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황·침체 다 겪은 日경제통의 조언, 韓에 주는 교훈은…[북리뷰]
시라카와 마사아키 지음│박기영·민지연 옮김│부키
일본 중앙은행 40여년 근무
시라카와 前 총재의 회고록
아베노믹스 반대하다 물러나
“경기 침체 벗어날 근본 대책은
기술 개발 등 산업경쟁력 강화
금융완화로 시장 맞설 수 없어”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 중앙은행 총재의 회고록이다. 도쿄대 경제학과를 졸업, 1971년 일본 중앙은행에 들어가서 2013년 아베노믹스에 반대하다 물러날 때까지 오직 중앙은행원으로만 일한 일본 경제정책의 살아 있는 증인이기도 하다. 일본이 비약적 경제성장으로 ‘세계 No.1’을 자부하던 1980년대의 ‘거품 경제’ 시절과 그 거품이 꺼지고 난 후 장기 저성장 국면에 들어선 1990년대 이후의 이른바 ‘잃어버린 30년’을 그 한복판에서 모두 지켜보았다. 무엇보다 2008년 일본 중앙은행 총재로 취임해 세계 금융위기 극복 최전선에서 싸웠던 경험이 풍부하게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사건과 일화, 비화와 후일담을 기록하는 단순한 회고록과는 성격이 다르다. 자기 경험을 바탕 삼아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앙은행의 역할, 그 독립성과 책임성, 금융 및 통화정책의 본질 등에 대한 대담한 경제학적 논쟁을 펼쳐놓기 때문이다. ‘중앙은행(中央銀行)’이란 원제에 적합한 학문적 성찰을 명료한 언어와 간결한 논증으로 담아냈다. 이 책이 일본의 대표적 학술상인 와쓰지데쓰로문화상을 받고, ‘아사히신문’ 선정 헤이세이 시대 대표 도서 30선에 선정된 이유일 테다.
이 책의 중심엔 거품 붕괴 이후 장기 침체에 빠진 일본 경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중앙은행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있다. 저자는 철저히 중앙은행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 시대의 공기, 즉 “일본 경제의 가장 큰 과제는 디플레이션이고,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는 경제 서사에 빠져들어 기업 체질 개선에 실패한 게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에 빠진 이유라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우리의 일반적 인식과 아주 다르다.
일본의 정치가, 관료, 기업 등은 근본 문제를 지속적 물가 하락과 제조업 공동화로 보고, 금융 완화를 통해서 인위적으로 물가를 올리고 환율을 낮춰서 수출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장기 불황의 책임은 시장 기대와 다르게 움직이는 중앙은행의 소극적 통화정책에 있었다. 디플레이션 우려 해소를 위해 세계 각국이 양적완화 정책을 신속히 시행할 때, 이를 거슬러 느릿하게 움직인 일본 중앙은행의 행동은 한때 전 세계에서 비웃음을 샀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서사다.
저자는 중앙은행가의 태도를 성실함과 전문성으로 압축한다. 전문가인 중앙은행가의 관점은 수시로 선거를 치르는 정치가나 관료, 단기적 이익·손실에 민감한 민간 기업가와 달라야 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말한다. “통화정책 책임은 중앙은행에 있고, 재정정책 책임은 정부에 있다.” 둘은 긴밀히 공조하나, 항상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통화정책의 근본 목적은 물가안정이지 경기부양, 기업 경쟁력 강화, 수출 활성화가 아닌 까닭이다. 거칠게 말하면, 금융 완화를 통한 디플레이션 해소는 중앙은행의 핵심 과제일 수 없다.
통화정책을 세울 때 중앙은행가는 시장 추종에 빠지지 말고, 장기 지속의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일본 경제의 근본 문제는 저출생 고령화에 따른 인구 구조 변화, 일본 기업의 구조조정 실패와 기술 경쟁력 저하에 따른 교역조건 악화다. 이 문제를 해소하지 않고, 아무리 과감한 금융 완화 정책도 결국 단기 효과에 그칠 뿐이다. 경기 침체 책임을 중앙은행에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과연 저자 예측대로 아베노믹스는 큰 성과 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저자는 30년 경험에서 배워야 할 것을 몇 가지로 압축한다. 첫째, 금융 완화는 구조조정에 따른 고통을 잠시 줄일 순 있으나, 좀비기업을 양산하는 등 장기 저성장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둘째, 경기 침체를 해소하려면 물가나 통화를 손댈 게 아니라 생산성, 혁신 등에 집중해야 한다. 또한 급속한 고령화와 저출생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크므로, 빠르게 대책이 필요하다.
“경기 침체의 근본 대책은 기술 개발을 통한 산업 경쟁력 강화이지 금융 완화를 통한 수출 경쟁력 강화가 아니다.” 시카고학파의 영향을 받은 학자답게 통화로는 시장에 맞설 수 없다는 신념이 깔려있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사회 우위, 즉 정치·금융·사회의 근시안적 압력에 맞설 수 있게 중앙은행의 자주성과 독립성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저성장 국면에서 포퓰리즘의 유혹에 휩쓸리기 쉬운 우리 역시 귀담아들을 말이다. 744쪽, 3만5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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