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500조 쟁여두고 노후는 불안…'묵은 퇴직연금' 바꿀 때
‘안전해 보이는 덫’ 깨려면 복수 구조·교육 병행 필요

퇴직연금이 도입된 지 20년, 쌓인 적립금은 어느덧 500조 원 시대를 맞았다. 양적으로는 든든한 노후 방파제가 준비됐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속사정은 초라하다. 가입자의 10년 장기 평균 수익률은 연 2.3% 수준에 그친다. 물가상승률과 임금인상률을 고려하면 사실상 ‘마이너스’나 다름없다. 돈은 기록적으로 쌓이는데 은퇴 후 삶은 되레 불안해지는 역설, 이것이 대한민국 퇴직연금의 현주소다.
이 참담한 저수익의 책임을 개인의 ‘투자 무관심’ 탓으로만 돌리기엔 구조적 모순이 크다. 전체 적립금의 75%가 원리금보장형에 묶여 있고, 방치된 자금을 깨우겠다던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마저 적립금의 85% 이상이 ‘안정형’(옛 초저위험)에 쏠려있다. 안정형의 1년 수익률은 2%대 중반에 머문 반면, 적극투자형 평균은 14.93%(2025년 4분기 기준)에 달해 제도 안에서만 5배 이상의 격차가 벌어졌다.
한국 성인의 금융이해력은 65.7점으로 OECD 평균(62.7점)을 웃돈다. 그럼에도 손실을 이익보다 약 두 배 크게 느끼는 손실회피 본능이 원리금보장 중심의 제도 설계와 맞물리며 비합리적 자산 배치가 굳어졌다. 여기에 손실 부담 없는 예금성 상품을 선호하는 금융회사의 유인까지 더해지며, 가입자 자금은 ‘안전해 보이는 덫’에 고이는 구조가 됐다.
틀을 바꾼 나라는 결과도 다르다. 호주의 퇴직연금인 ‘슈퍼애뉴에이션’은 최근 5년 평균 연 7~8%대 수익률을 기록 중이다. 위험자산 비중을 70%대까지 열어두고 의무 납입률을 임금의 12%까지 끌어올린 장기 분산투자 설계, 그리고 가입자의 이익을 우선하는 신탁법 기반의 ‘기금형 구조’가 결합한 결과다. 디폴트옵션 ‘마이슈퍼’는 원리금보장 상품을 아예 취급하지 않으며, 성과가 미달한 기금에는 신규 가입 제한이라는 페널티까지 부과한다.
기금형 전환은 만능 해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배경에서 한국형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논의가 속도를 내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정부는 올 하반기 법 개정을 통해 분산투자와 규모의 경제로 수수료를 낮추는 전문 운용 구조를 도입할 계획이다. 퇴직연금이 노후소득 보장 기능을 회복하면 국민연금에 쏠려 있는 1층 의존도와 미래 세대의 보험료 부담을 함께 낮출 수 있다는 기대도 거론된다. 물론 “내 퇴직금이 정부나 거대 기관의 쌈짓돈이 되는 것 아니냐”는 불신과 정치적 개입 우려, 손실 발생 시 책임 소재에 대한 사회적 합의 부족, 영세 사업장의 비용 부담 등 넘어야 할 산도 많다.
따라서 당장의 전면 전환보다는 기존 계약형을 유지하되 기금형을 선택지로 추가하는 복수 구조가 현실적이다. 중소기업 공적 기금형인 ‘푸른씨앗’은 최근 3년간 연 6~8%대 수익률로 가능성을 검증했고, 가입 대상도 올해 7월 50인 미만, 내년 1월 100인 미만 사업장까지 단계적으로 확대된다. 다만 기금이 커질수록 독립 수탁이사회 구성과 성과 공시 강제 같은 거버넌스 설계뿐 아니라, 정치적 개입을 차단할 운영원칙까지 확립해야 한다. 이와 함께 디폴트옵션 상품 라인업에서 원리금보장 비중을 과감히 줄이는 제도 개편, 사업자별·상품별 수익률·수수료 비교공시, 그리고 정부와 금융회사가 함께 책임지는 체계적인 금융교육이 맞물릴 때 ‘손실회피’ 본능이 ‘장기 수익률이 곧 노후소득’이라는 인식으로 옮겨갈 수 있다.
500조 원의 노후 자산을 연 2%대 늪에 계속 묶어둘 것인가, 장기 성장의 엔진으로 갈아 끼울 것인가. 이제 질문은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승패는 ‘얼마나 정교하고 독립적으로 설계하고 운영하느냐’에 달렸다.
김수환 금융증권부장 ksh@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