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시즌을 마치고 클리블랜드의 허일 코치를 초대해서 '야구에 산다'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고 혈혈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맨몸으로 맞닥뜨려 현재의 마이너리그 코치까지 이르게 됐는데 그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미국 학생 야구, 특히 대학 야구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가 묘사하는 미국의 대학야구는 바이오 메카닉의 이상향이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테네시 대학교 감독이던 토니 바이텔로를 다른 어떤 과정도 없이 바로 메이저리그 팀의 감독으로 선임했습니다.
‘미국의 대학야구는 야구생태계에서 어떻게 이런 위상을 차지하게 됐을까?‘

그때부터 이런 궁금함을 계속 가지고 있던 차에 이 궁금함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습니다. 바로 미국 대학야구를 꾸준히 우리나라에 소개해주고 있는 이금강 님이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저는 주저 없이 미팅을 요청했습니다.
이금강 님은 한국에서 KBO 심판학교를 거쳐 미국 고등학교 심판으로 밑바닥부터 현장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미 노터데임 대학교 아시아연구소에서 전략 연구를 맡으며 '야구공작소' 등에서 야구 규칙과 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또 SNS를 통해 미국의 대학야구를 한국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NIL 시스템'과 대학교의 무한 투자, 미국 대학 야구는 '준프로'다
먼저 가장 큰 의문부터 풀었습니다. 왜 미국의 선수들은 대학으로 갈까요? 그리고 대학야구가 현시점에 이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금강 연구원은 아래와 같이 이 현상을 분석했습니다.
선수들이 프로가 아닌 대학을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는 이유는 NIL(Name, Image, Likeness) 시스템, 즉 대학 선수들의 초상권 영리 활동 허용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이미 대학에서 준 프로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죠.
'NCAA의 아마추어리즘 정신에 위배되는 것 아니냐'는 해묵은 논쟁은 이미 법원의 판결 앞에 무력화됐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미국 대학 야구의 특급 유망주들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을까요?
텍사스 A&M의 케이든 소렐 같은 선수는 연간 85만 달러(예상치, 한화 약 12.75억 원 이상)에 달하는 거액을 지원받습니다.
구조도 정교합니다. 과거처럼 체육부가 기부금을 받아 장학금으로 돌리는 수준이 아닙니다. 대학들이 아예 NIL 전용 별도 법인을 설립해 기업이나 동문들의 도네이션을 합법적으로 매니지먼트합니다.
여기에 억만장자 동문들의 '학교 사랑'이 더해집니다. 이른바 미드메이저(중소 규모) 대학이라 할지라도 동문들이 수백만 달러를 쾌척하면, 곧바로 메이저리그급 실내 연습장이 뚝딱 들어섭니다.

NCAA D1(1부 리그) 학교의 구장에는 예외 없이 '트랙맨'이 깔려 있고, 선수들은 수백만 달러짜리 바이오메카닉스 장비로 자신의 모션 캡처 데이터를 분석받습니다. 미국 대학야구의 피날레, 칼리지 월드 시리즈(CWS)에 올해 사상 처음으로 진출한 웨스트버지니아의 경우 500만 달러 규모의 바이오메카닉스 시설과 전문 연구인력들과 함께 팀의 성적이 날아올랐습니다. 선수들이 연구 윤리 동의서(IRB)에 기꺼이 사인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과학 기술이 나를 더 좋은 선수로 만들어주고, 내 몸값을 올려줄 것이라는 확신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등학교 최고 유망주들이 프로 구단의 드래프트를 거절하는 일도 다반사가 됐습니다.
작년 MLB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50번으로 피츠버그의 지명을 받았던 우완 투수 엔젤 세르반테스는 슬롯 머니 200만 달러(약 30억 원)를 걷어차고 UCLA 행을 선택했습니다.
루키리그의 열악한 정글에서 유망주들과 부대끼느니, 대학에서 슈퍼스타 대접을 받으며 과학적인 관리를 받고 3년 뒤 몸값을 500만 달러로 키우겠다는 계산인 겁니다.
미국 대학 야구는 이제 단순한 아마추어 무대가 아닌, 완벽한 '인큐베이팅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고 그 중심에는 선수들도 준프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NIL 시스템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뉴멕시코의 연병장에서 피어나는 한국 야구의 미래
미국 대학야구에서 우리 선수들은 어떤 활약을 펼치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는 선수는 누가 있을까요?
현재 D1 무대에서 뛰는 한국인 선수는 5명. 그중 무려 4명이 '뉴멕시코 군사학교(NMMI)'라는 독특한 환경을 거쳤거나 머물고 있습니다.
미국 학생들도 이 준군사학교를 기피할 때, 우리의 선수들은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실전 경기 수의 보장'이었습니다. 연습을 백날 하는 것보다 한 경기를 더 뛰는 게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실제로 북일고 출신의 이현욱 선수는 고3 시절 토미존 수술로 드래프트에서 미지명된 후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첫 시즌에 무려 100이닝을 소화하며 선발 로테이션을 돌았고, 오는 가을부터 일리노이 대학교로 건너가 선수 생활을 이어갑니다.
하이포인트 대학교에서 콘퍼런스 최고 선수가 된 오서준 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 NMMI의 주전 선발 두 명과 중견수, 2루수, 1루수, 포수 자리가 모두 한국인이었다는 것도 눈여겨볼 사실입니다.
이번 7월 MLB 드래프트와 가을 KBO 해외파 트라이아웃에서 주목해야 할 이름도 있습니다. 바로 과거 LG 트윈스에서 활약했던 권용관 선수의 아들, 권준혁입니다. 팀의 주전 2루수로 활약하며 2년 동안 두 자릿수에 가까운 홈런을 때려낸 거포입니다.
반발력이 강한 알루미늄 배트가 아닌, 나무 배트와 성능이 유사한 '비목재 배트(BBCOR)'를 쓰고도 두 자릿수 홈런을 쳤다는 건, 한국 무대에서도 충분히 장타력을 증명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보다 더 크고 당당한 체구를 가진 권준혁이 트라이아웃에 나온다면, 역대 해외파 트라이아웃 참가자 중 단연 '최대어'가 될 것이라고 이금강 연구원은 전망했습니다.

갇혀 있는 한국 야구, '서머리그'라는 출구 전략을 고민할 때
마지막으로 나눈 이야기의 주제는 우리의 폐쇄적인 아마추어 환경에서 우리 대학야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선수들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야구계의 현실은 여전히 좁고 닫혀있습니다. 당장 오는 7월에 열릴 세계대학야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는 서둘러 국내 대학 선수들로만 구성된 엔트리를 발표했습니다.
매우 안타깝습니다.
미국 D1에서 뛰는 우리 선수들을 합류시켰다면 어땠을까요? 그 선수들은 미국 대학 야구의 전력 분석 프로그램에 접속할 권한이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의 '베이스볼 서번트'처럼 상대 투수가 어느 타이밍에 어떤 공을 던지는지 영상과 데이터를 통째로 뽑아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정보전에서도 지고, 전력 강화의 기회도 놓친 셈입니다.

일본의 초특급 유망주 사사키 린타로가 스탠퍼드로 갔고, 사토 게네이가 국가대표 교류전에서 메이저리그 1라운드 후보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면서 펜스테이트로 편입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여전히 '우물 안의 리그'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금강 연구원은 한국 대학 야구의 고질적인 경쟁 부재와 구조적 한계를 깨기 위해 '한국형 케이프 코드 리그(Cape Cod League)' 같은 서머리그 도입을 제안했습니다.
NCAA 시즌이 끝난 여름, 전미 최고 유망주들이 특정 지역에 모여 독립 구단 형태로 주 5~6경기를 치르는 미국식 서머리그처럼, 우리도 강원도 고지대 같은 곳에 지자체 지원을 받아 6개 팀 정도의 대학 선발 리그를 만들자는 아이디어입니다.
드래프트 직전 두 달 동안 30~40경기를 집중적으로 치르게 한다면 선수들의 기량도 성장할 것이고, KBO 스카우트들도 여기저기 헤맬 필요 없이 한 곳에 상주하며 옥석을 가릴 수 있습니다.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보너스까지 챙기면서 말입니다.
며칠 전 ‘고교 대학 올스타전‘이 있었습니다. 이런 1,2회의 이벤트성 경기로는 선수들의 기량을 충분히 확인하기도 어렵고, 또 기량발전은 기대조차 불가능합니다.

야구세계는 넓어졌고 뛸 곳은 많다.
이금강 연구원이 오는 8월 클리블랜드에서 열리는 세이버(SABR) 애뉴얼 컨벤션에서 발표할 주제 역시 바로 이 '한·일 고졸 유망주들의 새로운 미국 대학 진출 루트와 동기 비교'라고 합니다.
세계 야구의 패러다임은 이미 국경을 지우고 있습니다. 태평양을 건너 대학야구에 몸을 던진 우리의 유망주들도 자신들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내고 있습니다.
고졸 유망주들이 메이저리그 계약금을 거절하고 대학으로 향하는 미국, 그리고 일본 구단들이 미국 대학으로 떠난 유망주를 '배신자'가 아닌 '귀한 자산'으로 여겨 드래프트로 다시 모셔가는 일본, 또 대학이 아닌 마이너리거들 위주의 구성이었지만 WBC에서 해외파의 위력을 보여줬던 타이완의 예에서 볼 확인할 수 있듯이 미국의 대학에서 뛰고 있는 우리 선수들도 소중한 우리 야구의 자산들입니다.
KBO의 까다로운 2년 유예 조항과 대학 입시의 포지션별 쿼터 제한이라는 규제 속에 갇혀 있는 우리 야구계도, 이제는 이런 조용한 혁명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이제 우리가 누벼야 할 야구장은 대한민국의 야구장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