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속도보다 여유, 산책의 기쁨

황중환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2024. 10. 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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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2024년 작. [황중환]
지난해 가을은 참 행복했다. 무엇보다 출퇴근하는 대부분의 날을 걸었기 때문이다. 내가 걷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걸으면 컨디션이 좋아지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도 걷고 나면 말끔해지는 데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해도 기분이 나아진다. 내게 산책은 마치 영혼의 만병통치약 같다. 걷는 속도는 하루하루 변해 가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가장 적합한 속도다. 길이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이에겐 움직이는 속도가 가장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길 위에서 계절의 변화와 마음의 안식을 찾는 사람은 빠른 속도보다 느리더라도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여유로움에 더 가치를 두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산책이 좋은 이유는 오늘의 산과 들이 어제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데 있다. 걷다 보면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나를 만나게 된다. 혈압이 정상화하고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은 덤이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닐 때는 집과 일터가 멀어 걸어서 출퇴근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늘 출근하고 퇴근하기에 바쁘기만 했다. 평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동료들과 고궁이나 청계천을 산책하곤 했지만, 짧은 시간이 늘 아쉬웠다. 한동안 프리랜서 만화가로 지낼 때는 집과 가까운 공원을 자주 걸었다. 흠뻑 땀을 흘린 후 상쾌한 기분으로 신문 연재 만화를 마감하기 위한 것이었다. 산책을 즐긴다기보다 효율적인 컨디션 관리를 위한 수단이었지만, 걷는 것이 아이디어를 내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날은 낯선 동네의 전철역에서 미리 내려 집까지 한두 시간을 걸어 퇴근한 적도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남한산성을 자주 함께 걸었고, 서울 구석구석, 경기도나 강원도 일원의 걷기 좋은 곳을 찾아 자주 걸었다. 그렇게 걷고 나면 나도 가족도 기분이 좋았다.

초코파이 1+1개로 맺어진 인연

전라도 광주로 직장을 옮긴 지 12년, 요즘은 무등산을 자주 산책한다. 아무리 더운 날이라 해도 숲에 들어가면 물소리 새소리가 더위에 찌든 몸과 마음을 씻어주는 것 같다. 전문적 등산가가 보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산책에 불과하겠지만, 무등산 관광단지 입구의 평지에서 시작해 적당히 경사진 언덕을 지나 '약사사(藥師寺)'라는 아담한 절까지 이어지는 4.5km 남짓한 길은 내가 즐겨 찾는 산책 코스 중 하나다. 한숨 돌리고 내려오다 보면 어느새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게 된다. 약사사 주지 무진 스님의 말에 따르면 약사는 한자로 '약 약' 자에, '스승 사' 자를 쓴다고. 병든 이를 치유하는 암자란 뜻이란다.

약사사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어느 해 2월, 규모가 있는 L 백화점 갤러리 개인전을 준비한다며 스트레스도 크게 받고 몸을 혹사하고 있었다. 그러다 건강을 해치면 무슨 소용이냐며 아내가 무등산 산책을 권했다. 무작정 작업실 문을 박차고 나와 무등산으로 향했다. 물이나 간식 등 아무 준비도 없이 허겁지겁 오르다 보니 하늘이 노랗고 단것이 너무 당겼다. 당이 떨어진 탓이다. 가까운 곳에 사찰이 보였다. 대부분의 사찰 대웅전 불상 앞에 바나나나 과자가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헐레벌떡 대웅전에 다다르자 오호라! 사찰 직원이 초코파이(정확히는 '오예스')를 정리하고 있지 않은가. 염치 불고하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초코파이 하나만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당이 너무 떨어져서요."

사찰 직원은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하나를 건네줬다. 나 같은 사람이 많았나 보다. 하나로는 당이 채워지지 않아 하나를 더 달라고 했다.

"저 미안하지만 하나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

이번에는 나를 힐끔 보더니 하나를 더 건넸다. 그렇게 어지러움을 해결하고 내려온 뒤 작업이 잘 진행됐고 전시 준비도 무사히 해냈다. 당시에는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었기에 다른 날 산책길에 다시 들러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불전함에 적게나마 시주를 했다. 사찰 직원의 말이 파이를 두 개 달라고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며 깔깔 웃었다. 내가 특이해 보였는지 주지 스님에게 인사를 시켜줬다. 주지 스님이 하는 일을 묻기에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답했더니, 느닷없이 부처님 오신 날 쓸 연등에 그림을 그려줄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오예스'를 두 개나 얻어먹은 처지에서 거절할 수 없었다. 사찰에서 그림 그리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일 듯싶었다.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연락처를 남겨두고 왔는데, 진짜로 연락이 왔다.

노동절인 5월 1일 그림 재료를 들고 절로 향했다. 원래 이틀 이상 작업할 분량이었지만 쉬지 않고 몰입하다 보니 하루에 다 마칠 수 있었다.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부드러운 산바람을 타고 퍼지는 아카시아 향기가 황홀했다. 연등 80개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함께 작업을 도운 아내가 "당신은 돈 안 버는 일에 더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아"라고 말해서 한참 웃었다. 작업을 하며 근처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이자 신문에 오랫동안 연재도 했던 작가라고 밝혔더니 스님들은 더 반가워하셨다. 나중에 약사사 스님들이 모두 절문을 닫고 내 전시장을 방문해 주셨고 식사도 함께 했다. 무진 스님은 사비를 털어 판화 작품 3점을 구매하셨다. 요즘은 무등산을 산책할 때면 스님의 선방에 들러 차를 마시기도 하고 산책 중인 스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무등산을 산책하다 만난 인연인 셈이다.

느긋하게 걷기 좋은 가을의 선물

나는 이번 가을에도 산책할 예정이다. 주말이 되면 화가 김환기의 고향인 전남 신안의 섬에서 독특한 교회 건축이 있다는 12사도 길을 걷고 싶고, 어느 유명 소설가가 주최하는 곡성마을 영화제에 들러 여러 사람과 지평선 아래 논두렁길을 따라 걸으며 마을회관을 개조한 임시 극장을 찾아다닐 수도 있겠다. 산책은 약간 쌀쌀할 때 해도 괜찮고 추운 겨울에 해도 참 좋다. 차가운 날씨에 녹슨 로봇처럼 굳어 있던 몸이 부드럽게 풀리는 느낌이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든다. 혼자 걷다 여럿이 만나 함께 걸으면 반가움이 배가되기도 한다. 폭염이 기승을 부린 7월 31일에는 내 책을 출간한 출판사 벗들과 만나 노고단을 걸었다. 산책을 마치고 여럿이 모여 함께 먹던 흑돼지 바비큐와 막걸리 맛을 잊을 수 없다. 내가 등산이라 쓰지 않고 굳이 산책이라 쓰는 것은 가볍고 천천히 느긋하게 조금만 걷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평소 존경하던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있는데 한 여학생이 내게 무언가를 질문했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느라 몸이 기울어 있었는데 교수님이 강의를 멈추시더니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자네, 연애는 나가서 하게." 그때 너무 죄송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얼굴이 빨개졌더랬다. 교수님은 당신이 다녀오고 감동하신 지리산 천왕봉과 실상사의 새벽 풍경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계셨지만, 스무 살의 나와 친구들은 지리산이나 남도 풍경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었나 보다. 다행히 이제라도 남도 풍경의 아름다움과 걷기의 즐거움을 알게 됐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가을은 걷기에 더욱 좋다. 더위에 지친 잎들이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끝맺는 것은 어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다. 가을은 더 깊어질 것이고 나는 틈틈이 남도를 산책하며 가을이 곁에 있어도 그립다고 말할 것이다.
황중환
●1970년 충남 부여 출생
●홍익대 미술대학 및 산업미술대학원 졸
●前 동아일보 '386c' 연재 만화 작가/기자
●現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저서: 에세이집 '아픔을 돌보지 않는 너에게' '지금 꿈꾸라 사랑하라 행복하라' '마법의 순간' 외

황중환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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