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
빛바랜 앨범 속,
웃고 있는 낯선 얼굴들.
분명 나의 어린 시절인데
기억나지 않는 풍경과 사람들.
시간은 색깔뿐 아니라 존재마저 탈색시키는가.
사진 속 아이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세상을 다 가진 듯 웃고 있다.
그 옆의 어른들은 조금 어색한 미소.
어쩌면 아이의 웃음 뒤에 가려진
그들의 불안과 슬픔을 나는 이제야 읽는다.
손가락으로 사진 표면을 쓸어본다.
매끄러운 감촉 아래
잡히지 않는 시간의 결이 느껴진다.
이 네모난 종이 한 장에 갇힌 순간은
영원히 현재가 되지 못하고
과거라는 박물관에 전시될 뿐.
나는 왜 이 사진들을 꺼내 보았을까.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 했을까,
아니면 지금의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까.
사진 속 아이는 여전히 웃고 있다.
그 웃음이 이제는 조금 슬퍼 보인다.
마치 영원히 반복될 연극의 한 장면처럼,
벗어날 수 없는 프레임 안에서.
앨범을 덮는다.
먼지 쌓인 시간 위로 다시 어둠이 내린다.
얼룩진 컵
테이블 위에 놓인 컵 하나.
어제 마셨던 커피 자국이
안쪽 벽에 갈색 고리를 그리고 있다.
마치 지나간 시간의 나이테처럼.
설거지를 해도 희미하게 남는 얼룩은
지우려 할수록 더 깊이 스미는 기억 같다.
누군가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
나누었던 온기,
이제는 식어버린 대화들.
투명했던 유리는
겹겹이 쌓인 흔적들로 조금씩 흐려진다.
저 얼룩은 완고한 고집일까,
아니면 차마 떠나지 못한 미련일까.
물을 채우면
갈색 얼룩은 물결 아래 잠시 몸을 감춘다.
하지만 물이 비워지고 나면
어김없이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러나 분명히 거기에 있다는 듯이.
나는 빈 컵을 다시 테이블 위에 놓는다.
씻어낼 수 없는 얼룩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어쩌면, 저 컵에게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오늘도 컵 안에는 어제의 시간이 고여 있다.
빗물 젖은 창문
창밖에는 비가 내린다.
유리창 위로 빗방울들이 모여들어
굵은 물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린다.
세상의 풍경은 그 물길 뒤에서
일그러지고 번져 보인다.
나는 창 안쪽에 있다.
빗소리는 들리지만, 젖지는 않는다.
투명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는 안전한 관찰자가 된다.
저 빗물은 슬픔일까, 정화일까.
김이 서린 창문에 손가락으로 낙서를 한다.
의미 없는 선들을 긋다가
이내 지워버린다.
내 마음속 풍경도 저렇게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빗물은 창틀에 고여 작은 웅덩이를 만든다.
그 안에 비친 하늘은 더 깊고 어둡다.
마치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입구처럼.
저 웅덩이 속으로 뛰어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비가 그치고 나면
창문에는 얼룩덜룩한 빗물 자국만 남을 것이다.
선명했던 경계는 다시 흐려지고,
안과 밖은 잠시 혼동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창가에 서서
비가 남기고 간 흔적들을 바라본다.
내 안에 고인 투명한 슬픔처럼.
낡은 필름처럼
잿빛 공기 속에서 눈을 뜬다
육신이라는 낡은 외투를 걸치고
어제의 흔적이 얼룩진 방 안,
시간은 먼지처럼 내려앉는다
칫솔은 무감각하게 이를 닦고
거울 속 나는 흐릿한 초상
신발 끈을 매는 손가락 끝에
의미 없는 몸짓만이 남는다
무심한 거리 위를 표류하듯 걷는다
표정 없는 사람들의 강물 속에서
나 홀로 떠 있는 섬
익숙한 풍경은 닳고 닳은 캔버스
어떤 새로운 색도 입혀지지 않는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반복되고
내일 또한 다르지 않으리란 예감
낡은 필름처럼 돌아가는 하루는
삐걱이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이것이 삶이라면,
희망은 어디에 발 디딜 곳 있나
숨 막히는 이 평범함 속에서
절망은 나의 유일한 동의어
색 바랜 광고판
오래된 건물의 귀퉁이에는 색 바랜 광고판이 붙어 있습니다. 한때는 선명했을 색채는 도시의 먼지와 세월의 비바람 아래 희미한 얼룩으로만 남았습니다. 저것이 무엇을 선전했었는지, 어떤 꿈과 욕망을 부추겼는지 이제는 알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 찬란한 미래를 약속했거나, 잠시의 위안을 속삭였을지도 모릅니다.
주변으로는 새로운 빌딩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더 밝고 요란한 빛들이 밤을 잠식합니다. 자동차들의 경적 소리와 분주한 발걸음 속에서, 저 낡은 광고판은 마치 다른 시간 속에 정지된 섬처럼 보입니다. 누구도 그 앞에 멈춰 서서 의미를 되새기지 않습니다. 그저 무심한 배경의 일부일 뿐입니다.
가끔 바람이 불면, 헐거워진 모서리가 벽에 부딪히며 희미한 소리를 냅니다. 그것은 잊힌 언어의 마지막 발음 같기도 하고, 시간의 침묵이 내는 낮은 신음 같기도 합니다. 화려했을 과거의 잔영은 이제 초라한 흔적으로 남아,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을 힘겹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저 광고판 아래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을까요. 각자의 희망과 절망을 품고, 저마다의 속도로 삶을 살아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도시의 소음 속에 흩어졌고, 광고판은 그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을 테지요.
이제 저 빛바랜 사각형은 어떤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습니다. 약속도, 유혹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침묵 속에서, 지나간 시간의 무게와 사라진 것들의 잔상이 더 깊게 느껴집니다. 화려함이 모두 지워진 자리에 남은 것은, 시간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모든 것이 결국은 희미해진다는 담담한 진실뿐입니다. 저 낡은 광고판은, 어쩌면 도시 전체가 꾸는 덧없는 꿈의 한 조각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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