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걱정이 많죠?" 매출 1000억 갔던 연세대 출신 용산 터줏대감의 아이디어
소형 전자제품 전문 기업 삼신이앤비 최재수 대표
2000년대 초반 MP3, PMP, 전자사전이 소형 전자제품 시장을 휩쓸었다. 최재수 삼신이앤비 대표(76)는 그 태풍의 중심에 있었다. 용산 전자상가에서 터를 잡고 제조사와 소매상의 다리를 잇는 역할을 했다. 유통만으로 삼신이앤비의 매출은 1000억원을 넘어섰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대세는 기울었다. 연락처는 물론 노래, 영상까지 작은 스마트폰 하나면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시대다. 최 대표는 또래의 일상생활에 주목했다. 보청기 착용을 꺼리는 이를 위해 이어폰처럼 생긴 음성증폭기 ‘청아’를 개발했다. 누적 판매량은 3년 만에 10만대를 넘어섰다. 최 대표를 만나 70대가 바라보는 전자 제품의 세계를 들었다.
◇레이저·진동·온열 3중 무릎 관리
삼신이앤비의 무릎사랑플러스는 집에서 편하게 무릎을 마사지할 수 있는 기기다. 진동과 온열뿐만 아니라 적외선과 레이저로 관절을 관리한다. 3단계로 조절 가능한 진동으로 손 안마 효과를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온열 기능을 더했다. 따뜻한 열이 무릎의 피로를 풀고 근육의 이완을 돕는다.
터치패널을 조작해 진동, 온열 단계나 레이저, 적외선 모드를 직관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적외선과 레이저 모드 작동 시 615~650㎚(나노미터)의 파장이 관절 깊은 곳까지 레이저를 조사해 관절 건강에 도움을 준다. 착용도 쉽고 편리하다. 무릎에 밀착한 뒤 벨크로로 사이즈를 조절하면 된다.
◇일제 계산기에 대항하는 법
1973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이었던 부산은 밀수품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제(日製) 계산기가 특히 인기였어요. 침대 아래에 계산기 200개씩 숨겨서 부산항에 들어오는 사람이 많았죠. 당시만 해도 작은 전자계산기 하나 가격이 대졸 신입사원 월급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시국에 전 국산 전자계산기를 판매하는 일을 했어요. 늘 일제에 밀려 찬밥 신세였죠.”
밀수품의 약점을 노려 영업 전략을 세웠다. “밀수품은 외상이나 할부가 안 됩니다. 전자계산기가 필요할 만한 금은방을 다니면서 외상·할부가 되는 국산 전자계산기를 홍보했어요. 그때부터 조금씩 판매량이 늘더군요. 이 무렵 삼신이앤비를 설립해 소형 전자제품을 유통하며 사업을 키워나갔습니다.”
1997년 나이는 어느덧 쉰을 넘었다.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을 때쯤 외환위기가 나라 경제를 집어삼켰습니다. 15~16년간 벌었던 돈을 모두 은행 주식으로 갖고 있었는데요.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돼 버렸죠. 그나마 회사 자금은 건드리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을 그만둘 나이에 새로운 일을 벌였다. “MP3, 전자사전 등 새롭게 등장한 전자제품을 취급하기 시작했어요. 당시만 해도 소매상이 모두 오프라인에서 활동했는데요. 제조사와 소매상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직원은 50명, 연 매출은 1000억원까지 늘었죠.”
효자 상품은 수백 개의 연락처를 저장할 수 있는 ‘전자수첩’이었다. “어느 날 삼성전자에서 200명의 전화번호가 기록되는 휴대전화를 출시했습니다. 잘 나가던 전자수첩 매출이 다달이 절반으로 줄더니 6개월 만에 바닥을 쳤죠. 그 외에도 녹음기 등 100여 가지 전자제품을 팔고 있었는데 그걸 다 합쳐도 휴대전화 하나를 못 이기겠더군요.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미련 없이 죄다 가져다 버렸습니다.”
◇무릎사랑플러스 개발노트
1.유통업에서 제조업으로
더 이상 외부 요인 때문에 사업이 휘청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주도권을 쥐기 위해 직접 제품을 개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품군을 좁혀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수십 년간의 경험을 녹일 수 있는 ‘소형 전자제품’이길 바랐고, 휴대전화가 하지 못하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죠.”
외국어를 사용하는 상대와 바로바로 소통할 수 있도록 개발한 휴대용 통역기기 ‘바로바로 톡’을 출시했다. “제 나이쯤 되면 스마트폰이 있어도 활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앞에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데 더듬더듬 타자를 치려니 머리가 아프죠. 동년배 사이에서는 바로바로 톡이 금세 입소문이 났습니다. 인터넷이 연결돼 있지 않아도 버튼 하나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 주효했죠. 직접 개발한 제품을 소비자에게 선보이고, 그 사용 후기를 듣는다는 게 꽤나 짜릿한 경험이었어요. 이게 지금의 캔디 펜스캐너로 발전했습니다.”
2. 새로운 아이디어는 늘 가까운 곳에
나와 내 또래가 필요할 법한 제품을 찾아 나섰다. “버스정류장의 보청기 광고가 눈에 띄었어요. 노화로 인해 청력이 떨어지면 보청기를 착용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느낄 텐데요. 막상 그럴 나이가 되면 쉽지 않습니다. 수백만원에 달하는 가격은 차치하고서라도 보청기를 낀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들딸이 큰맘 먹고 사드려도 착용하지 않으니 서로 답답할 노릇이죠.”
귀가 나쁜 사람이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음성증폭기 개발에 착수했다. 가장 많이 신경을 쓴 부분은 디자인이다. “음성증폭기는 외부 소리의 볼륨을 키워 귀에 전달해 주는 기기인데요. 흔히들 착용하는 블루투스 이어폰 디자인을 차용했습니다. 귀에 끼웠을 때 누가 봐도 ‘이어폰을 끼고 있겠거니’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죠.”
3. 용산 전자상가도 추억의 뒤편으로
10~20년 전만 하더라도 전자제품 만든다고 하면 일단 용산으로 가라고 했겠지만 이젠 아니다. “중국을 통하지 않으면 유통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금형(대량생산을 위해 제작하는 금속 틀) 비용만 해도 국내 공장과 중국 공장의 차이가 큽니다. 비용을 줄이려면 최소 생산 수량을 늘려야 하는데요. 최초로 출시하는 제품을 소비자의 반응도 확인하지 않고 무턱대고 몇만개씩 찍어낼 순 없으니까요.”
‘바로바로 톡’의 명맥을 이은 ‘캔디 펜스캐너’의 생산도 중국 공장에 맡겼다. “펜으로 선을 긋는 것처럼 글자에 가져다 대고 슥 그으면 15개국 언어로 번역해 뜻을 알려주는 기기입니다. ‘바로바로 톡’의 주요 기능인 실시간 통역 기능도 함께 넣었어요. 스마트폰 사용이 익숙지 않은 이들도 인터넷 연결 과정 없이 해외여행이나 비즈니스 미팅 자리에서 빠르고 간편하게 소통할 수 있죠.”
4. 세계 시장의 흐름을 놓치지 말아야
연달아 내놓은 상품 모두 히트를 쳤다. “회사가 성장하려면 다양한 제품군을 갖춰야 합니다. 제품 하나 잘 팔린다고 그 제품에만 매달려 있으면 안 돼요.”
해외 출장길에 ‘캔디 펜스캐너’는 필수품이 됐다. “비즈니스 미팅에서 영어, 중국어 등을 빠르게 번역해 소통하기엔 캔디 펜스캐너만 한 게 없더군요. 한국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최적화된 내용을 보여주죠. 값싼 중국산 전자 제품이 많아지고 있지만, 우리네 어른들이 편히 쓸 수 있는 국산 전자 제품 개발에 도저히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제품이 다양해지니, 소비 연쇄 효과가 일어난 덕분이다. 청아 음성증폭기를 산 사람이 바로바로 톡을 사고, 캔디 펜스캐너를 산 사람이 무릎사랑플러스를 구매하는 식이다. ‘무릎사랑플러스’ 역시 나이 들면 약해지는 무릎 관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 적외선과 레이어로 무릎을 마사지한다. 기술은 최 대표와 삼신이앤비 직원이 개발하고, 생산만 중국에 맡긴다.
전자제품 분야에 발을 들인 이후 매년 지키는 일정이 있다. 홍콩에서 열리는 춘계 전자 박람회(HKEF)다. “올봄에도 홍콩에 다녀왔어요. 빽빽한 일정 탓에 보름째 감기를 앓고 있죠. 무리해서라도 그런 자리를 다녀오는 이유는 경험을 쌓기 위함입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 전자제품을 다루면서 벽을 많이 느껴요. 나이가 들어도 배울 게 너무 많더군요. 요즘 사람들은 어떤 걸 좋아하고, 즐기고, 향유하는지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에 나가면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을 찾게 된다. “5~6년 전만 해도 홍콩 전자 박람회에 우리나라 젊은 발명가들이 많았어요. 세계 무대에 참신한 제품을 선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뿌듯하기도 했죠. 그런데 올해 박람회에선 한국인을 찾아보기 힘들더군요. 수년 만에 ⅓ 수준으로 줄어든 것 같아요. 과거와 달리 소규모 자본으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는 게 쉽지 않아진 현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50년 장사꾼의 회고
2010년대 50명 넘는 직원을 거느리던 삼신이앤비의 현재 직원 수는 10명 이하다. 월 100억원이던 매출은 연 30억원 수준으로 줄었다. “사업에 뛰어든 지 50년이 넘었네요.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 한 일이긴 해도, ‘돈을 벌기 위해서만’ 한 일이라면 50년을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에 가치를 매긴다면, 매출이 줄었어도 성과가 줄었다고 할 순 없어요.”
백세인생이라지만 나이의 한계를 느낀다. “스마트폰 하나로 못 하는 게 없는 세상이죠. 전자 기기에 익숙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 됐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욕심을 줄이는 것뿐이더군요. 아등바등 해서 번 돈 저승까지 가져갈 거 아니잖아요. 규모가 작더라도 마지막까지 내 힘으로 해낸 장사꾼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