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뒤흔든 ‘아르데코 여왕’의 사랑, 21세기 관객을 사로잡네

잔인한 역사는 스치기만 해도 무력한 개인의 삶에 깊은 흉터를 남긴다. 공산 혁명과 세계 대전이 폭풍처럼 세상을 휩쓸던 20세기 초, 유럽 미술계를 뒤흔든 여성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1898~1980)의 삶에도 흉터가 깊었다.

당대에는 ‘붓을 든 귀부인’으로 불렸고, 후대엔 마돈나가 사랑한 화가로 각광받은 ‘아르데코의 여왕’. 그의 이야기가 2024년 토니상 3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다시 태어나, 지금 서울 삼성동 코엑스 아티움에서 한국 관객을 만나고 있다. 혁명의 피바람을 피해 가족과 도착한 파리, 생계를 위해 그리기 시작한 ‘타마라’(김선영·박혜나·정선아)의 그림이 각광받을 즈음, 자유로운 영혼의 여인 ‘라파엘라’(차지연·린아·손승연)가 운명처럼 타마라의 인생 속으로 들어온다.

무엇보다 이 뮤지컬의 첫 번째 매력은 폭발적 가창력으로 이미 검증이 끝난 우리 뮤지컬 ‘디바’들의 무대 위 하모니다. 뮤지컬 ‘위키드’의 ‘엘파바’나 8월 초연을 앞둔 ‘겨울왕국’의 ‘엘사’ 역할을 맡았거나 맡을 배우들이 렘피카와 라파엘라 역할을 골고루 나눠 맡았다.
특히 ‘가만히, 고요히, 멈춰진 시간…’으로 이어지는 1막 후반부의 ‘스틸니스(Stillness)’처럼 여주인공 둘이 함께 부르는 노래의 파괴력은 경이롭다. 최고의 여배우들이 자기 진성을 내며 진심으로 맞붙었을 때 무대 위에 어떤 불꽃을 일으키는지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다. “살려고 그런 거잖아. 그게 당신이란 사람을 바꾸진 못해.” 고뇌하는 렘피카에게 건네는 라파엘라의 말은 시간을 건너뛰어 21세기 관객까지 위로하는 힘이 있다.

렘피카 그림의 아르데코 양식을 차용한 듯, 규칙적인 직선과 곡선으로 그린 그림처럼 간결하고 모던한 무대 위 공간 구축도 뛰어나다. 미니멀한 무대가 조명과 영상의 힘으로 시시각각 변화할 때, 앙상블 배우들은 자신의 몸과 춤으로 공산 혁명을, 예술에 취한 파리를, 예술의 폭주를 표현한다. 그때마다 무대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병영으로, 피난 기차로, 파리 거리와 클럽이나 갤러리로 변화를 거듭한다.
렘피카는 극의 시작과 끝에 같은 대사를 두 번 말한다. “세상을 바꿀 순 없어. 바꿀 수 있는 건 네모난 캔버스 하나뿐.” 그렇게 모두가 비틀거리며 세월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레이트 코멧’과 ‘하데스 타운’으로 우리 뮤지컬 팬들에게도 친숙한 레이철 채브킨 연출작. 공연은 6월 21일까지, 8만~15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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