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숨겨진 휴양지'에서 보낸 가을방학
남쪽 섬에서 불어온 바람.
그 미풍을 타고 들려온, 아득한 카비라의 추억.
이시가키, 너 누구냐
인정한다. 이시가키, 여행이 직업인 나조차 낯설었다. 지도부터 살펴보자. 일본 본토에서 바다 건너 밑으로 쭉 내려가면 오키나와. 그보다 더 아래에 (최근 직항이 생겨 핫해진) 미야코지마. 그보다도 더, 더, 남쪽으로 시선을 내리면, 그곳에 이시가키가 있다. 일본보다도 바로 옆, 타이완과 훨씬 가깝다. 그럼 이시가키가 일본 최남단 섬이냐? 그건 아니다. 그보다 더 밑에 오키노토리시마(沖ノ鳥島)라는 섬이 있긴 있다. 근데 거의 암초 수준의 작은 바위섬인데다 무인도다. 그러니 사람이 사는 섬 중에서는 이시가키가 일본의 최남단이다.
위치가 이렇다 보니 가는 법이 좀 번거롭다. 우선 직항이 없다. 나고야, 홋카이도, 오키나와 등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환승시에 짐을 찾고 다시 부쳐야 하는 귀찮음도 감수해야 한다. 언젠가 선견지명이 있는 어느 국내 항공사가 직항을 뚫기로 결심한다면, '제2의 미야코지마'가 될 이시가키를 꿈꿔 볼 수도 있겠다. 나만 알고 싶은 휴양지가 세상에 까발려지는 절망감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섭섭하겠지만.
일단 도착만 했다 하면 여행의 난이도는 훅 낮아진다. 동선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시가키는 섬이다. 거의 99%의 리조트가 섬을 빙 둘러싸고 바닷가에 포진해 있다. 여행객들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리조트 단지로 바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정의 대부분을 보낸다. 참 널널하니 좋은 여행이다. 간혹 '지루한 건 못 참지' 하는 부지런한 (일부) 여행객들이 시내 투어를 하긴 한다. 시내라고 부르기엔 거의 읍내에 가깝긴 하지만, 나름 상설 시장에 돈키호테도 있다. 이시가키는 오키나와현에 속해 있기 때문에 풍토나 음식, 문화 등이 전반적으로 오키나와와 꽤 닮아 있다. 그렇다고 절대 '미니 오키나와' 정도로 축소시켜 버릴 순 없다. 그건 이 섬이 가진 독자적인 매력에 대한 큰 모욕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열도(列島)의 열도(熱度)란…, 과연 어마무시하다. 서 있기만 해도 '살이 탄다'는 말을 깊이 절감할 수 있다. 정수리부터 발가락까지, 피부에서 지글지글 연기라도 피어오를 것처럼 뜨겁다. 습도 77%. 물 안팎이 별다를 게 없다. 덕분에 10월에도 바다에서 물장구치며 놀 수 있을 정도로 수온이 따뜻하다. 여름 휴가를 놓쳤다면 가을방학을 보내 봐도 좋을 곳이라는 뜻. 마침 10월은 만타가오리가 출몰하는 시즌이기도 하다.
바다는 뭐, 말할 필요 없이 예쁘다. 근데 '예쁜 바다'에도 종류가 많다. 수수하게 예쁘거나, 화려하게 예쁘거나, 아기자기하게 예쁘거나. 사람과 똑같다. 이시가키의 바다는 조용하게 예쁘다. 어떻게 이렇게 잔잔할 수 있나 싶게 잔잔하다. 머무는 며칠 동안 큰 파도 한번을 못 봤다. 파도는커녕 가녀린 물결만이 살랑살랑 해변의 모래를 간지럽힌다. 8할은 산호초 덕이다. 이시가키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산호초 군락은 파도의 충격을 흡수하고 완화시켜 바다를 더 얌전하게 만든다. 게다가 산호초는 존재 자체로도 그냥 예쁘다. 누가 일부러 페인트로 칠해 놨나 싶을 만큼, 너무나 원초적인 원색을 지녔다. 스노클링 몇 번만 해 보면 혼을 빼놓는 그 색감에 금세 해롱대게 된다.
빌드업은 여기까지. 서론이 길었다. 클럽메드 이시가키 카비라(Club Med Kabira Ishigaki)에서 휴가를 보낸 연유를 설명하자니 원고지 8매 분량의 설명이 필요했다. 카비라를 가야 할 이유가 곧 이시가키를 가야 할 이유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카비라가 귀한 이유
알려지지 않은 리조트라는 거, 이 시대에 정말 귀하다.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한국인만큼 여행에 있어 얼리어답터에 헤비 컨슈머인 민족도 없다. 그래서 카비라는 귀하다. 카비라의 방문객 중 94%가 일본 현지인, 한국인은 겨우 1% 남짓이다. 한국인들이 전부 오키나와 본섬으로 빠질 때, 일본인들은 유유히 카비라로 향한다.
이시가키는 시골이다. 리조트 반경 20km 이내에 편의점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식당도, 카페도 귀하다. 그래서 더더욱 클럽메드의 가치는 빛을 발한다. 전 세계 클럽메드의 공통점이자 클럽메드만의 고고한 정체성, '올인클루시브'. 일정 내내 숙박, 식사, 액티비티까지 모든 게 포함! 굳이 밖을 나가지 않아도 리조트 자체가 호텔, 편의점, 식당, 카페, 놀이터에 이르기까지 '일리(조트) 다역'을 수행한다. 혹시나 해서 챙겼던 노트북은 체크아웃하는 그 날까지 한 번도 캐리어 밖을 나오지 않았다. 양궁, 줌바, 산악자전거 등 시간대별 액티비티를 따라가기에도 하루가 바빴다. 오키나와 전통 악기인 '산신' 레슨은 가장 최근에 생긴 만큼 인기가 많아 전날 미리 예약 줄까지 서야 했다. 게다가 삼시세끼에, 간식에, 바에서 제공되는 칵테일까지 챙겨 먹으려니, 어휴. 시간표라도 만들어서 다녀야 할 판이었다. 배 꺼지면 먹고 배고프면 운동하고. '건강한 돼지' 되기, 완전 가능.
리조트 구성 요소는 단순하다. 중심부에 레스토랑과 바, 수영장이 하나씩 있고, 양쪽으로 바다를 면한 반원형의 3층짜리 객실 건물이 늘어서 있다. 객실 수는 총 181개, 타입은 스위트, 딜럭스, 슈페리어로 나뉜다. 1999년 오픈, 2015년에 객실 리노베이션을 거쳤다 해도 카비라는 객관적으로 오래된 리조트가 맞다. 그런데 카비라는 급속한 발전 대신 묵직한 서비스를 택했다. 비즈니스적 미소와 억지 농담 몇 마디로 점철된 어설픈 친절함이 아니다. 투숙객 한 명 한 명의 안위를 매 순간 마음을 다해 묻고 살핀다. 팔꿈치에 작은 반창고라도 붙인 날이면 걱정 어린 질문 폭탄이 이어진다. 그 진심의 깊이가 곧 세월이 쌓은 카비라만의 노하우다. 덕분에 카비라에 머무는 동안은 누구나 조금씩 웃음이 많아지고 장난기가 발동하며, 마음의 열도가 올라간다.
노련한 G.O(클럽메드 상주 직원)들에겐 나의 휴가도, 액티비티도, 심지어 우리 아이까지도 믿고 맡길 수 있다. 만 2세부터 17세까지 연령대별로 운영되는 체계적인 키즈클럽은 카비라를 오는 50% 이상의 여행객이 가족 단위인 이유를 설명해 준다. 한국인 방문객은 없어도 한국인 G.O는 4명이나 있으니, 언어가 안 통할 걱정은 기우다.
카비라의 해변은 생애 첫 스노클링의 걸음마를 시작하기에도 완벽한 장소다. 감히 '완벽하다'는 과감한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앞서 말했듯, 이시가키의 바다는 정말 잔잔하다. 겨우 무릎 밑에 찰랑이는데도 팔뚝만 한 물고기가 헤엄친다. 까딱하단 발로 밟을 수도 있을 것처럼 가까이서. 산호초에 열대어에, 수심은 얕은데 볼 건 넘치니 아이들에겐 오픈 아쿠아리움이 따로 없다. 리조트를 돌아다니다 만나는 아이들은 대부분 새카맣게 살을 태웠다. 그 동그란 까만 콩들은 스노클링 장비를 차고 쉴 새 없이 해변가를 뽈뽈거린다. 보고 있으면 '이야 녀석들, 대단한 방학을 보내고 있나 본데' 싶어진다.
그렇게 살갗이 익어 가던 오후 5시. 해변에 벌렁 드러누워 이어폰을 꼽았다. 오늘의 선곡은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 1980년대 일본, 청춘의 정취가 뭉게구름에 짙게 묻어난다. 태양은 섬의 구석구석까지 데울 작정으로 높이높이 떠 있고. '아아, 나의 사랑은 남쪽 바람을 타고 달려 나가요.' 가볍게 떨리는 미풍 같은 그 노래가 오늘따라 더 아득하게 들린다. 남쪽 섬에서 맞는 바람. 머잖아 추억이 되어 불어올 카비라의 바람이 지금, 이시가키의 바다를 빛내고 있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클럽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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