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성과주의 원칙, 삼성 반도체 위기에 결국 수장 교체
삼성전자 지난해 반도체 15조원 규모 적자, 임기 1년여 남겨두고 조기퇴진
지난 임원인사에서 변화보다 안정을 택했던 삼성전자가 쫓기듯 성과주의 인사 원칙을 강행했다. 반도체 실적 악화로 위기가 가중되자 반도체 수장을 전격 교체했다. 임기를 1년여 남겨둔 상황에서 예고도 없이 수장 교체를 단행한 걸 두고 삼성전자 특유의 신상필벌 원칙이 적용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도체 사업 부진에 따른 삼성전자의 위기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삼성전자는 미래사업기획단장 전영현 부회장을 DS(반도체) 부문장으로 교체했다고 21일 밝혔다. DS부문은 D램부터 낸드 플래시, 모바일AP 등 반도체 산업을 전담하는 부서로, 삼성전자 실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사실상 DS부문장은 삼성전자의 실적을 책임지는 핵심 요직으로 꼽힌다.
기존에 DS부문장을 맡았던 경계현 사장은 미래사업기획단장 겸 SAIT 원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경 사장은 2020년부터 삼성전기 대표이사를 맡았고, 2022년부터 삼성전자 DS부문장을 일했다. 경 사장의 당초 임기는 내년 3월 15일까지였다. 그러나 이번 인사로 임기를 10개월 가량 남겨둔 채 조기퇴진 수순을 밟게 됐다.
새롭게 DS부문장을 맡게된 전영현 부회장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에 오랫동안 몸담아온 반도체 전문가다. 2000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에 입사해 DRAM/Flash개발, 전략 마케팅 업무를 거쳐 2014년부터 메모리 사업부장을 역임했다. 2017년부터 5년간 SDI 대표이사를 지낸 이후 올해부터 삼성전자 미래사업기획단장을 맡아 미래먹거리 발굴을 수행해 왔다.
삼성전자는 이번 인사에 대해 반도체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고 강조했다. 불확실한 글로벌 경영 환경 하에서 대내외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경 사장의 조기 퇴진에 대해선 미래먹거리 발굴을 위한 행보로 일축했다.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며 쌓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삼성의 미래 먹거리 발굴을 주도할 거라는 설명이다.
이번 인사 배경에는 삼성전자 특유의 신상필벌 원칙이 지목된다. 업황 악화와 별개로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이 경쟁력 약화에 시달린 만큼 수장인 경 사장에 책임에서 자유롭기 힘들다는 것이다. 지난해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은 15년 만에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 특히 AI반도체 부문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 등은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밀렸다.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면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영업손실은 무려 14조8은95억원에 달했다. 업황 부진의 여파로 조단위 적자를 기록한 것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간 45조원에 달하는 영업이익을 올렸을 정도로 삼성전자의 실적을 떠받쳤다. 삼성전자가 뒤늦게나마 수장 교체에 나선 배경이다.
특히 반도체 시장이 세계적인 침체에 시달렸다곤 하지만 삼성전자가 시장의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그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켜왔던 삼성전자지만 AI(인공지능) 열풍 이후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우위를 내줄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강조했던 기술 ‘초격차’ 기조가 무너졌다는 점 역시 수장 교체의 이유로 지목된다. AI 반도체 핵심인 고대역폭메모리(HBM) 부진이 대표적이다. 12단 HBM 등을 선제적으로 개발했지만, 5세대 HBM(HBM3E) 등 최신 제품이 고객사의 퀼(승인 작업)을 통과하지 못했다. 엔비디아 등 빅테크로부터 외면받은 것이다.
그러는 사이 SK하이닉스는 HBM시장 선두로 올라서면서 D램 시장에서의 우위를 잃게 됐다. SK하이닉스의 반격은 거세다.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인 TSMC와 손잡고 차세대 HBM 개발에 나서고 있다.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 TSMC는 각각 반도체 설계와 HBM생산, 패키징 분야를 맡아 삼각동맹을 맺은 상태다.
그나마 올해 1분기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이 적자행진을 끊고 흑자전환에 성공했다는 게 위안거리다. 1분기 반도체 부문은 영업이익 1조9100억원을 올리면서 2022년 4분기 이후 5분기 만에 흑자를 달성했다. D램인 더블데이터레이트(DDR)5와 낸드플래시인 고용량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의 수요 확대가 실적을 견인했다.
올해 반도체 업황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만큼 삼성전자의 수장 교체 카드가 위기를 극복할 한 수가 될지 업계 관심이 집중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전 부회장은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와 배터리 사업을 글로벌 최고 수준으로 성장시킨 주역이다”며 “축적된 풍부한 경영노하우를 바탕으로 반도체 위기를 극복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