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에 빗댄 '낮은 노동자'의 아픈 얼굴 [노동의 표정]
4편 이원석 시인의 로봇 연작시
인간이 아닌 로봇 노동 다루며
인간 노동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
SF적 상상력 덧칠한 미래 ‘노동’
"감사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한 날에는/아무에게도 감사하지 않았다" "분수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다 미움을 샀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 글을 읽는다면 어떤 노동자의 애환쯤으로 해석될 거다. 그런데 아니다. 이원석 시인이 쓴 로봇 연작시의 내용이다. 그는 인간이 아닌 로봇의 노동을 다루면서 인간의 노동을 생각한다. 낮은 노동을 하는 인간의 표정이 아프게 보인다.
원고료와 갖가지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던 때, 인천공항에서 수레(L-Cart) 끄는 일을 하는 이원석 시인에게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다. 개인적으로 머리 쓰는 일보다 몸 쓰는 일을 선호해 그 말 자체가 고마웠다. 아내와 함께 고민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여러 번의 어깨 수술로 인해 예전처럼 힘을 쏟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분간 어쩔 수 없이 학교에 적을 두기로 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원석 시인이 특정 신문사에서 그곳의 경험을 연재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의 미래일 수도 있었던 시간을 그가 어떻게 견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수레 끄는 일을 제안해 준 것이 고맙기도 해서 그가 발표한 에세이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화물차가 면세점에 보낼 상품을 실어 오면 수요에 따라 상점에 보내주는 일을 한다. 쉬는 날을 제외하고 200㎏ 이상의 상품을 바퀴에 싣고 굴린다. 바퀴를 굴리면서 여러 생각을 글로 적는다.
좋게만 쳐다보지 못했던 명품에 숨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도 하고, 이 빛이 진열장에 전시되기까지의 과정을 떠올리며 노동의 흔적을 추적하기도 한다. '우리'라는 말 속에 담긴 이중성을 다루고 스승의 날 즈음에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참스승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밥 먹다가 상사의 지시로 숟가락을 내려놓고 일하러 가는 동료를 쳐다보면서는 좋은 대접이 아닌 '같은 대접'의 필요함을 역설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가 쓰는 에세이는 노동자로서, 한때 선생님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려는 이상을 적고 있다. 앞으로 그가 언제까지 글을 연재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목소리가 차곡차곡 쌓여 수레 끄는 노동자의 삶을 보편의 언어로 재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던 오늘 '집중력이 사라졌다'라는 제목의 최근 글을 읽었다. 제목 그대로 집중력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시인은 "과거에는 지인에게 보낼 편지에 애정을 담아 쓰거나 할아버지에게 용돈 받은 것을 힘들게 모아 장난감을 산 후, 하루 종일 조립했던 그때 그 당시의 집중력이 지금은 사라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는 동시대의 매체 환경이 변한 것이기도 하지만 직장인으로서 '보는 것'을 스마트폰에 의지해야만 했던 창작자의 고뇌가 담겨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집중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중국 무술과 털 짐승 그리기로 지친 마음을 달랜다. 이런 이야기를 글로 접하니 창작자에게도 충분한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가 현재 창작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나아가 그가 공들여 출간한 첫 시집과 이후에 발표한 작품들도 생각하게 됐다.
아작 출판사에서는 2023년 SF 전문 계간 문학지 「The Earthian Tales(어션 테일즈)」 5호로 'I will be BACK'을 출간한 적이 있다. 이 책에는 이원석 시인의 '업무 외 일지' '업무 외 일지―마지막으로 수정한 시간: 오전 03시 22분' '꿈의 기록장'이 수록돼 있다. 이 작품은 '되기'의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대상이 '돼' 보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인공지능(AI) 로봇이다. 동시대에는 AI 로봇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시인이 미래의 어느 날에 와 있다고 몽상하면서 인간이 아닌 기계의 노동을 주제로 쓴 작품이다.
이처럼 그에게 노동은 일상이자 평범한 것이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노동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노동은 창작행위와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애정이 간다. 노동을 단지 머리로 쓰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학문으로만 대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적어도 그의 언어는 삶 자체가 받쳐주니 상투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렇다면 '집중력이 사라졌다'라는 글에서 사라진 '집중력'을 발휘할 때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로봇 연작시에서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로봇의 노동을 다룬다. "감사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한 날에는/아무에게도 감사하지 않았다"라는 목소리와 "분수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다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라는 표현은 로봇의 입에서 발화한 목소리지만, 낮은 노동을 하는 인간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12시간 동안 산성비가 내리는 날 묵묵히 일한 로봇 듀이가 등장한다. 듀이는 이런 가혹한 노동 덕분에 몸이 망가졌다. 그는 쓸모 있음을 증명하고 싶은 로봇이었지만 고장 났으니 쓸모를 증명할 수 없다. 듀이는 인간이 아니지만 '쓸모'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산성비가 내리는 날, 무리하게 노동했기에 멈춘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자면 죽음과 만난 것이다.
이렇게 로봇은 움직이지 못하면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된다. 그리곤 손쉽게 대체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봇에 번호를 붙이고 "그것들"이라고 부른다. 인간들은 반려동물에게 이름을 붙여주지만, 로봇에는 번호로 호명하니 노동하는 존재는 짐승보다 못하다. 로봇(노동자)은 이처럼 가장자리에 놓인 존재다. 이원석 시인은 동시대에 노동하는 존재가 '듀이'와 같다고 말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죽을 때까지 노동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떤 방식이든지 자신만의 노동을 이행한다. 죽음의 여정이 노동의 여정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건 이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의 '노동'을 미래의 '노동'으로 변주해 SF적인 상상력을 덧칠한다. 환유도 은유도 벗어 던지고 시공간을 바꿔 자신의 예술을 빚는다. 이것은 상상의 힘이다. 그러니 그의 '집중'이 건강하게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아가 동시대의 많은 예술가에게 지치지 않는 '여유'가 제공됐으면 좋겠다.
문종필 평론가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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