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 보스만의 분노, 유럽을 세계 축구 보스로 만들었다

지난 10일(한국 시각) 토트넘 팬들은 7개월 만에 홈구장을 찾은 손흥민(33·LA FC)을 기립 박수로 맞이했다. 오랜 기간 몸담았던 팀을 떠나는 과정에서 잡음을 남기는 많은 스타 선수들과 달리, 손흥민은 지난 8월 팬들의 성원 속에 깔끔한 작별을 고했다. 토트넘과 2026년 6월까지 계약돼 있던 손흥민은 올여름 구단의 동의를 받아 이적하지 않았다면, 내년 1월부터 ‘보스만 룰(Bosman Ruling)’이 적용돼 자유롭게 다른 팀과 이적 협상에 나설 수 있었다. 계약 기간을 모두 채울 경우 FA(자유계약선수) 자격으로 이적료 없이 팀을 떠날 수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390억원의 이적료를 확보한 토트넘 구단과 팬들 입장에서는 손흥민이 최적의 시점에 결단을 내린 셈이다.
리버풀이 오는 1월 프랑스 국가대표 수비수 이브라히마 코나테(25)를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겨울 이적 시장에 내놓으려는 이유도 보스만 룰과 무관하지 않다. 라이프치히에서 4000만유로(약 692억원)를 들여 코나테를 영입했던 리버풀은 연장 계약을 맺지 않은 채 그의 이적료를 1400만파운드(약 276억원)로 책정했다. 코나테의 계약이 내년 6월 만료되는 만큼 이번 겨울에 정리하지 않으면 내년 여름에는 이적료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선수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염가 매각에 나선 것이다.

이렇듯 유럽 축구 이적 시장을 움직이는 핵심 원리인 보스만 룰이 오는 15일로 30주년을 맞는다. 한 무명 축구 선수의 분노에서 비롯된 보스만 판결은 30년이 지난 현재 “유럽 축구의 운명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판결의 주인공은 1990년 당시 벨기에 프로리그에서 뛰던 장마르크 보스만(61). 그는 소속팀 리에주와의 계약이 만료된 뒤 프랑스 됭케르크로 이적을 추진했지만, 리에주가 과도한 이적료를 요구하면서 이적은 무산됐다.
당시엔 유럽 축구 구단은 선수와의 계약이 종료돼도 선수에 대한 보류권을 주장하며 선수가 이적하는 구단에 이적료를 받는 게 당연했다. 이후 리에주는 보스만을 2군으로 강등하고 연봉을 삭감하는 등 보복성 조치를 취했고, 분노한 보스만은 결국 유럽사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
5년간 이어진 법적 공방 끝에 1995년 12월 15일 유럽사법재판소는 ‘소속팀과 계약 기간이 끝난 선수는 구단 동의와 이적료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팀을 옮길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유럽 축구 선수들은 계약 만료 6개월 전부터 사실상 FA 지위를 얻게 됐다. 현재 전 세계 프로 야구에서도 폭넓게 인정되는 구단의 선수 보류권을 폐지한 것은 당시에도 파격적이었다.
그 결과 축구 선수들의 연봉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구단은 핵심 선수를 지키기 위해 계약이 끝나기 적어도 2~3년 전부터 연장 계약을 서둘러야 했고, 그 과정에서 선수들이 계약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1995년 당시 유럽 최고 연봉자였던 아스널의 데니스 베르흐캄프는 연봉 130만 파운드를 받았는데, 현재 EPL 최고 주급자인 엘링 홀란은 주급만 50만 파운드를 웃돈다. 최고 스타 선수들의 연봉은 30년 사이 20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보스만 판결은 선수 연봉 상승을 넘어 유럽 축구 시장의 폭발적 성장에 불을 지폈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가 있다. 판결 이전까지 유럽 축구 클럽들은 철저히 자국 선수 중심으로 팀을 운영했고, 타 국적 선수 영입은 3~5명 정도로 제한돼 있었다.
그러나 유럽재판소가 보스만 판결을 통해 ‘EU(유럽연합) 회원국 선수는 EU 내에서 자유롭게 취업할 수 있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이로서 EU 내 축구 클럽들은 오늘날처럼 EU 소속 선수는 자국 선수로 간주해 자유롭게 계약·영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유럽 내 축구협회와 구단들은 “선수의 배만 불리고 축구 내 빈익빈 부익부를 가속화할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국경을 열고 선수들의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되는 ‘개방’이 이뤄지자 유럽 축구 산업은 가파른 성장 궤도에 올랐다.
2000년대 초 레알 마드리드는 지네딘 지단과 데이비드 베컴, 루이스 피구, 호나우두 등 세계적인 축구 스타들을 한 팀에 모으는 ‘갈락티코(은하수)’ 정책으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EU 내 스타급 선수를 대거 끌어모으면서도 외국인 쿼터에는 중남미 출신 스타 선수들을 영입할 여력이 커진 덕분이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선 러시아와 중동의 거대 자본이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 등을 인수하며 스타 영입에 천문학적 투자를 단행했다. 별들이 반짝이자 리그 흥행은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했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유럽 축구는 막대한 TV 중계권 수익을 발판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1996~1997시즌 약 25억유로(약 4조3000억원)였던 유럽 5대 리그의 매출은 최근 210억유로(약 36조3000억원)를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딜로이트는 2015~2016시즌 유럽 축구 시장 규모를 246억유로(약 42조5600억원)로 산정했는데, 8년 뒤인 2023~2024시즌에는 380억유로(약 65조8400원)까지 급성장한 것으로 분석했다.
이런 성장 과정에 “클럽 간 빈부 격차가 더 확대됐다”는 반발도 여전하지만, 거대 클럽들이 선수 영입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중·소 클럽들은 유망주를 키워내 막대한 이적료로 수익을 창출하고, 이를 선수 영입과 유망주 육성에 투자하는 선순환이 형성됐다는 시각도 있다. 유럽 축구 산업의 급속한 성장이 더 뛰어난 축구 유망주들이 모여들고 스타 선수들이 더 많이 탄생하는 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변혁의 주인공인 보스만은 지난달 벨기에 브뤼셀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유럽 어떤 나라의 재무장관이 보스만 판결만큼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면 나는 훌륭하다고 칭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보스만 본인은 보스만 룰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재판에서 승소하며 받은 보상금을 대부분 소송 비용으로 사용했고, 재판 이후에는 한동안 유럽 축구계로부터 배척당하며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지금 돌이켜보면 판결 이전은 마치 중세 시대였고, 지금은 초현대적인 시대로 넘어온 느낌”이라면서 “그래도 판결을 이끌어낸 것에 대해선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보스만 판결
유럽연합(EU) 사법재판소가 1995년 12월 15일 구단과 계약이 끝난 축구 선수가 자유롭게 팀을 옮길 수 있게 보장하고, EU 내 외국인 선수 보유 제한을 폐지하도록 판결한 것. 소송을 제기한 벨기에 축구 선수 장마르크 보스만의 이름을 딴 것으로 선수의 자유이적 권리를 선언한 의미 있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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