내내 날씨가 온화한 편이지만 섬 전체가 따뜻한 건 아니다. 해안지대에서 섬의 최고봉인 미야노우라산(1936m)까지 고도차가 엄청나다. 가고시마부터 홋카이도까지, 길쭉하게 뻗은 일본 전역의 기후가 이 작은 섬 안에 공존하는 셈이다. 사시사철 온화한 해안지대와 달리 해발 1500m가 넘는 산간지대는 연평균 기온이 7℃까지 떨어진다. 야쿠시마에는 규슈에서 가장 높은 미야코우라산을 비롯해 해발 1800m가 넘는 6개의 봉우리가 솟아있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기도 한다.
잔잔한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산맥은 ‘해상의 알프스’라 불리기도 한다. 단, 고도가 높은 만큼 수증기를 잔뜩 머금은 비구름이 산세에 막혀 엄청난 비를 쏟아낸다. 야쿠시마 산지에는 연평균 1만 mm의 비가 내리고, 저지대의 강우량도 4천 mm에 달한다. 많은 비는 야쿠시마를 더욱 싱그럽게 만든다. 7200년 된 삼나무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이끼 숲이 특히 그렇다. 이 숲은 현지인들에게 일생의 버킷리스트로 꼽힌다.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 <원령공주>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부터는 전 세계인의 관심과 호기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야쿠시마의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자 바다 위를 수놓은 윤슬이 하염없이 펼쳐진다. 마치 요정 떼가 춤추는 듯한 풍경에 흥이 절로 난다. 도로를 달리는 중에는 섬의 주민들과도 끊임없이 마주치게 된다. 야생 원숭이와 사슴이다. ‘야쿠시마에는 2만 마리의 원숭이, 2만 마리의 사슴, 2만 명의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물이 많다. 원숭이나 사슴과 부딪히지 않도록 잘 피해야 하는 쪽은 ‘우리’다. 그들은 이 섬의 주인이고, 우리는 낯선 손님이니까. 도로를 달리며 만날 수 있는 야쿠시마 섬의 독특한 풍경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지붕 위의 돌이다. 야쿠시마에서는 ‘30일 중 33일이 비가 온다’는 농담이 흔할 정도로 늘 비바람이 함께한다. 비바람에 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돌을 올려둔 것. 멀리서 보면 마치 신이 땅 위에 바둑을 두는 듯한 풍경이다.
꿈의 트레킹 코스, 조몬스기를 찾아서
숲에 발을 들이자 뽀얀 안개가 옅어지며 시야가 트이기 시작한다. 눈앞이 온통 초록빛 이끼와 거대한 고목이다. 마치 안개로 만들어진 제3의 문을 통과한 느낌이랄까. 숲 밖의 세상이 벌써부터 아득하다. 길을 안내하는 고목들의 나이는 천년, 2천 년을 넘어 7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늠조차 어려운 세월을 품은 자연 앞에서 기껏해야 백 년을 사는 인간은 한없이 작아진다. 점점 더 조심스러워지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다. 야쿠시마는 ‘이끼 숲’이라 불릴 정도로 숲 전체가 이끼로 뒤덮여 있다. 전 세계 이끼의 3분의 2가 서식하고 있다고. 숲에는 천년을 웃도는 삼나무가 지천이다 보니 수령 천년을 기점으로 고스기, 야쿠스기로 나눈다. 야쿠스기 중 현재까지 발견된 최고령 삼나무는 조몬스기로 수령이 2000~7200년이다. 적게 잡아도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 가늠하는 것조차 어쩐지 부끄러워진다.
거기에 높이 25.3m, 둘레 16.4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까지, 숲의 신이 틀림없다. 야쿠시마를 찾는 많은 이들은 조몬스기를 보기 위해 왕복 약 22km의 트레킹 코스에 기꺼이 나선다. 총 10시간이 소요되는 코스다. 직접 트레킹을 시작한 후에야 알게 되지만, 긴 거리와 시간이 문제가 아니다. 신령한 나무를 만나러 가는 길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아라카와 등산로 입구에서 시작해 도로코 열차 선로를 따라 약 8km를 지나야 한다. 이후에는 가파르고 험난한 산길이 다시 한번 묻는다. ‘그래도 만나야겠냐’고. 인간의 발길이 닿기 쉬운 곳에 있었으면 이토록 긴 세월 동안 신성하다 못해 비현실적인 자태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레 산을 오르며 물음에 답한다. 3km의 험난한 트레킹 코스에 몸은 지쳐가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신비로운 풍경에 마음은 쉽게 멈추지 못한다. 기어코 숲에 들어서자 그토록 바라던 조몬스키가 따스한 품을 열어 보인다. 입 밖으로 감탄사가 터져 나올 새도 없다. 그렇게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된다.
시라타니운스이쿄의 시간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중 <원령공주>를 가장 애정 한다. 대지의 끝, 야쿠시마까지 발길이 이어지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다. 영화의 모티프가 된 야쿠시마 숲. 원령공자의 세계는 자연휴양림 시라타니운스이쿄에서 탄생했다.
<원령공주>의 기억을 더듬으며 시라타니강을 따라간다. 이름과 달리 맑고 투명한 계류가 쉴 새 없이 흐르는 청정계곡에 가까운 모습이다. 계곡의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다 보면 원시의 세계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밖에서 보아도 야생의 자연이 뿜어내는 신비로움이 전해진다. 저 깊숙한 곳에 원령공주가 진짜로 있다고 해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숲속은 봄날에 만개한 유채꽃처럼 짙푸른 이끼가 풍요롭게 피어있다. 이끼를 밟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이끼의 존재감은 강해진다. 아무래도 인간의 침입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은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몬스기의 강렬한 존재감이 점점 당연하게 느껴진다. 인간과 비슷한 나이의 것들은 이 숲에 하나도 없다. 거대한 고목들은 모두 수천 년의 시간을 품고 있다. 그래서 시라타니운스이쿄는 ‘시간의 숲’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리의 1년, 2년이 의미 없는 곳, 인간의 일생조차 찰나가 되는 숲이다.
숲은 화강암이 바다에서 솟아난 섬의 생성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단단한 화강암 위로 오랜 세월에 걸쳐 표토가 쌓였으나 불과 30cm 남짓이었다. 생육이 궁핍한 땅에서 나무가 성장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로 자라는 데 5년이 넘게 걸렸다. 그러나 느리게, 천천히 자란 만큼 단단하고 촘촘한 나이테를 품은 나무로 성장했다. 게다가 수지(나무의 기름)가 풍부해 쉽게 썩지 않으니 수천 년을 너끈히 살아낸 것. 인간은 나무가 겪은 기나긴 세월과 고통을 무시한 채 불과 30여 년 전까지 무차별한 벌목을 일삼았다. 수천 년의 삶이 인간의 욕심으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유네스코가 벌목이 시행된 지역을 제외한 약 20% 지역만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한 이유다. 야쿠시마의 주인은 숲이고, 숲의 주인은 나무다. 양분이 궁핍한 땅에서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어주며 수많은 생물과 공생해왔다. 이는 인간이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다.
-조몬스기 등산코스
아라카와 등산로 입구~고스기다니 휴게소~쿠스가와 분기점~고스기다니 바이오 화장실~오카부보도 입구~윌슨 그루터기~다이오스기~조몬스기, 편도 약 10.7km 왕복 약 8~10시간 소요.
-시라타니운스이쿄 등산코스
▶ 야요이스기 삼나무 코스, 약 2km 1시간 소요.
▶ 부교스기 삼나무 코스, 약 4km 3시간 소요.
▶ 타이코이와 코스(원령공주의 숲), 약 5.6km 5시간 소요.
-미야노우라다케 등산코스
요도가와 등산로 입구~요도가와 오두막~고하나노에고~하나노에고~구로미 분기점~나게시다이라~오키나 분기점~구리오다케~미야노우라다케, 편도 약 7.8km, 왕복 약 9~10시간 소요.
야쿠시마의 특별한 재미
야쿠시마는 섬의 형태가 원형에 가까워 현지인들은 지역을 설명할 때 시계에 빗대어 얘기하곤 한다. 그들의 언어를 빌려 1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항구가 보인다. 항구를 따라 동쪽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 안보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방향을 틀어 섬의 중심부로 향하면 줄곧 바다가 펼쳐지던 섬의 풍광은 어느새 울창한 숲으로 바뀐다. 향긋한 피톤치드에 취해 여유로운 힐링을 즐기는 사이 어느새 발걸음은 야쿠스기 자연관에 닿는다. 야쿠스기 자연관에는 조몬스기와 기겐스기에서 떨어지거나 혹은 잘라낸 나뭇가지를 보관하고 있다. 나뭇가지의 크기는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웬만한 나무만 한 나뭇가지가 거대한 고목의 규모를 짐작게 한다. 전시관에는 삼나무의 특징부터 벌목의 역사까지 한눈에 알기 쉽게 그림과 사진으로 설명해 놓았다.
야쿠시마에서는 조금 특별한 온천도 즐길 수 있다. 바다에서 즐기는 온천으로 하루에 단 두 번, 두 시간씩만 이용할 수 있는 해중 온천 히라우치다. 하루 두 번 있는 썰물 때만 갯바위 틈으로 조성된 노천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야쿠시마에서도 남단에 위치한 히라우치 온천은 바닷가에서 온천수가 솟아오른다. 저온탕과 고온탕, 족욕탕 등 3개의 탕이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바다를 곁들인 풍광은 환상적이다. 단, 남녀 혼탕으로 운영하고 있으니 기억해두자. 가장 사람이 몰리는 시간대는 오후 5시경이다. 온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석양을 감상하며 노천욕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규모가 작아 대기가 길어질 수 있으니, 시간이 생명인 여행자라면 오전 시간대를 노려보자.
시간대가 애매하다면 24시간 노천욕을 즐길 수 있는 유도마리 온천을 추천한다. 히라우치와 마찬가지로 바다 풍경을 누릴 수 있으며 아름다운 해안 절경이 펼쳐지는 노천탕이다. 총 2개의 노천탕을 갖추고 있는데 큰 것이 관광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메인 노천탕, 작은 것이 섬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노천탕이다.
강수량이 많은 야쿠시마는 야생의 폭포를 볼 수 있는 명소가 많다. 그중 하나만 봐야 한다면 단연 오코노타키 폭포다. 일본 100대 폭포 중 하나로 꼽히는 곳으로 88m 절벽을 따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물줄기를 볼 수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3~4분 정도 걸으니 굉음과 함께 물이 쏟아져 내린다. 물줄기가 거대한데도 속이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하다. 강한 물살에 폭포 주변은 물안개가 자욱해 자연의 신비로움을 극대화 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