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억 재산도 영예도 싫다, 조국에 전부 바친 독립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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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20〉 우당 이회영
우당(右堂) 이회영은 1867년 서울 저동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4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으로 그의 집안은 정승·판서·대제학 등이 대대로 배출된 명문가였다. 형으로 건영·석영·철영, 동생으로 시영·호영 그리고 누이 동생이 있었다.
선생은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품으로 봉건적 인습과 사상에서 벗어나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뜨게 되었다. 동생 시영은 과거시험 후 관료로 성장했으나 관직에 관심이 없던 선생은 죽마고우 이상설과 어울리면서 시국에 대해 걱정하며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4년 선생은 독립운동의 요람 ‘상동교회’에서 상동청년학원을 열고 학감을 맡았다.
![이회영 선생은 아나키스트로서 자신의 영예와 재산을 모두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사진 이회영 기념관]](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8/18/joongangsunday/20250818154631983jxim.jpg)
그 해 4월 선생은 윤치호·안창호·이동녕·양기탁 등과 함께 비밀결사단체 신민회를 결성했다. 신민회는 상동교회를 지도부로,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삼아 일본의 만행과 친일파의 죄상을 폭로했다. 신민회 활동에 일제의 압박이 강화되자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상설을 만나 독립군을 양성해 조국 광복의 길을 모색키로 한다. 1909년 봄 신민회 간부 회의에서 만주로의 집단 망명과 독립운동기지 건설, 군관학교 설립을 결정하고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선생과 이동녕 등이 먼저 현지에 가도록 했다. 이들은 초산진에서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 횡도촌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만주로의 이주·정착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기에 선생은 스스로 앞장서 모든 가산을 정리하려 귀국했다. 6형제가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선생은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걸할 수는 없으니 온 가족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함께 나설 것을 제안했고 모든 형제들이 이를 쾌히 수락했다. 선생 일가는 가산과 전답을 급하게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 40만 냥을 마련했다. 지금의 쌀값으로 환산하면 600억원 이상, 토지 가격으로는 조 단위의 거금이다. 1910년 12월 일가 40여 명은 북풍한설이 기다리는 만주로 망명에 나서 신의주에서 얼어붙은 압록강을 썰매로 건너 다시 횡도촌을 경유해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은 대고산 자락의 넓은 평지로 선생과 이동녕 일행이 서간도 답사 때 무관학교 설립 장소로 보아두었던 장소다. 이회영 일가의 소식을 들은 이상룡·김대락·김동삼 등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삼원보 일대로 합류해왔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우당 이회영 기념관. [사진 김석동]](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8/18/joongangsunday/20250818154632254xaqw.jpg)
신흥무관학교에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계속되었고 1911년 말 첫 졸업생이 나온 이래 10년간 약 3500여 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어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 등 무장독립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1913년 선생은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단신 밀입국해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1919년까지 6년간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 활동했다. 1918년 선생은 고종황제의 베이징 망명 계획을 추진했으나 고종의 죽음으로 무산되자 이듬해 1919년 2월 베이징으로 다시 망명했다. 당시의 국내 활동은 비밀리에 추진되어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3·1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수립 논의가 진행되자 동생 시영과 함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한 선생은 정부 형태의 임시정부 조직에 반대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연합할 수 있도록 조정·연결하는 독립운동 총본부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부 형태 조직이 되면 분규가 끊이지 않을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임정은 출범 직후부터 갈등과 내분에 휩싸이게 된 바 있었다. 임정의 분규에 실망한 이동녕·이시영 등도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선생의 거처는 신채호·김창숙·김규식 등 명망 있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독립운동의 요람이자 산실이 되었다.
![이회영 선생의 흉상. [사진 김석동]](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8/18/joongangsunday/20250818154632588ivvu.jpg)
망명 생활이 지속되면서 선생 일가는 베이징에서 극심한 가난을 겪게 되었고 텐진으로 이주했으나 나석주 의사의 의거에 관련되어 피신하는 등 생활은 더욱 곤궁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아나키즘 신념은 계속 되었고 그곳에서 김좌진 장군의 사촌인 젊은 혁명가 김종진을 만나 아나키스트로 인도하게 된다. 선생과 김종진은 김좌진이 아나키즘에 호의적인 입장으로 바뀌게 함으로써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이 한족총연합회로 통합항일전선을 이루도록 했다.
1930년 텐진의 아나키스트들은 일제의 압박으로 만주로 활동 무대를 옮기기로 했으나 고령의 이회영은 아들과 함께 상하이로 향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만주를 탈출한 아나키스트들은 상하이로 몰려들었고 선생의 지원 하에 아나키스트 운동을 계속 했다. 선생은 중국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항일구국연맹’과 행동조직인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활동에 나섰다.
1932년 선생은 만주를 새로운 활동 무대로 삼기 위해 앞장서 만주행을 결심하고 상하이 황포강 부두에서 다롄으로 향했다. 다롄 도착 전 일경의 경비선에 체포된 선생은 다롄경찰서에서 취조 받던 중 혹독한 고문 끝에 그 해 11월 17일 6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유해는 일제에 의해 화장되었다.
선생은 영예와 재산을 모두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끝내는 순국에 이르렀다. 신민회,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주역을 맡았던 선생은 아나키스트로서 동아시아인들이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평화를 지키고 협력으로 자유연대와 공존공영을 이루어 나가려는 꿈을 꾸며 항일운동에 일생을 바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6형제 중 5명이 독립운동 중 순국했고 그의 아들들도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후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된 시영이 조국에 돌아올 때 살아남은 일가가 20여 명 밖에 없었다 한다. 이종찬·이종걸 전 의원이 선생의 손자다. 1962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허묘로 안장되었다. 서울 사직동에 이회영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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