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에 뜬 ‘전세사기 피해자’ 동호회…달려야만 하는 이유

공성윤 기자 2024. 10. 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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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기업 형지의 송도 오피스텔에 전세계약 맺었다 47억원 날린 사람들의 질주
피해자측 “위법 매매계약 미끼로 돈 끌어들여”…형지 “임대차 관리업체의 계약 사실 몰랐다”

(시사저널=공성윤 기자)

오는 6일 열리는 '2024 인천 송도 국제마라톤' 대회에는 63개 동호회가 참여한다. 이 가운데 유독 길고 특이한 이름이 눈에 띈다. '송도 형지 오피스텔 전세사기 피해자 모임'이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서는 "슬픔의 극복 의지가 보인다" "피해 사실을 알리려는 노력일까" 등 관심이 쏟아졌다.

6일 열리는 '2024 인천 송도 국제마라톤' 대회의 동호회 소개 포스터. '송도 형지 오피스텔 전세사기 피해자 모임'이 58번 부스로 참여한다. ⓒ  마라톤대회 공식 홈페이지

이들은 '크로커다일' '에스콰이아' 등 브랜드로 유명한 중견 의류기업 형지그룹의 오피스텔에 투자했다가 돈을 날리게 된 임차인들이다. 피해자 모임 대표 임순록씨는 시사저널에 "총 피해자는 136명이고 이 중 42명이 이번 마라톤에 참여했다"며 "피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부스를 설치하고 호소문을 쓴 수건을 펼쳐 보이며 걸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피해자 모임은 '형지그룹은 임차인들의 보증금을 보장하라' '송도에서 혜택 보고 분양자들은 나몰라라?' 등의 문구를 내걸 계획이다. 그간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가두 시위에 나선 적은 전국적으로 수차례 있었지만, 이번처럼 체육행사에 집단 참여한 건 처음이라고 한다.

136명의 피해자…"피해 사실 알리려고 참여했다"

형지그룹의 부동산 리스크는 지난 3월28일 시사저널 보도로 처음 알려졌다. (「네오패션형지, 송도 사옥 담보대출 리스크에 휘말리나」 기사 참조) 시사저널 추가 취재 결과,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2021년 10월경 인천 송도동 형지그룹 사옥인 형지글로벌패션복합센터에 포함된 오피스텔에 전세 계약을 맺었다. 피해자 측이 추산한 보증금 규모는 총 47억5500만원이다.

오피스텔 소유주는 형지 계열사 ㈜네오패션형지다. 하지만 계약 상대인 임대인은 외형상 형지와 무관한 부동산 관리업체 ㈜스테이송도였다. 그 배경에는 형지가 스테이송도와 맺은 오피스텔 매매계약이 있었다.

인천 연수구 송도동에 있는 형지글로벌패션복합센터 ⓒ 연합뉴스

형지는 지난 2013년 PF(프로젝트파이낸싱) 대출을 받아 오피스텔 건설에 착수했다. 그러다 코로나에 경기 침체가 겹치자 2021년 준공 직후 통매각하기로 사전 결정했다고 한다. 걸림돌은 현행법(산업집적법)이었다. 해당 법률상 오피스텔이 들어선 산업단지는 5년간 분양이 제한된다. 막대한 개발이익과 시세차익을 남기는 행위를 막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형지는 소유권을 나중에 이전해주고 계약금과 중도금을 미리 받는 식으로 매각을 추진했다. 그 매각 상대가 스테이송도였다. 스테이송도 관계자 A씨는 시사저널에 "형지가 (매수 자금 마련을 위한) 대출과 금융 지원을 해주는 조건으로 2021년 9월 매매계약서를 썼다"고 설명했다. 동시에 형지는 오피스텔 수익 관리도 스테이송도에 맡겼다.

오피스텔 매매대금 마련 과정에서 문제 터져

다음 달 스테이송도는 오피스텔 분양 홍보를 시작했다. 말은 '분양'이지만 실제로는 전세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어찌 됐든 산업집적법상 분양이 제한돼 있었기 때문이다. 스테이송도는 '오피스텔을 기숙사로 활용해 월 18~20만원의 임대 수익을 받아줄 테니 임대차 계약과 전대차 계약을 동시에 맺자'고 피해자들에게 제안했다. 추가로 '5년 뒤에 2021년 시세로 분양 받을 수 있는 선택권'도 부여했다.

피해자들은 이를 믿고 스테이송도에 각 4500만~5000만원을 냈다. 이 금전의 성격에 대해 피해자들은 '전세보증금', 스테이송도는 '투자금'으로 간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스테이송도는 피해자들로부터 받은 돈을 형지에 오피스텔 매수 계약금조로 지불했다. 이후 스테이송도는 중도금 마련을 위해 새마을금고∙대구은행 등 20여개 금융기관으로부터 650억원을 빌렸다. 이때 형지가 스테이송도에 오피스텔과 판매시설 등을 대출 담보로 제공했다. 또 지난해 기준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형지는 스테이송도에 대출 금액보다 큰 780억원 규모의 지급보증도 서 줬다.

그러다 스테이송도가 대출 만기일인 2022년 4월을 지나 채무불이행에 빠지면서 사달이 났다. A씨는 "금리 인상에 따른 부동산 경기 침체의 영향이 있었다"며 "게다가 형지가 오피스텔 호실의 30%를 의무 임차해 주기로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아 사업 전체가 미진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지급보증을 선 형지가 스테이송도 차입금 650억원 전액에 대한 채무 부담을 떠안게 됐다.

형지그룹 로고와 계열사들 ⓒ 형지 홈페이지

형지 "피해자 금전 문제, 관리업체가 책임져야"

형지 측은 피해자의 금전 문제는 스테이송도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형지 관계자 B씨는 "스테이송도와 오피스텔 투자자 사이의 계약 사실에 대해서는 몰랐다"며 "부동산 관리업무를 수탁한 업체의 관리행위를 다 알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수백억원대 채무 부담에도 불구하고 지급보증을 서준 배경에 대해서는 "송도 사옥 공사비를 지급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부족한 공사비를 오피스텔 매각 대금으로 메우기 위한 안전장치였다는 취지다. '30% 의무 임차' 부분에 대해서는 "다툼의 소지가 있다"고 했다.

형지의 또 다른 고위관계자 C씨는 "피해자분들의 안타까운 심정은 이해하지만 법적으로 책임소재가 없는 부분까지 우리가 감당하는 건 곤란하다"고 밝혔다. 피해자 모임 대표 임순록씨는 "산업집적법상 형지와 스테이송도 간 매매계약 자체가 위법인데 여기에 우리를 끌어들였다"며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고래들의 싸움에 피해자들만 새우등이 터지는 상황"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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