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마주하기 싫은 건 한동훈일까, ‘김건희 문제’일까
집권세력 핵심 인사 “민심이 떠났다…영부인 문제, 대통령 외엔 풀 사람 없어”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갑을 관계, ‘김건희 특검법’ 앞에서 역전될 수 있어
(시사저널=박나영 기자)
"안 하느니만 못했다."
9월24일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두 달여 만에 마주 앉았지만 둘 사이에 '진정한 대화'가 없었던 점을 두고 나오는 탄식이다. 우여곡절 끝에 마련된 양측 만찬 자리에서 한 대표와 추경호 원내대표 맞은편에 앉은 윤 대통령은 한 대표 쪽을 거의 쳐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직 추 원내대표를 향해서만 얘기를 했다. 만찬 90분 동안 한동훈 대표에게 한 차례의 발언 기회도 주지 않았다. 여권의 핵심 인사는 "윤 대통령은 한동훈의 리더십을 아주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세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한동훈 대표 외롭게 말라." 7·23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열린 다음 날 신임 지도부와의 첫 만찬에서 윤 대통령이 참석자들을 향해 했던 이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앞서 만찬 전에 한 대표가 독대를 요청한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며 윤 대통령을 압박하는 모양새가 만들어진 것에 대해 '용산'은 불쾌함을 드러낸 바 있다. 대통령실이 독대를 거부한 배경에는 윤 대통령의 체코 방문 직후 한 대표 측이 독대 요청을 알리면서 체코 성과가 묻혔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한다. 둘 사이 신뢰관계가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통치 동력' 위협하는 대통령 지지율의 추락
당정 화합을 위해 준비된 만찬으로 '윤·한 갈등'은 더 악화됐다. 두 사람 갈등의 뇌관은 결국 '김건희 여사'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동훈 대표가 기를 쓰고 대통령과의 일대일 독대를 요청한 것이나 대통령실이 예의와 형식 등을 이유로 끝까지 이를 거부한 것이나 김건희 문제가 아니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김건희 문제란 명품백 사건에 대한 김 여사의 사과 표명 이슈를 비롯해 최근 불거지고 있는 공천 개입 논란, 야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김건희 특검법' 대응 등 영부인과 관련된 현안이다. 이 문제가 어떤 형태로든 해소되지 않으면 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하거나 10월16일 예정돼 있는 재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참패하리란 전망이 확산되고 있다.
'독대 빠진 만찬'에 대한 평가에서 친한계와 친윤계는 정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친한(친한동훈)계는 김건희 문제 풀기에 조급한 반면 친윤계는 한 대표가 자기 정치를 위해 대통령과의 차별화에 몰두한다는 불신을 갖고 있다. 친한 인사들은 한 대표가 혹시 기회가 있을까 해서 만찬 자리에 일찍 도착했지만 현안을 논의할 독대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반면 친윤(친윤석열)계는 "발언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한 대표 스스로 말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사안의 본질은 김 여사 문제 해법인데 한쪽은 내용, 다른 쪽은 형식만 얘기하며 서로 다른 다리를 긁고 있는 셈이다.
'용산'의 냉랭한 대우에도 한 대표는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인다. 그는 만찬을 끝내고 나오는 자리에서 홍철호 정무수석을 붙잡고 독대 재요청을 하는 동시에 이를 언론에 공개하겠다는 허락까지 받아냈다. 다음 날 취재진에게는 "허심탄회한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며 재차 독대 필요성을 강조했다.
윤 대통령의 '독대 거부'와 한 대표의 '독대 고집' 사이에서 여권에 긴장이 높아지는 모양새다. 양측이 일촉즉발 충돌할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여권 일각에선 "이러다 집권세력 전체가 공멸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지경이다.
"대통령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지켜줘야"
윤 대통령 독대 거부의 진짜 이유는 뭘까. 사이가 틀어진 사람과 마주앉기 싫은 걸까, 테이블에 오를 의제가 싫은 걸까. 윤 대통령의 한 참모는 사석에서 한동훈 대표의 공세적 독대 요구와 관련해 "한 대표는 대통령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존중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의대 정원 증원 같은 시그니처 정책을 말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 말고 더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닌가? 예를 들어 김건희 여사를 지키겠다는 가치 같은 것?'이라고 묻자 "그 부분에 대해선 답하지 않겠다"고 조심스러워했다.
실제 독대 테이블에 오를 의제로 한동훈 대표가 강조한 '중요한 현안'엔 김건희 여사 문제가 포함돼 있다. 그는 기자들이 '김 여사 사안이 독대 테이블의 의제냐'고 질문하자 "여러 사안이 있는데 그것도 그중 하나"라고 답했다. 한 대표는 최근 일간지 인터뷰에서 "대통령실의 생각이 민심과 동떨어져 있는데 불편한 거 싫다고 (대통령실) 편들어야 하나. 그리고 김 여사 명품가방 수수에 대해서는 분명히 부적절한 처신이었다. 사과해야 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김 여사가 연루된 명품백 수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처리 등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근 일부 매체를 통해 김 여사의 인사·공천 개입 의혹도 제기됐다. 윤 대통령이 지난 총선에서 '한동훈 비대위원장 사퇴'까지 요구하며 둘 사이를 벌려놓은 사안도 김 여사 문제였다. 이에 따라 윤 대통령은 김건희 문제가 대화의 주제가 되는 것 자체를 피하기 위해 한동훈 대표와의 '독대 거부'를 이어가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권의 또 다른 핵심 인사는 김 여사 문제를 회피하려는 윤 대통령의 태도를 안타까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부인 문제는 대통령 아니면 풀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 문제를 방치하면서 대통령의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지 않았나. 민심이 떠나는 소리가 들린다. 윤 대통령이 대선후보 때의 초심을 되돌아봤으면 한다. 국민만을 바라보고 주변 가족과 측근들에게 냉정한 거리를 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 대표가 사활을 걸고 있는 현안들엔 당연히 의·정 갈등 문제도 들어있다. 지난달 한동훈 대표가 '2026학년도 의대 정원 증원 유예안'을 들고나오면서 한덕수 총리와 충돌하는 장면이 연출됐는데 그 직후 예정됐던 대통령과의 만찬 일정이 연기됐다. 윤 대통령은 의대 증원 문제 역시 한발짝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여당 의원들, 대통령 눈치 보느라 현 상황 방관"
한 대표로서는 계속 용산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다. 친한계 인사는 "(대표로서는) 대통령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으면 공멸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대통령실 쪽에서 MB나 박근혜 대통령 때와 같이 사과하면 지지율이 더 떨어질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는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더 큰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현재는 한 대표가 매달리는 모양새지만, 언제까지고 한 대표가 을이고 윤 대통령이 갑의 위치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때처럼 한 대표를 고립시키려는 게 '용산'의 전략이라는 분석이 있지만 한 대표가 스스로 물러서지 않는 한 '한동훈 체제'의 붕괴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쯤 되니 내전 발발 가능성을 내다보는 이도 많다. 윤·한 관계가 파국에 이르기 전의 일종의 '빌드업' 과정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여권 분열의 빈 공간을 파고드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어부지리를 얻는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윤 대통령 탄핵 운동 같은 야권의 장외 공세에 탄력이 붙을 가능성이 있다.
용산 대통령실 내부 기류도 심상치 않다. 김건희 특검법 표결을 앞둔 상황이니만큼 참모들이 윤 대통령에게 한 대표를 인정하고 당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는 조언을 하고 있지만 윤 대통령의 반응은 부정적이라는 전언이다. 권력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임기 한가운데에 들어선 대통령은 통상 자신은 모든 것을 안다는 오만, 모든 것에 호령할 수 있다는 분노, 모든 인사를 좌우할 수 있다는 측근 정치에 익숙해지곤 한다. 지금 윤 대통령의 마이웨이가 심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참모들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건희 문제로 집권세력 1인자와 2인자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국민의 불안과 불신은 커지고 있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채널A 유튜브에서 "대통령이 한동훈 대표를 아직도 검찰 때 부하로 생각하지 않나 싶다"며 "대부분의 여당 국회의원들도 대통령 눈치를 보느라고 (현 상황을) 그저 방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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