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 압수물이 빼돌려지고 있다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전직 경감 “도박장 단속 현장에서 도박자금 챙기는 경우도”
(시사저널=정락인 객원기자)
경찰 수사 과정에서 압수된 현금 등 압수물이 몰래 빼돌려지고 있다. 현재 경찰의 압수물은 보안장치가 있는 각 경찰서의 압수물 통합 증거물 보관실에 밀봉 상태로 검찰 송치 전까지 보관된다. 불법 도박장에서 확보한 판돈, 절도범이 소지하고 있던 피해자들의 금품이나 귀금속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각 경찰서는 압수물 창고를 운영하고 있고, 담당 직원이 관리한다. 압수물은 '킥스(KICS·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 등록하고 보관한다. 압수물 관리는 각 경찰서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팀장이나 과장 등 상급자가 현황을 점검하고, 시도 경찰청에서는 분기별로 각 경찰서의 압수물 현황을 살펴본다.
고양이한테 생선 가게 맡긴 격
현재 각 경찰서의 압수물 관리는 '압수물 담당 직원' 1명이 하고 있는데, 압수물이 들어온 뒤 목록을 작성하기 전에 빼돌리면 알 수가 없다. 또 관련 수사가 길어지다 보면 금고나 압수물 보관 창고에 있는 현금이나 귀중품에 대한 관리가 허술해질 수도 있다. 압수물을 빼돌렸다가 정기점검 날짜에 다시 맞춰놓을 수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국 경찰서에서 압수물 횡령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고양이한테 생선 가게 맡기는 격이랄까.
서울 강남경찰서에서 압수물 관리 업무를 담당하던 정아무개 경사는 지난 6월부터 최근까지 불법 자금으로 압수된 현금 3억원 상당을 빼돌렸다가 적발됐다. 강남서는 압수물 현황을 살피던 중 장부와 실제 금액이 맞지 않는 점을 파악한 후 정 경사가 압수물에 손댄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압수물 관리를 맡아 자유롭게 압수물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압수된 현금 일부를 빼돌린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정 경사는 지난 7월 범죄예방대응과로 보직을 옮긴 뒤에도 범행을 이어온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정씨를 절도와 업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했다.
강남서에서 압수물 횡령 사건이 터지자 서울경찰청은 산하 경찰서를 상대로 압수물 일제 현황 조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틀 만인 10월16일 용산서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적발됐다. 형사과 소속 A 경사는 담당 사건을 수사하다가 압수한 현금 등 1억5000만원을 빼돌렸다. 강남서 사건이 터지면서 압수물 점검에 들어가자 자신의 범행이 들통날 것을 우려해 압수물 창고에 들어갔다가 발각됐다.
A 경사는 자신이 빼돌린 현금 대신 종이 뭉치를 넣어두는 수법으로 범행을 감추려고 했다. 해당 압수물은 2022년 보이스피싱 사건을 수사하면서 압수한 것으로, 수사 등의 이유로 합법적 절차를 거쳐 출고됐지만 이후 2년 동안 압수물 창고에 반납되지 않았다. 경찰은 A 경사를 업무상 횡령 혐의로 입건했다.
지난 5월 전남 완도경찰서에서는 B 경위가 압수물을 빼돌렸다가 파면됐다. 그는 도박장에서 압수한 현금 3400만원을 약 1년간 14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빼돌렸다. 횡령한 돈 대부분은 자신의 빚을 갚는 데 사용했다. B 경위는 또 강도치상 피의자에게서 환수한 90만원을 피해자에게 돌려주지 않은 혐의도 받고 있다.
압수물뿐만 아니라 유실물을 횡령한 사례도 있다. 서울 동작서 범죄예방대응질서계에 근무하던 50대 여성 행정관 C씨는 유실물로 접수된 교통카드 500여 장의 충전금 800여만원을 횡령했다. 보통 유실물로 접수된 교통카드는 경찰에서 보관하다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국고로 환수된다.
하지만 유실물 업무를 담당하던 C씨는 접수된 교통카드를 빼돌려 충전된 금액을 자신의 계좌로 입금했다. 선불식인 교통카드를 환불받으려면 현금지급기(ATM)나 편의점에서 수수료를 내고 현금으로 받거나, 연동 애플리케이션(앱)에 카드를 등록한 후 계좌로 받아야 한다. C씨의 범행은 지난 3월 한 시민이 교통카드를 잃어버린 후 교통카드와 연동된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돈이 빠져나간 사실을 알아채고 경찰에 신고하면서 꼬리가 잡혔다.
사건 현장에서 돈 빼돌리기는 더 쉬워
사건 현장에서도 압수물이 빼돌려질 수 있다. 불법 도박장, 살인이나 강도 사건 현장 등에서 경찰관이 슬쩍하면 알 수가 없다. 특히 불법 도박장의 경우에는 범인들이 정확한 현금 액수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압수 과정에서 얼마든지 빼돌릴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전직 이아무개 경감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그는 "한번은 유사수신 업체를 덮친 일이 있었다. 회장실에 갔더니 경리직원들이 돈을 빼돌리는지 감시하기 위해 달아둔 폐쇄회로(CC)TV가 있어 보고 있는데 형사 한 명이 압수하면서 몰래 돈을 주머니에 넣는 게 포착됐고 그게 녹화됐다"며 "나중에 따로 불러 혼내고 돈만 채워넣고 CCTV는 증거물로 채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던 살인 사건 현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전 경감에 따르면 "재력가 노인 살인 사건이 있어 현장으로 출동했는데, 피해 금품이 없어져 추적해 보니 형사가 슬쩍한 것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도박자금 같은 경우에도 피의자와 입을 맞추고 빼돌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압수한 도박자금이 많으면 죄도 무겁고 벌금도 더 많이 나온다. 이런 때 '얼마 빼주겠다'고 입을 맞추고 그 액수만큼 챙기면 알 수 없다"며 "절도 사건도 마찬가지다. 보통은 절도범이 어디서 얼마를 훔쳤는지 모르고 피해자가 누구인지 모를 때가 있는데 이때도 이런 식으로 말을 맞추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전 경감은 "내가 보기에는 최근 불거진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전국 경찰서를 전수조사하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나올 수도 있다. 이참에 압수물 관리에 대한 지침과 관리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전직 경감은 "경찰 업무 특성상 현장에서 압수수색을 집행하다 보면 금품을 보고 욕심이 생길 수 있다"면서 "그렇다고 몇 건의 사례를 가지고 경찰 전체가 그런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경찰 조직은 청렴한 경찰을 뿌리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아직까지 자정 능력이 부족하다"면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보여주기식으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경찰청도 압수물 횡령 사건이 잇따라 터지자 대책을 고심하고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전국 경찰서를 대상으로 범죄 압수물 관리 현황을 전수조사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증거물 관리 절차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전수조사는 경찰서 간 교차 점검 형태로 이뤄져 형식적인 조사에 그치지 않을 방침이다.
압수물 관리, 교차 점검 필요
경찰의 압수물 횡령 사건은 최근에만 불거진 것이 아니다. 이전에도 종종 있어왔다. 그때마다 경찰은 자체 점검하고 전수조사하고 대책을 내놓았지만 모두 사후약방문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이번에는 압수물 관리·감독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재 경찰서 압수물은 담당 직원 한 명이 관리하게 돼있는데, 이것을 교차 점검하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또 압수물 창고의 접근을 통제하고 내부에 CCTV 등을 설치해 상시 녹화하는 시스템도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경찰이 내부 감찰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결국 '제 식구 감싸기'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좋은 게 좋다'고 서로 봐주기식으로 하다 보니 땜질식 대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돈뿐 아니라 증거물도 사라진다…미제가 된 화성 여대생 사건
경찰에 보관 중이던 중요 증거물이 사라지기도 한다. 2004년 10월27일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 살던 여대생 노아무개씨(21)가 수영강습을 받고 귀가하다 실종된다. 노씨는 수영장에서 나와 시내버스에 승차했고,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누나 금방 갈게"라고 말했다. 어머니에게도 '집에 들어간다'는 휴대전화 문자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집에서 2km쯤 떨어진 정류장에서 하차했는데, 이 모습은 버스 안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에 찍혔다.
실종 이틀째부터는 휴대전화를 시작으로 노씨의 소지품들이 차례로 발견된다. 하나같이 오른쪽 길가에 흩어져 있었다. 차를 타고 가던 범인이 노씨의 소지품들을 하나씩 창밖으로 던진 모양새였다. 경찰은 수사본부를 꾸리고 공개수사에 들어갔으나 용의자를 특정할 만한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약 2개월이 흐른 그해 12월12일 화성시의 한 야산에서 백골 상태인 노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노씨의 버려진 유류품 중 청바지에서는 유력한 증거이자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정액이 검출됐다. 경찰은 노씨 청바지에서 검출한 DNA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냈는데, 이 과정에서 시료가 오염되는 일이 발생한다.
시료가 오염됐더라도 청바지만 있다면 다시 검출하면 됐는데, 이상한 것은 유력 증거물인 청바지의 행방이 묘연했다. 분명 경찰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경찰은 유족에게 전달했다고 했지만 유족은 "휴대전화 외에는 받은 것이 없다"며 반발했다. 살인 사건의 핵심 증거물을 수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유족에게 보낸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청바지의 소재는 지금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고, 이 사건도 미해결로 남아있다. 누가 왜 이 청바지를 숨기거나 없앤 것인지 여전히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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