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1월 어느 날 새벽, 발트해 깊은 바다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중국 선적 화물선 '이펑 3호'가 갑자기 속도를 늦췄습니다.
그런데 이 배가 한 일은 더욱 기묘했습니다. 자동식별시스템을 꺼버린 채 닻을 내린 상태로 무려 180km를 항해한 것입니다.
며칠 후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스웨덴-리투아니아, 독일-핀란드를 연결하는 해저 케이블 2곳이 동시에 절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전 세계 인터넷의 97%가 흘러가는 해저 케이블을 둘러싼 '새로운 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총성이 울리지 않는 이 조용한 전쟁터에서 한국, 중국, 일본은 각자의 전략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왜 해저 케이블인가? - "전 세계 인터넷의 97%가 여길 통과한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인터넷의 거의 모든 것이 바다 밑 가느다란 광섬유 케이블을 통해 전달됩니다.
해저 케이블은 전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97%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상 기지국이나 위성보다 압도적으로 빠르고 값싼 광섬유 케이블이 오늘날 데이터의 대동맥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동북아 해역은 글로벌 데이터 흐름의 핵심 허브입니다.
한국은 아시아권 해외망이 집중되어 있으며, 미국과 직접 연결되는 케이블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동북아 해역에는 150여 개 국제 해저 케이블이 빽빽이 지나가고, 한·중·일 3국 모두 GDP의 40% 이상이 이 데이터 흐름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저 케이블 한 줄이 끊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으로 인해 일본과 연결된 수많은 해저 케이블이 손상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증권거래·클라우드·GPS 동기화까지 순식간에 마비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1,000m 심해'는 현대전 핵심 인프라 방어선으로 급부상했습니다.
실제로 벌어진 사고와 의혹들
최근 몇 년간 전 세계에서 해저 케이블 관련 '의심스러운'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2023년 타이완 마쭈 열도에서 2주 만에 동일 케이블이 2회 절단되는 기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전문가들은 "그림자 선박"에 의한 고의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2024년 10월 남중국해에서도 중국-베트남·필리핀 구간 4개 케이블이 동시에 장애를 일으켰습니다.
'앵커 드래깅' 명목의 혼합전 의심 사례로 분류되었습니다.
2024년 11월 발트해에서는 중국 선적 벌크선이 고의로 닻을 내린 상태로 운항하며 해저면의 케이블을 끊고 지나간 사실이 유럽 수사 당국 조사로 드러났습니다.
이는 장거리 작전 능력을 과시하는 사건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가장 최근인 2025년 1월에는 더욱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대만 해협에 깔린 해저 통신 케이블을 중국 화물선이 고의로 절단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대만 당국이 한국에 해당 선박에 대한 수사 공조를 요청했습니다.
파손된 케이블은 미국 AT&T와 일본 NTT, 한국 KT, 중국 차이나 텔레콤 등이 참여한 국제 컨소시엄 소유의 태평양 횡단 케이블(TPE)의 일부였습니다.
중국의 양면전략: "끊을 수도, 깔 수도"
중국은 해저 케이블 분야에서 공격과 장악이라는 양면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최근 중국이 전 세계 해저 통신망을 붕괴시킬 수 있는 강력한 '심해 케이블 절단 장치'를 공개했습니다.
2025년 진수된 '광동(Guangdong)-51'급은 수심 6,000m에서 암(岩)을 절단하는 로봇 암을 탑재했으며, 서방 정보기관이 "세계 최초 '케이블-커터' 특화함"이라며 경계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일환으로 2015년부터 추진한 디지털 실크로드 정책을 통해 향후 데이터 산업의 폭발적 성장이 예상되는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과 디지털 연계성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태평양·인도양 신규 케이블 90%를 중국 기업이 시공·유지관리하며 데이터·해저 지형 정보를 독점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중국의 HMN Tech(前 Huawei Marine Network)가 급속히 성장해 2019년 기준 전 세계 해저케이블 시장의 11.4%를 차지했으며, 2025년에는 시장점유율 20%까지 넘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스파이 의혹도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중국 국영 수리선이 태평양 해저 케이블을 조작해 데이터를 도청하거나 손상할 수 있다고 미국 정부가 경고했습니다.
일본의 대응: "손대면 바로 추적"
일본은 선제 감시와 신속 복구에 중점을 둔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2024년 해상자위대가 '케이블 보호구역' 법제화를 완료했습니다.
일본 EEZ 내 케이블 50m 이내 선박 투묘·저속 항해를 금지하고, 위반 선박은 JMSDF 해상초계기로 실시간 추적합니다.
또한 일본은 심해 드론과 민·군 합동 복구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신카이 6500·D7 무인잠수정이 평균 60시간 내 손상 구간을 찾아 용접·재매설해 'MTTR(복구 평균시간)'을 절반으로 단축했습니다.

일본의 해저 케이블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해저케이블 기술을 갖춘 나라는 현재 미국, 중국, 일본, 영국, 프랑스, 싱가포르 정도이며 한국의 해저케이블 산업은 후발주자입니다.
일본의 NEC Corporation은 전통적인 해저케이블 3대 강자 중 하나로 꼽힙니다.
한국의 전략: "늦게 뛰어들었지만, 규범 선도한다"
한국은 후발주자 신분을 딛고 독특한 접근법으로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통합 모니터링 체계: 2024년 국방부·해경·과기부 합동 '해저인프라 TF'를 구성했습니다.
육군 사이버작전사·해군 특수잠수대(SSU)가 수심 1,500m 케이블 매설지도를 통합해 실시간 이상 징후를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부산은 2027년까지 GDCF(글로벌 데이터 케이블 파크)에 6개 신규 케이블을 집결시켜 "한류 해저 케이블 교차점"을 육성하겠다는 청사진을 추진 중입니다.
부산과 거제는 지리적으로 아시아-태평양의 허브(Hub)가 될 수 있고 또한 물가도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한국이 통신허브의 중심으로 떠오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심해 케이블 기술력 추격는 LS전선이 시작했습니다.
LS전선은 2009년 3300억 규모의 진도-제주 122km짜리 해저케이블 사업을 따내면서 해저케이블 '국산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 국내 기업 최초로 미국에 해저케이블을 수출한 것도 한국 LS전선의 성과입니다.
현재 LS전선은 "100% 토종 기술로 만들어진 해저케이블 공장"을 운영하며 아시아 전선 강자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취약점도 명확합니다.
한국에서 해외로 연결되는 해저케이블은 현재 총 11개입니다.
이 케이블의 대부분은 거제와 부산 등 동남권 육양지(Landing Site)를 통해 해외로 연결되는데, 11개의 해저케이블 중 9개는 중국 및 사실상 중국의 영향력 하에 놓인 홍콩을 거쳐 해외로 연결됩니다.
한국 케이블의 70% 이상이 중국 의존적인 구조라는 뜻입니다.
다가오는 '그레이존' 3대 시나리오
전문가들은 해저 케이블을 둘러싼 향후 위협을 세 가지 시나리오로 분류합니다. 첫 번째는 탭핑(Tapping)으로, 600Gbps 광섬유 한 가닥만 도청해도 금융·국방 기밀이 실시간 유출될 수 있습니다.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강대국들은 해저 케이블에 손댈 수 있는 특수 장비를 갖춘 원자력 잠수함을 보유 중입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적국의 해저 케이블을 도청하고 유사시에는 해저 케이블을 절단해 적국의 통신망을 마비시키는 작전을 수행합니다.

두 번째는 지연(Delay-Denial) 전략입니다.
공식 충돌은 피하면서 지연·절단으로 상대국 경제에 타격을 주는 방식입니다.
해당 선박이 고의로 닻을 내린 상태로 운항하며 해저면의 케이블을 끊고 지나간 사실이 이런 전략의 실제 사례입니다.
이는 전면전 없이도 상대방에게 심각한 경제적 피해를 줄 수 있는 교묘한 수법입니다.
세 번째는 법적 공백 활용입니다.
UNCLOS에 '케이블 공격' 처벌 조항이 미비해 "누가 했는지 몰라"식 부인전략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많은 해저 케이블 절단 사건들이 '우발적 사고'로 포장되어 국제법적 처벌을 피해가고 있습니다.
Quad 외교장관회의(2024 도쿄)는 이 공백을 겨냥해 "해저 케이블 보호 국제 규범 제정"을 최우선 과제로 선언했습니다.
대응책과 전망
현재 각국의 대응 능력에는 상당한 격차가 존재합니다.
실시간 탐지 능력 면에서 일본이 80%, 한국이 60%, 중국이 70% 수준으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AI-소나·위성 AIS 통합으로 5분 내 탐지 시스템 구축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입니다.
바다 밑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포착할 수 있어야만 선제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복구와 우회 능력에서도 격차가 드러납니다. 일본이 2일, 중국이 2.5일, 한국이 3일이 소요되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단 몇 시간의 차이가 국가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따라서 다경로 케이블·저궤도 위성 백업 체계 구축이 시급합니다.
하나의 루트가 막히더라도 즉시 우회할 수 있는 다중화 시스템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의 생명선입니다.

법적·제도적 기반에서는 각국이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국이 '해저케이블 보호법' 초안을 마련했고, 일본은 이미 시행 중이며, 중국은 아직 미비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해저 케이블은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북아 3국이 공동훈련·정보공유 협약을 체결하여 협력 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경쟁은 하되 공멸은 피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국경제인연합회는 최근 관련 보고서에서 '중국 업체보다 비용 측면에서는 다소 경쟁력이 떨어지더라도 중간 수준 이상의 품질과 기술력, 그리고 투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경영활동을 이어 나간다면 글로벌 해저케이블 시장에서 우리 기업의 시장점유율을 늘릴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심해 1,000m, 총성이 없는 전쟁터
케이블을 지키는 일은 총알·미사일보다 데이터와 경제를 지키는 전쟁입니다.
표면은 평온해 보여도, 바닷속에서는 한국·중국·일본이 절삭·도청·복구·방어 기술을 겨루며 주도권을 다투고 있습니다.
한국이 뒤처지지 않으려면 ① 심해 감시 네트워크 통합 ② 국제규범 주도 ③ 케이블-위성 다중화로 "디지털 실크로드"의 급소를 스스로 지키는 전략이 필수입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은 2022년에 가장 큰 해저 케이블 시장 점유율을 차지했습니다.
이 지역에서의 주도권 확보는 곧 글로벌 데이터 패권과 직결됩니다.
"바다는 깊고 어둡지만, 데이터 줄기는 더 깊이 흐른다."
우리가 모니터를 보는 순간에도, 심해 1,000m 전장은 멈추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