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정석준 법사·수필가 2026. 5. 2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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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석준 법사·수필가

이제 며칠 후면 '불기 2570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하늘나라 도솔천 내원궁에 계시다가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데, 부처님은 왜 하늘나라를 버리시고 사바세계에 오셨을까? 부처님께서 인간세계에 오신 까닭은 오로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神)의 굴레로부터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의 역사인지 인간의 역사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간은 신의 지배를 받아 왔다. 인간이 고통과 유한의 삶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얻기 위해 신을 창조해 냈지만, 결국 인간은 신의 노예가 되어 더 큰 속박과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만 했다.

부처님 당시 인도 사람들은 인도 전통종교인 브라만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브라만교에서는 이 세상은 브라흐만(梵天)이란 신이 창조하였으므로 그 신에게 많은 재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내면 살아서는 소원을 성취하고 죽어서는 천상세계에 태어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신본주의 종교를 정면으로 배격하시고 인간이 바로 만유의 주체임을 주창하셨다.

불전(佛典)에 의하면, 부처님은 탄생하시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으시며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 내가 오직 존귀하다(天上天下 唯我獨尊)"라고 외쳤다고 한다. 부처님의 탄생설화(誕生說話)는 부처님의 출현을 종교문학적으로 비유와 상징으로 아름답게 엮어 보인 것으로, 이러한 비유와 상징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인간은 누구나 부처님과 똑같은 존엄성과 가치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며, 이는 신으로부터 '인간해방'을 의미하며, 아울러 '인간선언'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계급의 굴레로부터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부처님 당시 인도 사회는 철저한 신분사회(계급사회)였다. 가장 상류층은 제사를 담당하는 브라만계급(최상위계급)이었고, 그 다음이 크샤트리아계급(왕족․무사계급), 그 다음이 바이샤계급(평민계급)이었으며, 가장 하위계급은 수드라계급(노예계급) 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천대를 받은 계급은 말할 나위도 없이 수드라계급이었다. 수드라계급은 죽도록 일만하고 맞아 죽어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계급제도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사람은 출신성분에 의해서 브라만이 되고 크샤트리아ㆍ바이샤ㆍ수드라가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며 계급제도를 부정하시고, 가장 천민인 똥꾼 니다이의 머리를 깎여 출가시켰는가 하면, 살인자 앙굴라마의 출가를 허락하셨고, 여성의 출가도 받아들였다. 여성의 출가나 불가촉천민들을 교단에 받아들인 것은 당시로서는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세계 모든 국가는-그것이 명목적이든 실질적이든-민주국가임을 표방하고 있다. 민주국가의 근본 이념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데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은 인간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존중할 가치가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예속되거나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인간존중 사상은 서양에서는 18세기 후반 루소ㆍ존 로크 등, 계몽사상가들이 천부인권설(天賦人權說)을 제창한 이후, 수세기 동안 시민계급들이 교황권 또는 전제군주와 싸워서 쟁취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서구 계몽 사상가들이 주장한 것보다 더 철저한 인간평등과 생명존중의 사상을 펼치신 분이다.

부처님께서 이미 2,600년 전에 차별이 없는 평등사회 구현을 위해 애쓰셨지만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아직도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다는 영국을 비롯하여 일본ㆍ스웨덴 등에서는 아직까지도 봉건시대의 잔재인 국왕이 존재하고 있고, 미국 같은 나라도 인종차별이 극심하여 흑인식당 백인식당이 구분되어 있는 곳이 많이 있다고 한다.

셋째,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하므로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부처님 당시에는 소위 62견(見) 또는 360종의 이설(異說)이 난무하여 가히 제자백가(諸子百家) 시대를 이루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주의 주장들을 설파(說破)하시고 연기법으로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셨다.

연깁법(緣起法)이란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이것이란 원인이나 조건을 말하고 저것이란 결과를 말한다. 원인과 조건이 있을 때 그 결과가 발생하고 원인이나 조건이 없어질 때 그 결과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즉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고 또 그 결과를 떠난 원인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립 · 독존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다른 것과 더불어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와 나는 상대적․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他)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며, 내가 있기 때문에 네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 되고, 남을 헤치는 것이 결국 자신을 헤치게 되는 것이다. 나와 남이 본래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더불어 존재한다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사실에 확연히 눈뜰 때, 우리의 삶은 나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위한 삶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보살이다. 모든 사람들이 보살로서 동체대비(同體大悲)를 몸소 실천에 옮길 때 이 땅은 그대로 불국정토화(佛國淨土化) 할 것이다.

넷째,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임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이 연기법을 자신의 문제와 결부시켜 보면,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은 현재의 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과거의 인연에 의해서 일어났고, 또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내가 짓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행ㆍ불행, 성공과 실패가 어떤 절대 신의 뜻에 의한다든가 운명이나 사주팔자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임을 뜻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누누이 "자기야 말로 자기의 주인공이며, 행복도 불행도 자기가 만드는 것이다."(법구경)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마지막 열반에 드실 때에도 "자기에게 의지하되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 법(진리)에 의지하되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유교경)고 유촉(遺囑)하셨다.

다섯째, 고통 속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구제해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인간의 삶을 보는 견해에는 여러 가지 주의. 주장이 있다. 라이프니치와 같은 낙천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쇼펜하우어 같은 염세주의자도 있으며, 니체,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삶을 부조리와 모순으로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은 인간의 삶을 괴로움(苦)으로 보았는데, 이에 대해 사람들이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인생에는 즐거움도 있기 때문이다. 젊음과 희망, 사랑도 괴로움인가? 물론 그것이 기쁨일 수 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인생의 젊음이나 희망, 사랑은 이윽고 사라지고 오히려 괴로움의 한 양상이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면 이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가? 불교가 단순히 인생을 괴로움이라고 말한다면 불교는 하나의 철학이나 사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을 증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는 철학이면서 고등 종교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후유를 일으키고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이르는 곳마다 그것에 집착하는 갈애(渴愛)가 괴로움의 원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괴로움의 원인으로 지적된 것이 갈애이다. 갈애란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강렬하게 타오르는 인간의 욕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부처님께서는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셨다는 점이다. 흔히 불교는 일체의 욕망을 버리라고 가르치는 종교인 줄 아는 경향이 있지만 부처님께서 배격한 것은 '그릇되고 지나친 욕망'이었다. 욕망은 우리의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먹고 싶다는 욕망, 무엇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 이런 것이 과도히 흐르는 데 병폐가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송두리째 부정될 수는 없는 문제이다. 불교 본래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욕망이란 '선악 이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배고플 때 먹고자 하는 생각, 추울 때 옷을 입고자 하는 생각은 도덕이 용훼 할 영역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갈애를 남김없이 멸하고 버리고 벗어나서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하셨다.

여섯째,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으므로 부처가 될 수 있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부처님께서 35세 되든 해 12월 8일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 제일성(第一聲)으로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와 같은 지혜와 덕상이 있건마는 분별 망상으로 깨닫지 못하는구나."(화엄경)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풀이해 보면 부처님이 스스로 깨쳐서 우주 만법의 실상을 바로 알고 보니,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본래로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개발하면 스스로가 절대자가 되고 부처가 되는 것이지 절대자가 따로 있고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체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와 덕상이 있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이며, 또한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인정한 것으로서 이는 '인간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투신 까닭은 고통 속에 허덕이는 중생들로 하여금 하루빨리 '아뇩다라삼막삼보리(위 없는 바른 깨달음)'를 얻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