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교도소서 지나던 차량에 총 쐈다"… 43년만에 공개사과

송은정 기자 2023. 3. 14.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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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됐던 광주 출신 계엄군이 피해 당사자를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빌었다.

당시 그는 저녁 8시 광주역 진압 작전에 투입돼 이튿날 전남대 정문앞 시위 진압과 옛 광주교도소 주둔·경계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옛 광주교도소 주둔 당시 주변을 오가는 차량을 향해 총을 쐈다.

김태수씨는 당시 부상자를 이송하던 중 옛 광주교도소 주변에서 계엄군의 총격에 부상을 입고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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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삼씨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3공수여단 3대대 소속으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이었다. 그는 14일 43년 만에 5·18 피해자와 국민 앞에 공개 사과했다. 사진은 이날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김귀삼씨가 참배하는 모습. /사진=뉴스1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됐던 광주 출신 계엄군이 피해 당사자를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빌었다.

14일 5·18 공로자회·부상자회·대한민국특전사동지회는 광주광역시 서구 5·18기념문화센터 대동홀에서 '오늘의 증언이 5·18 진상규명의 첫걸음이다' 행사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1980년 5월 항쟁 당시 제3공수여단 소속 중사로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김귀삼씨가 증언자로 나섰다.

김씨는 1980년 5월20일 3공수여단 3대대 소속으로 시위 진압에 투입됐다. 당시 그는 저녁 8시 광주역 진압 작전에 투입돼 이튿날 전남대 정문앞 시위 진압과 옛 광주교도소 주둔·경계 임무를 수행했다.

김씨는 43년 전 광주역과 광주교도소에서 직접 경험한 작전 상황을 담담하게 증언했다. 김씨는 "제가 있던 제대(분대)는 광주역 진압 작전 시 실탄을 지급받지 않았고 발포 명령을 받지도 않았다"며 "나중에 총상 사망자를 보고 발포가 이뤄진 사실을 알았다"고 밝혔다.

그는 포로로 잡혀 온 시민 중 한 사람을 대검의 무딘 부분으로 대퇴부를 찔렀던 사실도 전했다. 김씨는 "그분이 아직 살아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사죄하고 싶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후 옛 광주교도소에 배치됐다. 그는 옛 광주교도소 주둔 당시 주변을 오가는 차량을 향해 총을 쐈다. 그는 "광주교도소에 접근하는 차량을 잡으라며 실탄을 지급받았고 실탄을 줬기 때문에 발포 명령과 다름 없었다"고 말했다.

옛 광주교도소 작전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날 행사에 참석한 5·18 당시 시민군 김태수씨와 기억을 맞춰보기도 했다. 김태수씨는 당시 부상자를 이송하던 중 옛 광주교도소 주변에서 계엄군의 총격에 부상을 입고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김씨는 "고속도로 진입로를 향해 파놓은 매복굴에 잠복해 지나는 차량을 향해 총을 쏜 사실이 있다"며 "당시 그 작전에 참여한 게 맞다"고 김태수씨를 향해 고개를 떨궜다.

그는 시위에 자신의 형제들이 참여하는 등 기구한 상황도 설명했다. 김씨는 "계엄군이 심했던 것을 인정한다"며 "가해자가 지닌 멍에를 풀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후 증언식을 마친 김씨는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그는 참배단 앞에서 두 번 절한 뒤 희생자 묘역을 찾아 "잘못했다"며 "피해가 너무 컸다"고 사죄했다.

송은정 기자 yuniya@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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