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OO가 죽였다"..신당역의 메모들
■ "절대 보복할 수 없도록 엄벌을 내려주세요."
'신당역 스토킹 살인'의 피해자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법정에서 했던 말이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형사·사법 체계는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았다.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던 가해자 전주환은 9월 14일 밤 신당역 화장실에서 피해자를 살해했다. 앞서 본인이 저지른 스토킹에 대한 선고가 내려지기 하루 전이었다. 그의 스토킹 범죄는 법정에서 단죄되기도 전에 '2차 범죄'로 이어진 것이다. 살인으로 미뤄진 스토킹 판결은 내일(29일, 1심) 내려진다. 검찰의 구형은 징역 9년이었고 전주환은 그 구형이 있던 당일 '보복'을 결심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스토킹이 강력범죄의 전조라는 것은 예전부터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간의 노력 끝에 겨우 처벌법을 만들었지만 판사의 경솔함에 우린 또 자매를 잃었다."
사건이 발생한 신당역 2호선 여자화장실 앞에는 위와 같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스토킹 처벌법은 발의된 지 22년 만인 지난해 3월 국회를 통과했고 10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22년… 우리 사회가 스토킹을 '중범죄'로 받아들이는 데 걸린 시간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 구멍 뚫려 있었던 '법'
피해자가 스토커 전주환을 고소했던 것은 지난해 10월이다. 마침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되기 시작한 그 무렵이다. 당시 경찰은 불법 촬영 혐의로 전주환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는데, 법원은 "도주 우려가 없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현행법 상 구속영장의 발부 요건은 <주거 불명확, 도주, 증거인멸 우려> 등으로 한정되며, 기타 정상 참작에 있어서도 '앞으로 벌어질지 모를' 추가 피해의 가능성은 사실상 외면 받아왔다. '이미 벌어진' 범죄(피해)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우리의 구속심사 기준이었다. 피해자를 2차로 해칠 가능성은 기껏해야 '참고' 사항일 뿐 구속의 핵심 요건으로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 등의 사법부는 '미래의' 가해나 재범 우려도 구속 사유로 명시하고 있고, 미국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피의자의 보석을 엄격하게 제한한다. 국내에선 이번 신당역 사건이 터지고서야 비로소 스토킹 범죄자 구속 체계에 대한 보완 논의가 시작됐다.
■ "나라가 죽였다"
신당역 추모공간에 붙은 메모들의 상당수는 위와 같이 국가의 책임을 묻고 있었다.
"어떠한 죽음의 가해자는 국가와 사회다"
"대한민국 정부는 범죄를 더이상 용인, 묵인하지 말길 바란다!"
"가해자 영장 기각한 판사와 법원은 반드시 피해자와 유족들께 사죄해라."
지난해 피해자가 전주환을 고소했을 때 경찰은 당사자가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강력한 신변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스토킹 처벌법이 제공하는 긴급조치의 대부분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접근 금지' 같은 것이 대표적인데, 만일 가해자가 이 감시망을 순간적으로 벗어나 피해자에 접근해 들어갈 때는 '1:1'의 무방비 노출 상황이 빚어진다. 따라서 스토킹 처벌법과는 별도로 '피해자 맞춤형' 지원에 초점을 두자는 <스토킹 피해자 보호법>도 발의됐지만 아홉 달 넘게 국회에 묻혀 있었다. 이번에 신당역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의원들이 해당 법안을 꺼내들어 논의 테이블에 올렸다. '반의사 불벌죄(피해자가 처벌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가해자를 벌하지 않는다는 조항)' 도 뒤늦게 결국 폐기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천금 같은 목숨 하나를 잃고서야 우리 사회는 또 '사후약방문'을 모색하고 있다.
■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
강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가해자의 개인적 '사연'을 취재해 경쟁적으로 알리는 언론들이 적지 않다. 범행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인과(因果) 고리들, 심신미약라든가 정신질환 등의 특수 이력, 심지어 성장 배경까지 거론해가며 범죄에 어떤 '개연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전주환의 개인사에 대해서도 왈가왈부 여러 보도가 뒤따랐다. 그러나 그 어떤 '개인사'도 범죄를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일어날 만해서 일어났다'는 도식은 적어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거나 심각하게 해친 사건에 있어서는 거론할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재판관들은 종종 피고 개인사정을 바탕으로 써 낸 '반성문'에 기꺼이 감형이나 선처를 베풀고는 하지만, 그것은 '피해 당사자'의 용서와는 근본적으로 무관한 것이고 어쩌면 또 하나의 '2차 가해'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신당역 사건의 전주환 역시, 앞선 스토킹 재판 과정에서 판사 앞으로 반성문을 써 보냈다.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싶다며 합의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뒤로는 끔찍한 2차 범죄를 도모하고 있었고 기어이 실행으로 옮기고 말았다. 지난해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된 이후 상당수 가해자들이 이런 식으로 '앞 뒤가 다른' 행태를 보여왔다. KBS가 최근까지의 판결문들을 입수해 봤더니 가해자들은 '처벌 불원서'라는 걸 이용해서도 스토킹 처벌법을 피해가고 있었다. 피해자들을 설득, 혹은 압박해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일종의 탄원서를 받아 내는 건데, 스토킹 처벌법 적용 사건의 29%가 (KBS가 입수한 판결문 37건 중 11건) 이 처벌 불원서를 이유로 공소 기각됐다. 그래놓고도 가해자는 나중에 또 피해자를 찾아가 추가로 해친 사례가 여럿 있었다. 심지어, 처벌 불원서를 써주면 괴롭히지 않겠다며 만남의 약속을 잡아놓고, 그 자리에 나타난 피해자를 흉기로 살해하려 한 경우도 있었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스토킹 범죄가 국내에서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스토킹을 범죄가 아닌 '일상적 구애 행위' 정도로 보는" 그릇된 시각을 꼽기도 했다. 신당역 추모공간에는 법을 더 강화해달라는 호소들이 아래와 같이 잇달았다.
■ 죽지 않고 일할 권리
지하철역 등 대중교통 운용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 문제도 대한민국이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았다. 밤늦도록 불특정 다수를 상대해야 하는 그들에게는 지금껏 신변보호 장비 하나 제공되지 않았다. 야간 순찰마저도 '2인 1조'가 아닌 단독으로 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토킹'과 '2차 가해'라는 신당역 사건의 본류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상시적인 생명권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는 다시 들여다 봐야 한다.
직접 가본 신당역 2호선 역사 화장실은 <고객 안전실>로부터 불과 20여 미터 거리에 있었다. 그것이 '고객의 안전'을 지켜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하는 노동자의 안전은 누구도 지켜주지 못했다. 피해자는 밤늦게 홀로 화장실 점검에 들어갔다 참변을 당했다. 전주환은 그 날 서울교통공사 내부망에 접속해 피해자 근무 정보를 알아냈다. 일터의 '내부 망'은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했고 그 일터의 사장은 열흘 뒤에 사과했다.
■ 글·사진 : 박주경 (KBS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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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경 기자 (pjk010@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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