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불황에 억눌린 욕망, 패션 트렌드로 반영…화려함 이면에 가려진 무력감·절망감

최근 유행하는 맨살이나 속옷을 드러내는 ‘노출 패션’을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우울한 경제 상황과 관련 깊다’는 분석이 제기돼 주목된다. 속옷이 노출되는 바지, 가슴 아랫부분이 노출되는 짧은 티셔츠, 맨살이 훤히 비치는 망사 의류 등 요즘 유행하는 패션 트렌드가 불황으로 억눌린 소비 욕구와 자기표현의 갈망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다. 특히 개인을 중요하게 여기는 젊은 세대일수록 욕구와 갈망을 해소하려는 심리가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속옷의 경계를 넘어선 젊은 세대의 노출패션…화려함 이면에 가려진 무력감과 절망감
최근 속옷을 겉으로 드러낸 유명 연예인들의 노출 패션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걸그룹 블랙핑크의 멤버 제니(본명 김제니)는 속옷이 보일 정도의 짧은 바지를 입고 공식석상에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걸그룹 에스파의 멤버 카리나(본명 유지민)는 하의를 의도적으로 내려 속옷 허리라인이 드러나도록 하는 이른바 ‘새깅(Sagging)’ 스타일로 이목을 끌었다. 남성 연예인들도 마찬가지다. 혼성그룹 올데이프로젝트 타잔(본명 이채원) 역시 카리나와 비슷한 스타일을 자주 선보이고 있다.

속옷을 훤히 드러내는 노출 패션의 인기는 패션·의류 소비 트렌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이랜드월드에 따르면 올해 1~7월 여성 속옷 브랜드 ‘에블린’의 홈웨어 카테고리 매출은 전년 대비 무려 10배 증가했다.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 출생)를 겨냥한 ‘내추럴 하이틴 컬렉션’ 제품의 인기가 매출 상승을 견인했다. 가디건, 티셔츠, 반바지, 치마 등의 겉옷 제품을 속옷과 흡사한 디자인으로 만든 게 특징이다. 속옷이나 잠옷 등을 일상복처럼 입는 스타일이 SNS에서 화제가 되면서 해당 제품들은 매진 행렬을 기록 중이다.
오프라인 열기도 뜨겁다. 짧은 기장의 티셔츠와 얇고 타이트한 민소매, 허벅지가 드러나는 미니스커트 등 노출이 강한 디자인의 제품으로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 브랜드 매장은 젊은 여성들의 연일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해당 브랜드 매장에서 만난 대학생 서유진 씨(23·여)는 “속옷을 보여주는 게 딱히 선정적인 의도가 아니다”며 “속옷 또한 패션의 한 부분으로 요즘 옷값도 비싸고 트렌드도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오히려 속옷 하나로 스타일을 바꾸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고 말했다. 이어 “젊은 세대의 알뜰 소비 방식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일부 전문가들에 따르면 겉옷과 속옷의 경계를 넘나드는 패션 트렌드는 경기 불황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동안 경제 상황과 여성들의 치마 길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이론들이 수차례 등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네덜란드 에라스무스 경제대학(ESE) 계량경제연구소는 “경기 악화로 지출 욕구가 억눌릴수록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갈망하는 심리가 강해지면서 결국 패션으로 욕구를 해소하려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미국 미시간대학교 소비자행동연구소 역시 경제 상황과 패션 트렌드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이론을 내놓은 바 있다. 연구소는 발표자료를 통해 1930년대 대공황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여성 패션은 더욱 짧고 몸에 밀착되는 스타일로 변화했다는 점을 근거로 “경기 침체기일수록 개인이 통제 가능한 것에 집착하면서 자신의 몸과 스타일을 통한 표현 욕구가 강해진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 청년들이 처한 현실은 녹록치 않다. 글로벌 경기 악화로 기업들의 채용 여력이 크게 위축되면서 청년들의 취업 절벽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대학 입학, 독립, 결혼, 출산 등의 과정에서 필요한 목돈 마련의 압박까지 더해지면서 청년들이 좌절감도 커지고 있다. 대학교육연구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서울 소재 4년제 사립대 학생이 입학부터 졸업까지 감당해야 하는 ‘대학교육비’(등록금·주거비·생활비 등)는 약 1억원에 달했다. 또한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청년층 취업자는 368만2000명으로 1년 전과 비교해 15만명 줄었다. 경력직 중심의 채용과 전반적인 채용 인원 감소가 맞물린 결과다. 거듭된 취업 실패는 경제적 자립은 물론 결혼, 출산 등과 관련 깊다.
일부 국내 전문가들도 경기 불황으로 내면의 욕망을 실현하기 어려워지면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인 ‘패션’을 통해 욕망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려는 심리가 ‘노출 패션’의 인기로 이어졌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홍주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패션은 소비문화의 핵심으로 청년들은 경제 상황이 어려울수록 오히려 더 강렬한 스타일이나 더 과감한 표현 방식을 통해 우울감과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속옷 노출 역시 억눌린 감정과 자기 존재를 표출하려는 내면의 욕구를 해소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글=김성원 르데스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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