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스포츠카, 럭셔리카 경계를 오간다...벤틀리 벤테이가 아주르
롤스로이스, 벤틀리, 마이바흐는 흔히 세계 3대 명차로 꼽힌다. 이들이 만드는 자동차의 공통점은 오너의 주문을 통해 장인이 수작업으로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기계가 알아서 만들어내는 대량 생산 자동차가 아니라 사람의 손길로 만들어지는 일종의 작품이라는 점이 키포인트다.
장인의 손길이 더해질 뿐 아니라, 오너마다 원하는 색깔, 소재 등이 다르기 때문에 도로 위에 같은 자동차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위 언급한 세 브랜드가 시장에 선보이는 자동차가 같은 성향을 갖는 건 아니다.
특히 벤틀리는 ‘모터스포츠’ 헤리티지를 바탕으로 스포츠 성향이 짙은 자동차를 줄곧 내놨다. 현재 벤틀리가 시판하는 라인업은 플라잉스퍼, 컨티넨탈, 그리고 SUV 벤테이가다. 세계 3대 명차 반열의 브랜드가 세단 및 그랜드 투어러 라인업으로 목에 힘을 주고 있던 당시 벤틀리는 최초로 자사의 대형 SUV 벤테이가를 내놨다. 그리고 벤테이가의 한국 데뷔가 이뤄진 장소는 ‘용인 스피드웨이’였다.
당시 기자는 벤틀리 벤테이가와 관련한 잡지 기사를 찾아 읽으며 전율했던 기억이 있다. 벤틀리 벤테이가를 실제로 경험했을 땐 어떨까. 벤틀리가 준비한 벤테이가 엑스트라오디너리 드라이브 행사를 통해 벤테이가 아주르를 시승했다.
벤테이가 아주르의 외관 디자인은 벤틀리 가문 패밀리룩을 고스란히 입었다. 네 개의 원형 헤드램프와 격자무늬 그릴은 벤틀리의 상징이다. 헤드램프와 라디에이터 그릴은 조금 더 다가가서 봤을 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헤드램프는 ‘컷 크리스탈 이펙트’가 적용돼, LED 램프가 발광하지 않을 때에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라디에이터 그릴의 경우 크롬 장식이 돋보인다. 다만, 실제 크롬 소재는 아니다. 보행자 안전 규정을 준수하기 위해 플라스틱 소재를 적용했다.
놀라운 건 전면 범퍼부터 헤드램프 그리고 휀더까지 덮고 있는 알루미늄 패널이다. 이음매 없이 한 덩어리로 만들어 우아한 곡선미가 돋보인다. 이는 슈퍼포밍(Superforming) 공법을 채택한 결과다. 슈퍼포밍 공법이란 알루미늄 패널을 500℃까지 가열한 뒤, 공기 압력을 활용해 형태를 가공하는 기술이다.
누군가는 제네시스 준대형 SUV GV80과 벤틀리 벤테이가가 닮았다고 말한다. 벤틀리 디자인을 맡았던 루크 동커볼케 그리고 이상엽 현대차 디자인 총괄의 손에서 나온 작품이라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다만, 차체를 자세히 봤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디테일에서 벤테이가는 몇 수는 더 앞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소한 디테일이 럭셔리 자동차와 프리미엄 자동차를 가르는 지점이겠다.
후면 디자인은 2020년 부분변경에서 가장 크게 바뀐 부분이다. 테일램프 형상은 3세대 컨티넨탈 GT의 타원형을 그대로 따랐다. 테일램프가 차지하는 면적이 작아지면서 럭셔리 SUV 특유의 위엄은 줄었지만, 스포티한 성향은 배가 됐다. 뿐만 아니라 부분변경으로 테일게이트가 차지하는 면적도 넓어졌으며, 번호판 위치도 리어 범퍼로 이동했다.
실내 디자인도 럭셔리의 진수다. 센터페시아는 카본으로 장식했다. 카본 무늬를 입힌 플라스틱이 아니라, 리얼 카본이다. 단순히 플라스틱 소재로 마감하는 송풍구를 비롯한 모든 버튼의 마감은 스틸 소재가 적용됐다.
통상 손이 잘 닿지 않는 부분은 생 플라스틱 또는 우레탄 소재로 마감하는 경우가 다수지만, 럭셔리 브랜드 벤틀리에서 이런 잔재주는 허용되지 않는다. 가죽을 비롯한 호화로운 소재들을 아끼지 않는다. 공조 장치의 송풍량은 다이얼을 밀고 당기는 것으로 각각 조절한다. 기계식으로 송풍량이 조절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센서를 통해 다이얼 깊이를 인식한 뒤 풍량을 조절하는 전자식이다.
센서를 각각 적용해야 해 생산비용이 늘어난다. 그래서 일반 대중차에서 보기 드문 방식이다. 다이얼을 누르고 한 박자 늦게 풍량이 조절되는 건 아쉽지만, 다이얼에 적용된 스틸 소재의 고급감과 아날로그틱한 조작 감성은 한 박자 늦은 반응을 충분히 상쇄하고 남는다.
최신 자동차는 스티어 바이 와이어(SBW) 기술을 적용하면서 컬럼식, 버튼식, 다이얼식 등으로 기어 쉬프터의 형태를 다양하게 바꾼다. 이들의 목적은 실내 공간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벤테이가 아주르의 기어 쉬프터는 기계식은 탈피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상단의 벤틀리 버튼을 누르고 위·아래로 밀고 당겨 변속하는 방식이다. 벤틀리는 당분간 전통적인 기어 쉬프터 형태를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공개된 4세대 컨티넨탈 역시 이를 그대로 지키고 있어서다.
기어 쉬프터 하단으로는 주행 모드 변경 다이얼과 시동 버튼 그리고 에어 서스펜션 조작, TCS OFF 버튼 등이 마련됐다.
2열로 자리를 옮겼다. 럭셔리 SUV답게 2열 편의장비도 호화롭다. 휠베이스가 2995mm로 3m에 달하는 수치치고 2열 공간은 생각보다 넉넉치는 않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성인 2명이 타기에 넉넉한 공간이다.
2열 시트 역시 몸을 푸근하게 감싸는 착좌감이 일품이다. 시트에 수작업으로 새겨진 벤틀리 로고는 스티치 장인이 한 땀 한 땀 엮은 흔적이 남아있다. 1열 시트백에 마련된 접이식 테이블은 만듦새가 좋다.
접고 펼 때, 견고한 기계 장치가 맞물려 있는 느낌이 전해지고 유격을 찾아보기 힘들다. 테이블 크기는 스마트폰 하나 정도 올라가는 사이즈다. 2열 탑승객이 간단히 식사나 노트북으로 업무를 볼 때 요긴하게 쓰일 수 있겠다.
2열 탑승객을 위한 공조장치 송풍구는 센터 콘솔 후방 및 B필러에 마련됐다. 럭셔리 SUV에서 이정도는 기본이다. 특별한 점은 차량 전반 기능을 제어할 수 있는 '5인치 소형 태블릿'이다. 평소에는 센터 콘솔 일체형 디스플레이인양 숨어있다가 버튼을 누르면 탑승객에게 다가온다.
태블릿으로 조작할 수 있는 기능은 무드 램프, 2열 공조 조작, 2열 시트(통풍, 열선), 2열 윈도우 커튼 등이다. 통상 프리미엄급 자동차는 2열 공조장치 조작을 위해 허리를 숙여야 하지만, 벤테이가 탑승객은 시트에 기대어 앉아 여유롭게 조작할 수 있다.
호화로운 소재 사용으로 고급감을 챙겼지만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벤틀리 벤테이가는 2015년 출시된 이후 2020년 한 차례 부분변경을 진행했다. 부분변경을 통해 디지털 계기판을 적용하고 센터 디스플레이 크기를 10.9인치로 늘렸다.
디스플레이 크기가 커짐에 따라 다양한 기능과 정보를 센터 디스플레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활용도는 좋아졌지만, 센터페시아 구성에서 아쉬움이 느껴진다. 폭스바겐 자동차에서 자주 보이던 구성이라 좀 그렇다.
벤틀리 플라잉스퍼의 경우, 센터 디스플레이에 총 3개의 면을 가진 로테이팅 디스플레이가 적용됐다. 평소에는 12.3인치 디스플레이를 숨기고 깔끔한 면을 보인다. 이후 센터 디스플레이가 필요할 때 면을 바꾸면서 숨어 있던 12.3인치 디스플레이가 나타난다.
다른 한 면에는 3개의 아날로그 게이지로 채웠다. 외기온도, 나침반 그리고 크로노미터로 구성했다. 운전자가 주로 사용하는 기능은 분명 센터 디스플레이다. 어떻게 보면 로테이팅 디스플레이는 실효성은 없고, 잔고장을 유발할 수 있는 부분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와우 팩터가 럭셔리 자동차에 필요한 요소임은 분명하다.
이제 본격적인 도로 시승에 나선다. 시승 코스는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벤틀리 타워에서 출발해 가평의 1·2차 행선지를 찍고 다시 벤틀리 타워로 복귀하는 코스다. 거리만 놓고 봤을 때 약 150km에 달하는 중거리 시승이다.
시동 버튼은 주행 모드 변경 다이얼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시동을 걸면 4.0L V8 가솔린 터보 엔진이 으르렁거리며 깨어난다. 서울 도심을 빠져나오는 동안 V8 엔진이 내는 부드러운 회전질감과 벤테이가의 에어 서스펜션 완성도를 느끼기 충분했다.
에어 서스펜션은 가벼운 노면 요철을 가뿐히 걸러주고, 4.0L V8 가솔린 터보 엔진은 저회전 영역에서 출력을 부드럽게 높인다. 운전하면서 피로감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부분을 대폭 삭제한다.
주행 모드는 온로드 4가지, 오프로드 4가지로 구성된다. 시동을 걸었을 때 기본이 되는 주행 모드는 ‘벤틀리 모드’다. 일반적인 자동차라면 '노말' 또는 '컴포트' 모드가 기본이겠지만 벤틀리는 브랜드명을 모드에 새겼다. 엄청난 자신감이다.
그렇다면 벤틀리 모드는 어떨까. 가속 페달을 얇게 밟으면 럭셔리카의 진수를 보여준다. 4.0L V8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은 저회전 영역에서도 넉넉한 토크로 육중한 벤테이가를 부드럽게 가속시킨다. 부드러운 배기음이 들리는 가운데, 속도는 어느덧 100km/h를 상회한다. 내부로 유입되는 풍절음 등 주행 소음이 적어 체감되는 속도는 70km/h 수준이다.
가속 페달을 절반 이상 밟으면 금세 얼굴을 바꾼다. 벤테이가는 눈치가 빠르다. 운전자가 본격적으로 달리고 싶어한다는 걸 금세 눈치채고 기어 단수를 내린다. 기어 단수만 내리는 것이 아니다. 에어 서스펜션의 댐핑 압력을 순식간에 높여 탄탄한 승차감을 구현한다. 마치 “달리고 싶으면 언제든지 달려. 난 준비됐어”라고 대화를 거는 것 같다.
달리기 성능은 말할 것도 없다. 속도계에 새겨진 최고속도는 320km/h다. 다시 말하지만 벤틀리 벤테이가는 대형 럭셔리 SUV다. 스포츠카가 아니라는 말이다. 무서운 지점은 320km/h가 허풍이 아니라는 점이다. 290km/h에서 속도 제한이 걸린다. 하지만 약 100km/h에서 재가속에도 속도계 바늘을 무섭게 밀어올리는 것을 보면 320km/h라는 속도는 충분히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직선 주로에서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게 만드는 것과 코너링도 빠르게 달리게 만드는 것은 난이도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사실상 직선 주로에서 속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건 출력이다. 반면, 코너링 상황에서는 기민한 차체 거동을 위해 복잡한 서스펜션 세팅 등이 부가돼야 한다.
벤테이가는 코너링도 재빠르게 달릴 수 있는 SUV다. 특히 ‘스포츠 모드’를 활성화하면 벤틀리의 모터스포츠 헤리티지를 만끽할 수 있다. 스포츠 모드가 존재감을 발휘하는 건 연속된 코너가 잦은 와인딩 코스다. 가평 유명산 와인딩 코스를 만나자마자 '스포츠 모드'를 활성화했다.
항시적으로 에어 서스펜션의 댐핑 압력을 탄탄하게 하고, 엔진 회전수를 3000RPM 이상으로 유지한다. 코너를 돌고 돌다 보면 지금 몰고 있는 차가 중량 2500kg의 SUV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기민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SUV는 세단에 비해 태생적으로 전고가 높기 마련이다. 험지 주파를 위해 탄생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벤테이가 아주르는 일반 SUV와 결을 달리한다. 밴틀리 다이내믹 라이드(Bentley Dynamic Ride)와 전자제어식 올 휠 스티어링이 운전자 모르게 적극적으로 개입한 덕이다.
밴틀리 다이내믹 라이드와 전자제어식 올 휠 스티어링은 찰떡궁합이다. 전자식으로 차량의 좌우롤링을 최대한 억제해 운전자에게 일차적인 안정감을 전하고 후륜 조향을 기반으로 매 코너를 기민하게 돌아나가며 운전 재미까지 전해준다.
대형 럭셔리 SUV라면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조금만 과격하게 코너를 돌아나가려고 하면 차체 자세가 손쉽게 무너지고 타이어가 무거운 공차 중량에 짓눌리며 비명을 지를 게 뻔하다. 대형 럭셔리 SUV를 몰며 ‘운전 재미’라는 단어를 꺼낼 수 있는 건 벤틀리만의 강점이겠다.
벤틀리 벤테이가는 럭셔리카와 스포츠카의 경계를 손쉽게 오간다. 평소에는 럭셔리카에 알맞은 부드러운 승차감과 정숙성을 발휘하지만 운전자가 달리고 싶어할 땐 여지없는 스포츠카로 돌변한다. 같은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람보르기니 우루스나 포르쉐 카이엔은 '달리기 성능'이 중점이다.
상대적으로 아우디 Q8, 폭스바겐 투아렉은 프리미엄 브랜드와 대중차 브랜드 사이의 합리성에 초점을 맞췄다. 같은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SUV인 벤테이가와 같은 성격인 자동차는 찾기 힘들다. 롤스로이스 컬리넌, 메르세데스-마이바흐 GLS 등 3대 명차 반열의 SUV와 비교했을 때도 그렇다.
벤틀리 벤테이가 아주르의 가격은 3억 1760만원부터 시작한다. 수많은 옵션을 조합하면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른다. 뿐만 아니라 장인의 손을 거쳐야 하는 만큼 짧으면 8개월, 길면 1년 이상의 기다림도 필요하다. 이에 한국 구매자는 한국형 모델에 색상을 변경해 출고하거나 벤틀리 인증 중고차를 사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벤틀리 인증 중고차는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가격에 기다림 없이 벤틀리 자동차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벤틀리 공식 테크니션을 통해 79가지 항목의 철저한 차량 인증 점검을 진행한다. 차량 정비 이력 및 벤틀리 인증 증명서를 제공한다.
여기에 12개월 연장 보증 서비스가 제공되는 건 가장 큰 매력이겠다. 벤틀리 자동차 구매를 고려 중이라면 벤틀리 타워를 한 번쯤은 찾아보자. 벤틀리가 인증한 자동차들이 새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한 줄 평
장 점: 벤틀리 헤리티지! 스포츠카와 럭셔리카의 경계를 오가는 주행 감각..럭셔리의 진수
단 점: 너무 쉽게 찾을 수 있는 폭스바겐 그룹의 흔적..럭셔리 감성을 해친다
서동민 에디터 dm.seo@cargu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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